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는 불확실성으로부터의 도피, 두려움으로부터의 도피를 원한다. 파도가 두려워 큰 덩어리로 뭉쳐져 군중을 이루어 낸 조약돌들은 세계가 조금은 확실해진 듯한 허황된 착각에 빠져 안정감을 누렸으나, 그 대가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자신의 타고난 색깔과 잠재력의 매몰로 인한 개성 상실은 그중 가장 작은 대가에 속한다. 거대한 섬에서 ‘스스로 탈출해 다시 바닷속으로 뛰어들기에는 이러저러한 이유로 너무 늦었다'는 합리화를 내세우며 자기 내면의 근원적인 두려움을 삶이 다하는 그 순간까지 끝끝내 마주하지 못한다는 점은 큰 대가다. 뒷걸음질 치고, 애써 외면하고, 고개 돌렸기에 긍정할 수도, 감사할 수도 없었던 자신의 삶. 삶을 '살아내지 못한 것'은 가장 큰 대가다.
비워내는 중입니다 - 우리는 '살고'있는가 中
#1. 인간은 타인과 같아지고 싶어 한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원시 부족민 시절부터 무리 지어 생활해 왔다. 가족과 친구, 지역 사회, 직장, 국가, 종교 등의 크고 작은 문화권 속한 이상 그 문화권에서 ‘옳고, 선하고, 아름다운 것’으로 여겨지는 가치를 습득함으로써 공감대를 형성하고자 하는 기본적 욕구가 있다. 그러한 기본적 욕구를 공유한다는 사실은 우리가 공감을 원하는 인간임을 상기시켜 준다. 한 편 같아지고 싶어 하는 욕구는 때때로 개성의 몰락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색채를 잃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느끼는 상실감은 우리에게 개성과 자아실현에 대한 욕구 또한 존재한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준다. 즉 '같아지고 싶어 하는 욕구'는 양날의 검인데, 공감의 형성과 개성의 실현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공감대를 형성하는 가치로부터 독립하려는 시도는 두려움을 낳기 마련이다. 그러나 무라카미 하루키가『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에서 말했 듯, 마음이 받게 되는 아픈 상처는 그와 같은 인간의 자립성이 세계에 대해 지불하지 않으면 안 될 당연한 대가인 것이다.
#2. 이해의 대가
『예술가여, 무엇이 두려운가! 』의 작가 데이비드 베일즈 역시 예술가들의 처지를 예로 들어 비슷한 주장을 펼친다.
일반적으로 예술가들 자체는 정상성의 모범이 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벤 샨이 빈정대었듯이 “거실 벽에 반 고흐의 작품을 걸어놓는다면 굉장한 자랑거리가 되겠지만, 반 고흐 자신이 거실에 앉아 있다면 많은 열정적인 미술애호가들은 실망을 금치 못할 것이다.”
어쨌든 이해를 받고자 하는 것은 기본적인 욕구로서, 주위사람들과 동일한 인간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해 주는 과정이다. 하지만 그로 인한 결과는 무시무시하다. 자신의 진정한 작품에 대한 이해를 거절할 힘을 감상자에게 내어주어, 그들에게 “당신은 우리와 다른 이상한 존재이다. 당신은 미쳤다”라고 말할 권력을 주는 것이다.
#3. 두려움이 전염되는 방식
나는 스스로 작다고 느낀다. 나는 두렵고, 긴장 상태를 유지한다. 이러한 심리적인 긴장은 얼굴이나 몸의 미세한 근육에 긴장을 유발한다. 근육의 긴장은 얼굴의 미세한 표정, 걸음걸이, 성대 근육에 의해 조절되는 억양과 톤에도 영향을 미친다. 즉, 심리적 긴장이 생리적인 긴장을 유발하여 언어는 물론이고 눈빛, 표정, 움직임의 크고 작은 형태나 속도 등의 비언어적 행동에도 긴장이 묻어난다. 인간은 비언어적 요소를 통한 의사소통을 무의식적으로 발달시켜 왔다. 굳이 의식하지 않더라도, 명확히 말로 표현할 수는 없더라도 상대방이 긴장했다는 사실은 한눈에 알아볼 수 있고, 느낌이나 감각으로 다가오는 ‘본능적인 인식’은 언어에 앞선다.
긴장은 두려움의 표식이요, 두려운 사람은 스스로 작아진 상태를 견디지 못하기에 거기에서 벗어나고자 스스로의 비대해지기를 꾀한다. 두려움에 기인한 자부심과 분노를 떠올려보라. 스스로 작다고 느끼기에 남들에게 커 보이고 싶어 하며, 위세를 떨치고 싶어 한다. 자부심의 강력한 표현은 곧 자아의 팽창과 비대로 이어지는데, 이러한 부풀리기가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대개 스스로 당황하고 이러한 당황은 많은 경우 분노로 이어지게 마련이다. 스스로 작아졌다는 두려움이 바로 자신이 가진 것에 대해 자부심을 내세우게 하거나 분노하게 만드는 원인이다.
‘작아진’ 상대방에 대한 인식 자체가 바로 ‘자신의 작음’에 대해 떠올리게 만드는 기폭제로 작용한다. 저 사람은 두려움에 스스로를 부풀렸다. 그러나 부풀림의 뒤에 두려움이 근거한다는 사실에 대해 무지할 경우, 부풀려진 결과만을 보기 마련이며, ‘비대해진’ 상대방을 보는 것은 ‘나는 작지 않은가?’를 스스로 하여금 묻게 한다. 그리고 스스로 작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 대다수의 사람에게, 이러한 물음은 십중팔구 ‘나는 작다’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그렇게 나는 작아졌고, 두려움을 느꼈고, 긴장한다. 즉 타인의 두려움이 내게 전염된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는 나의 두려움을 보고, 나의 비대해진 자아를 보고, 또다시 작아진다. 이것은 질병처럼 계속해서 퍼져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