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이 다가오면 어머니는 마전장에 다녀오셨다. 장에 간 어머니는 가래떡부터 옥고시 한 자루에 우리의 설빔까지 양손 가득 행복을 안고 돌아오셨다. 어머니는 아무리 삶이 팍팍해도 설 때만큼은 우리 다섯 자매에게 꼭 설빔을 마련해 주셨다. 주머니가 가벼운 어머니의 미안한 마음이 그것에 얼마간 녹아있었을 것이다.
그 무렵이면 우리 집뿐 아니라 마을 전체가 시끌벅적했다. 마을 한복판 냇가 바위 위에서는 동네 아저씨들이 돼지를 잡았다. 어린아이들이 보면 안 된다고 해서 우리는 집 밖으로 나가지 못했지만 온 동네를 울리던 돼지 멱따는 소리는 아직도 또렷하게 내 귀청을 흔든다.
설을 맞이하며 어머니는‘고무 다라’에 뜨거운 물을 받아 우리의 때를 불리고 한 명씩 ‘이태리타올’로 등이 벌게지도록 닦았다. 개집 뒤에 둔덕처럼 쌓여있던 잿더미도 치워지고 구멍 송송 뚫린 방문도 창호지로 발라졌다. 어머니는 창호지 중간에 말린 꽃잎을 넣어 멋을 부리기도 했는데, 어느새 누렇게 변할 걸 알았기에 나는 새 방문을 아끼는 마음으로 바라보고는 했다.
늘상 할머니의 소막 방문으로 설의 시작을 알렸다. 이미 여물통에 짚단이 가득한데 할머니는 잔뜩 인상 쓴 얼굴로 구시렁거리며 굳이 그 위에 짚을 또 얹어주셨다. 그러면 분명 친척 중 누군가 오기 시작했다는 신호였다. 아닌 게 아니라 큰댁에는 사촌 오빠들과 새언니와 조카들이 당도해 있었다. 설은 큰집에서 친척들이 다 모여 지냈다. 우리 집과 큰집은 ‘헛마당’이라고 불렸던 공터를 사이에 두고 대각선으로 마주 보고 있었다. 우리는 집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어머니의 호출이 떨어지면 큰댁으로 우르르 몰려갔다.
설날 아침이면 차례를 지내고 떡국을 먹었다. 그리고는 할머니께 세배를 올렸다. 언제나 상석인 할머니의 자리 뒤에는 동전이 가득 찬 깡통이 있었는데 우리가 절을 하면 할머니는 거기에서 동전을 꺼내주셨다. 할머니의 세뱃돈은 언제나 십원이었다. 어린 나이에도 십원이 값어치 있게 느껴지지는 않아서 아주 감사히 받았던 기억은 없다.
세배까지 마치고 나면 큰집 오빠의 트럭과 큰아버지의 택시에 나눠 타고 우리는 서대산에 있는 할아버지 산소에 성묘하러 갔다. 올라가는 길이 험해 나뭇가지에 팔을 긁히기도 했지만 사촌 오빠들과 함께 가서 재미있기도 했다. 집에 돌아오면 목소상회로 십원에 두 개하는 사탕을 사 먹으러 갔다. 가게 앞에는 동네 아저씨들이 일찍부터 멍석을 깔고 윷놀이를 하고 계셨다. 우리 같은 잔챙이들은 윷놀이에 낄 수 없었지만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해서 입에 사탕을 살살 녹이며 한참을 기웃거리다 돌아오곤 했다.
점심 무렵이 되면 꽹과리를 따라 징이며 북을 든 동네 아저씨들이 집집마다 농악을 울리고 다녔다. 우리 집에도 아저씨들이 오시면 옥고시와 큰집에서 가져온 꼬치며 어머니가 담근 동동주를 꺼내 정성스럽게 대접하고는 했다. 그런 시끄러운 소리가 왠지 명절 분위기를 더 살려주었고 얼마간은 마음을 붕 뜨게 만들어 주었다.
윷놀이에 농악놀이에 정신을 쏙 빼앗겼다가 오후가 되면 오빠들도 언니들도 각자의 보금자리로 돌아갔다. 왠지 헛헛한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한 자루 가득 쌓인 옥고시가 이내 마음 한편을 든든하게 채워주었다. 옥고시를 '양재기'에 담아 아랫목에 옹기종기 둘러앉아 먹으며 명절 특선 영화를 보는 맛은 정말 달콤했다. ‘옥고시’는 쌀강정의 경상도 방언이라는데 어찌하여 이 충청도 산골짜기에서까지 쓰이게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우리에게는 명절에 맛볼 수 있는 달짝지근한 최고의 간식이었다.
결혼하고 단촐한 설을 보내며 온 마을이 축제의 장 같았던 내 어린 날의 설이 그리워지곤 했다. 새언니들과 어머니와 큰어머니의 노고가 있었기에 우리가 즐길 수 있는 명절이었다는 것을 이제는 너무나 절실히 잘 안다. 그럼에도 목울대가 울렁거리는 이 진한 그리움은 다시 돌아갈 수 없는 내 어린 날의 동화라서일까, 아니면 내가 누렸던 풍만한 행복감을 우리 아이들은 끝내 누려보지 못할 것이라는 아쉬움 때문일까. 잘 모르겠다. 다만 아직도 명절이 돌아오면 ‘깨갱깽깽’ 꽹과리 소리가 내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