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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박가 Apr 17. 2024

선이 어딨어

  마을 입구에 들어서면 느티나무 두 그루가 양팔을 벌려 손님을 맞이해 준다. 느티나무의 허리쯤 되는 높이에 다리가 놓여 있다. 그 아래로 냇물이 잔잔히 흘러간다. 다리 옆으로는 ‘범죄 없는 마을’이라는 마을의 자랑스러운 이정표가 걸려있다. 팔월대보름에는 느티나무 가지에 밧줄로 긴 그네를 걸었다. 우리 같은 잔챙이들에게 그네 탈 기회가 바로 오지는 않았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함께 그네가 바람을 가르는 소리를 듣고 있으면 나도 하늘을 나는 것 같았다.


  느티나무는 우리의 놀이터이기도 했다. 여름에는 나무 위로 매미를 잡으러 올라갔다. 나이 먹기 놀이를 할 때는 느티나무 둥치가 우리의 본부가 되어 주기도 했다. 느티나무 가지를 지붕 삼아  어른들은 높지 않은 다리 위 난간에 앉아 오며 가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이 다리에서 놀았다. 아이들이 많지 않을 때는 얼음땡을 하고 놀았다. 놀다가 가거나 중간에 끼어서 노는 아이들도 있었다. 방학 때는 외지에서 온 아이들도 어느새 무리에 끼어 함께 놀았다.


  영미와 영은이도 여름방학이면 늘 우리 동네에 놀러 와서 한 달을 다 채우고 돌아갔다. 영미 할머니 댁은 다리를 건너면 바로 앞에 있었다. 나는 서울에서 온 영미와 영은이가 마냥 신기했다. 피부도 뽀얗고 무엇보다 내가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서울살이에 관한 이야기는 무척 재미있었다. 서울에는 다리부터 저 아래 우리 큰아버지네 집까지 되는 길이의 세탁기가 있다고 했다. 우리 집에는 세탁기는 고사하고 탈탈거리다 자리를 이탈하고 마는 고물 탈수기뿐이었는데 정말 놀라웠다. 이 얘기 하나만 듣고도 나는 ‘역시 서울은 신기한 도시구나’ 하며 그곳을 얼마나 동경했는지 모른다. 나는 이 말을 5년 때까지 믿었다.


  영미는 나보다 한 살 어렸고 영은이는 내 동생 선이 보다 한 살 어렸다. 나이는 다 달랐지만 우리 넷은 쿵작이 잘 맞아서 거의 매일같이 함께 놀았다. 다리는 물론이고 영미네 할머니 댁 앞 공터에서 헛마당까지 온 동네를 휩쓸고 다녔다. 어느 날부터인가 다리 옆 공터에서 영미네 할아버지께서 양봉을 하셨다. 그곳에는 벌집 상자들이 죽 쌓여 있었지만 벌들이 딱히 우리를 공격한 적은 없어 우리는 헛마당까지 가지 않고 거기에서 자주 놀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이었다. 우당탕 소리에 밖을 내다보니 벌써 사랑문이 닫혔다. 누군지 잽싸게 방 안으로 들어간 모양이었다. 저녁 어스름이 내린 마당에서 흰둥이가 개밥을 열심히 먹고 있었다. 코를 박고 먹는 모습이 재미있어서 한참을 보고 있다가 슬며시 잠이 들었나 보다. 어머니의 “밥 먹자!” 소리에 화들짝 일어나 밥상 앞으로 갔다. 아홉 명이 둘러앉은 밥상은 늘 조금의 틈도 허락하지 않았다. 우리 집의 암묵적인 식사 규칙은 밥을 먹는 동안에는 웬만하면 말을 하지 않는 거였다. 말하는 동안에 한 숟가락이라도 덜 먹을까 봐 그런 것이었다. 고기라도 상에 올라온 날은 특히 더 그랬다. 좁은 틈바구니에서 치열하게 밥을 먹고 있는데 밖에서 웬 소리가 들렸다.


“선이 어딨어!”

  일단 ‘선이 어딨어!’로 시작되면 선이가 뭔가 또 사고를 쳤다는 거였다. 선이는 이웃의 복숭아가 말캉말캉 귀엽다며 수확해 놓은 것을 다 눌러 못난이로 만들어 놓았었다. 또래 남자친구가 장난을 걸어왔다고 그 애를 때려서 한바탕 난리가 나기도 했었다. 또 무슨 일인가 싶어 밖을 내다보니 영미네 할머니가 씩씩대며 마당을 가로질러 들어오셨다. 좀 전에 헐레벌떡 사랑방으로 숨어든 건 선이가 분명해 보였다. 아무튼 홍길동이 따로 없었다. 언제 그렇게 밥상 앞에 앉은 건지도 모르겠다.


  아버지가 왜 그러시냐며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셨다. 우리는 일동 숟가락을 내려놓고 영미네 할머니와 아버지의 대화에  기울였다.

“선이 저놈의 지지바가 집에 벌통 다 쑤셔놔서 영미 영은이 벌에 잔뜩 쏘여서 왔다고!”

“선이 나와봐! 너 영미네 벌통 쑤셨어?”

마당을 울리는 아버지의 쩌렁쩌렁 큰 소리에 내 가슴이 다 오그라드는 것 같았다. 나는 긴장된 마음으로 선이의 대답을 기다렸다.

“네. "

순간 나는 동그래진 눈으로 영미네 할머니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 선이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영미 언니랑 영은이가 안에 뭐가 들어있나 궁금하다고 저한테 쑤셔달라고 해서 쑤셔준 건데요.”

   영미네 할머니는 기가 찬 지 한동안 입을 벌리고 서 계셨다. 그러더니 입을 꾹 다물고는 휙 돌아 나가셨다. 곧 선이는 아버지께 엄청 혼이 났고 우리는 숨죽여 밥을 먹었다.


  그날 밤 잠자리에서 선이에게 왜 그랬는지 물어보았다. 영미가 벌통을 쑤시면 어떻게 되는지 궁금하다고 계속 물어보는데 설명을 하기가 어려웠단다. 그때 마침 벌통을 쑤셔 달라고 작대기를 내밀어서 쑤셨을 뿐인데 순식간에 벌이 그렇게 많이 날아올 줄은 몰랐다는 거였다. 당연히 애들이 도망갈 줄 알고 자기도 쏜살같이 집으로 도망 왔으며 영미네 할머니가 집에 찾아오시기 전까지는 그새 잊고 있었단다. 그러면서 ‘걔네들은 달리기가 왜케 느린가 몰라’라고 말해 이번에는 내 기가 막히고 말았다.


   다음날 오전에는 영미 할머니 눈치가 보여서 집에 틀어박혀 있었다. 그러다 답답해져 피신 중이던 선이를 꾀어내어 함께 다리나갔다. 영미랑 영은이는 온몸에 된장을 덕지덕지 바르고 다리 아래 도랑에서 송사리를 잡고 있었다. 우리도 시원하게 송사리를 잡고 싶었지만, 다리 위를 어슬렁거릴 수밖에 없었다. 영미 할머니 댁 담장 위의 따가운 눈총이 우리를 계속 따라다녔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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