태초의 고립
<멋진 신세계>의 작가로 이름을 알린 올더스 헉슬리는 저서 <모크샤>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알코올은 고립된 자아로부터의 도피처로 인간들이 사용하는 많은 약물 중의 하나일 뿐이다. 약물로 유발되는 변화들은 명백히 나쁜 쪽일 수도 있어서 현재에 불쾌감을 유발하고 앞으로 중독과 악화, 때 아닌 사망이라는 대가를 치르게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인식으로, 한두 시간, 혹은 단 몇 분이라도 다른 누군가가, 고립된 자아가 아닌 다른 무언가가 되는 것이다. (...) 나는 살아있다. 내가 아니라, 내 안의 포도주로 살아있다. 고립된 자아의 한계를 넘어가는 것이 해방(Moksha)이다.
해방이란... 슬픔의 끝. 무지했던 자신의 과거에서 벗어나 참된 자신이 되어가는 것이다.
해탈(解脫) 또는 모크샤(산스크리트어: मोक्ष)는 다르마 계통의 종교(힌두교, 자이나교, 불교)에서 몸과 마음의 고뇌와 번뇌로부터 해방되는 것 또는 해방된 상태를 말한다. (출처: 위키백과)
우리는 허기를 느끼면 배를 채우고, 피로를 느끼면 잠을 잔다. 허기와 피로라는 신호탄은 식욕과 수면욕 같은 갈망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다행히도 우리는 그러한 갈망을 어떻게 잠재울 수 있는지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반면에 신호탄이 명백하지 않은 갈망이 있다면 어떻겠는가? 예를 들어 고립된 자아로부터 도피하고자 하는 갈망. 이것이 실제로 존재하는지,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있다고 한들, 그 갈망을 어떻게 잠재울 수 있는지 우리는 알고 있는가?
허기를 달래고 잠을 청하고 싶어 하는 갈망과도 같이, 인류는 고립된 자아로부터의 도피라는 근본적 갈망을 공유한다. 의식되지 않기에 그 존재 여부부터가 의심스럽겠지만, 이 갈망이 쏘아 올린 뚜렷한 신호탄이 있다. 만연한 나머지 익숙해져 버려 의식되지 않는 산소만큼이나 그 신호는 명백하다. 내적 공허감에 잠식당해 온갖 물질적, 정신적 상징물들로 자신을 덕지덕지 치장하는 현 사회는 물론이고, 겉모습만 다를 뿐 욕망과 전쟁으로 얼룩진(즉, 심리적으로 지금과 다를 바 없는) 인류의 역사가 바로 그 신호탄이다.
그렇게나 명백한 신호가 있다면, 왜 아무런 조치도 취해지지 않는가? 망각 때문이다. 스스로 고립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면, 해방을 갈망할 수 없다. 유리병 속에서 태어난 벼룩은 자신의 세계를 제한하는 병의 존재를 알 수 없다. 자신이 갇혀있다는 사실을 알 수 없다. 몇 번의 도약으로 머리를 부딪혀 가며 자기 세계의 한계선을 그렸고, 벼룩의 세계는 그렇게 고정되어 버렸다. 병 바깥에 다른 세계가 있다는 사실은 기껏해야 소설이나 영화 속 허무맹랑한 이야기, 망상을 위한 유희 거리로 치부될 뿐이다.
우리는 세계로부터 고립됐다. 에덴동산에서 세계와 합일된 상태로 존재하던 아담과 이브가 '앎의 저주'를 받아 스스로를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 태초의 고립이다. 세계로부터의 고립이야말로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살갗 속에 품고 살아가게 되는 원죄다. 그러나 이 사실에 대한 망각, 즉 자신이 세계로부터 분리된 존재라는 사실에 대한 망각 때문에, 해방에 대한 갈망은 의식될 수 없는 무의식의 저편으로 추방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워질 수 없는 원죄처럼, '고립된 존재'라는 사실은 세포 깊숙이 낙인찍혀 우리를 끊임없는 불안과 욕망의 낭떠러지로 밀어 넣고 있다.
세계로부터 최초의 고립은 우리가 거울을 처음으로 마주하며 거울 속에 비친 상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인지한 순간' 일어났다. 내가 움직이고자 하는 의지대로 움직여주는 육체가 거울에 비친 것을 본 순간, 나는 내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는 다른 모든 것, 외부 세계로부터 분리된 하나의 독립된 개체로서의 '나'를 인식한다. 하나의 총체로 존재하던 세계는 그 순간 '나'와 '나 아닌 것'으로 양분됐다. 훗날 언어를 습득하면서부터 '나'는 외부 세계를 더욱 정교하게 구획하고 이름 지어 분류하기 시작했다. 양분된 세계는 더욱 파편화되며 쪼개어졌고, 그 수술은 모두 내면세계, '나'의 집도하에 이루어졌다. 능숙하게 수술을 집도하는 '나'는 그 일에 너무도 몰두한 나머지 자신이 태어난 최초의 순간, 즉 세계로부터 떨어져 나와 자신이 탄생한 그 순간을 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