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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ank Lee Speaking Jul 28. 2024

비울수록 채워지고, 채울수록 비워지는 것은?

내적 공허감 vs 내적 빈곤

내적 공허감, 단어가 시사하듯 그것은 일종의 감각이다. 그러나 전용 감각 세포에 기반한 오감과는 달리 그것은 감지할 수 있는 신경 세포가 없어 ‘감각’할 수는 없는 종류의 감각이다. 끝없이 소유를 갈망하는 증상이 보인다면, 그 증상의 기저에는 내적 공허감이 자리하고 있다. 그 증상은 내적 공허감을 뿌리삼아 자라난 열매다. 더 많은 재화, 더 많은 인기, 더 많은 지식을 갈망하는 증상이 관찰되는가? 그렇다면 그 사람과 사회는 ‘소유적 실존양식에 잠식당했다’고 진단할 수 있다. 내적 공허감은 인류와 공존해 왔으며, 우리 삶과 강하게 결착되어 문명과 역사, 사회와 개인의 심리를 빚어왔기에 이제는 종의 특성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지경에 이르렀다.

  


<소유에 관한 에크하르트의 개념>

소유적 실존양식에 대한 에크하르트의 견해가 나타나 있는 원전은 “마태복음”(5:3)의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는 성경 구절을 바탕으로 한 가난에 관한 그의 설교이다. 이 설교에서 에크하르트는 심령의 가난함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파고든다. 맨 먼저 그는 자기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외적 빈곤, 다시 말하면 물질적 빈곤이 아님을 밝힌다. 물론 물질적으로 가난한 것도 칭찬할 만한 미덕임을 인정하면서 말이다. 그가 상론하고자 하는 것은 내적 빈곤, 복음서에서 언급된 예의 빈곤이다.

그는 내적 빈곤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아무것도 원하지 않고,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으며,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자가 가난한 사람이다.”(J. Quint, 1977)

소유냐 존재냐 – 에리히 프롬  


내적 공허감은 에크하르트 수사가 언급한 내적 빈곤과 대척점에 있는 개념이다. 채워져 있지 않다는 점에서 빈곤과 공허는 유사하게 보이지만, 내적 빈곤의 상태에서는 빈자리를 채우고자 하는 욕망이 부재하기에 내적 공허감의 대척점에 설 자격을 얻는다. 반면 내적 공허의 상태에 있는 사람은 견딜 수 없는 빈자리를 지식과 각종 소유물들로 채움으로써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가지려 한다. 공허한 자의 내면은 온갖 박제물들로 가득 차 있을지언정 활발발한 생명의 빛을 잃었기에 공허하고,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자’는 박제된 것, 죽어있는 것, 생명 아닌 것들을 비워냈기에 마침내 충만함으로 가득 찬다. 


인류의 역사와 공존해 온 내적 공허감이라는 바이러스에 대항할 유일한 백신은 내적 빈곤이다. 이는 우상화되고 경직되기 이전 초기 종교의 가르침이며, 에크하르트 수사를 비롯한 인류의 영적, 사상적 스승들이 한 목소리로 설파했던 가르침이기도 하다. 유대 문화에서 가장 엄격한 계율인 ‘안식일을 지키는 것’ 역시 같은 가르침에 그 뿌리가 닿아 있다. 선각자들이 시대와 이념과 문자를 초월해 일제히 가리켜온 단 하나의 달, 단 하나의 깨달음은 바로 소유 양식의 탈피를 통한 인간성의 회복이다.  


우리의 가족과 친구, 이웃을 비롯한 주변인 모두가 소유적 존재 양식을 당연하게 받아들여왔다. 다른 방식은 존재할 수 없다고 줄곧 믿어왔고, 바로 그 믿음 때문에 우리는 세상을 제한하는 이 선글라스를 벗어버릴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러나 ‘상식’적인 눈, 당연하다고 여겨져 왔던 눈, 이기심과 욕망으로 가득 찬 눈을 벗어던지고 세상에 큰 파동을 일으킨 선각자들의 존재는, 다른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증명한다. 올더스 헉슬리의 표현을 빌리자면 우리는 “스스로 줄곧 그러하다고 믿어와 벗어날 수 없었던 슬픈 존재가 되는 것을 그만둘 수 있다”.  그들의 존재는 진보한 의식을 바탕으로 공생과 화합을 최우선 가치로 삼는 새로운 인류의 출현이 가능함을 증명한다. 공멸로 질주하는 기관차에 올라탄 인류는 그들이 제시하는 새로운 의식으로의 방향 전환이라는 시대적 요구를 받는다. 


내적 공허감에 대해 이해함으로써 ‘내적 빈곤’의 상태로 한걸음 씩 나아가다 보면, 그들이 세계를 바라보았던 방식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다. 그 방식은 어색하지만, 새로운 것은 아니다. 현실의 추한 모습에 고통받을 줄 알았던 순수한 가슴을 간직한 시절에 ‘마땅히 옳다’고 느꼈던 그것이다. 어린 시절에 우리 모두가 느꼈던 그것이다. 말로는 적확하게 짚어낼 수 없었지만 누군가의 이타심에 근거한 위대한 행동을 볼 때 느꼈던 그것이다. 당신의 가슴을 울린 작품과 경험들의 표면을 들추어내면 그 속에는 하나같이 같은 메시지가 있다. 두려움을 이겨내는 용기, 피상적인 소유물을 내다 버린 존재 양식의 삶이 주는 간결한 충만감에 우리는 감동받는다. 이 감동은 시대와 문화, 언어를 초월한 범인류적 정서다. 이타심과 용기에 감동하고 이기심과 두려움에 눈살을 찌푸리는 인류의 보편적 정신 특질은, 그 근원의 정체가 생물학적 진화의 산물이건 종교에서 말하는 영혼의 작용이건 기원을 막론하고 현재 우리가 가진 유일한 희망이다. ‘양심’으로도 부를 수 있는 그 보편적인 버튼을 내면 속에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은, 내적 공허감이 만연한 현 실정에도 불구하고 인류에 희망을 걸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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