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철학의 공허함과 테크노사이언스적 책임
기술철학은 오랫동안 “기술은 인간을 소외시키는가?”, “기술은 도구인가 목적 그 자체인가?”와 같은 존재론적 질문을 던져왔다. 그러나 질문은 대체로 질문으로만 남았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실천적 지평으로 잘 이어지지 않는다.
내가 고등학생 시절 경험했던 일도 그랬다. 한 저명한 생태학 교수는 국제결혼과 세계화가 진행될수록 인류의 유전적 다양성이 줄어 전염병에 취약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이메일로 물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대비를 해야 합니까?” 그러나 돌아온 답은 “나는 그 미래가 궁금할 뿐, 대비에는 관심이 없다”였다. 그 순간 나는 느꼈다. 지성인이 질문의 구경꾼에 머무른다면, 사회는 방향을 잃는다는 것을.
브루노 라투르는 과학을 “순수한 사실의 발견”으로만 볼 수 없다고 했다. 과학은 언제나 정치, 경제, 사회의 맥락과 얽혀 있으며, 연구자 역시 그 효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나는 호기심이 있을 뿐”이라는 말은 중립적 진술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지식이 사회에 끼치는 파급력을 부인하는 회피다.
지성인이 진단과 해석만 하고 떠난다면, 그 빈자리는 대개 자본, 권력, 그리고 무책임한 담론이 채운다. 그렇다면 지성인의 역할은 단순한 해석자가 아니라, 위험을 담론화하고, 사회적 대응을 설계하며, 제도적 제언을 제시하는 책임을 포함해야 하지 않을까?
플라톤은 『국가』에서 가장 이상적인 통치자를 철인(철학자-왕)이라고 보았다. 단순히 지혜를 탐구하는 자가 아니라, 그 지혜를 바탕으로 공동체의 선을 실현하는 책임을 지는 자가 철인이었다. 오늘날의 지성인도 마찬가지다. 사유와 성찰에 머물지 않고, 그것을 사회적 방향 제시에 연결할 때 비로소 철인의 자격을 획득한다.
테크노사이언스적 지식인은 플라톤적 철인의 현대적 변형이라고 할 수 있다. 지식이 사회·기술·정치와 얽혀 있다는 사실을 전제한다면, 지성인은 단순 구경꾼이 아니라, 설계자이자 조율자로서 공적 책임을 감당해야 한다.
미셸 푸코는 지식과 권력이 결코 분리될 수 없다고 보았다. 지식은 권력을 통해 제도화되고, 권력은 지식을 통해 정당화된다. 이 관계 속에서 “나는 단지 알고 싶을 뿐”이라는 말은 순수한 선언이 아니라, 이미 권력적 효과를 낳는 행위다.
따라서 지성인이 자신의 발언이 갖는 권력성을 외면하고 “중립적 구경꾼”으로 물러서는 순간, 사실상 더 큰 권력 구조에 협력하게 된다. 푸코의 시각에서 본다면, 지성인의 무관심은 적극적 개입 못지않게 정치적 행위인 셈이다.
나는 기술철학의 공허함보다, 테크노사이언스가 제시하는 구체성을 택하고 싶다. 테크노사이언스는 과학과 기술이 사회 속에서 어떻게 구성되는지를 분석하며, 동시에 그 실천의 결과가 사회적 위험과 가능성으로 어떻게 되돌아오는지를 추적한다.
따라서 지성인의 태도는 단순히 “위험이 올 것이다”라고 말하는 데서 멈춰서는 안 된다. 위험은 어떤 경로로 사회에 증폭되는가, 어떤 기술적·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며, 그 과정에서 시민은 어떻게 참여할 수 있는가를 함께 논의해야 한다. 지성인은 구경꾼이 아니라, 설계자이자 촉매자가 되어야 한다.
플라톤의 철인은 지혜를 실천으로 옮겼고, 푸코는 지식의 불가피한 권력성을 드러냈다. 이 두 시선이 교차할 때, 지성인은 더 이상 단순한 사유자가 아니라 사회적 책임의 주체로 자리 잡는다.
지성인은 반드시 행동가일 필요는 없다. 그러나 최소한 담론을 열고, 방향을 제시하며, 사회가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자문해야 한다. 질문에서 멈추는 지식은 공허하다. 하지만 질문을 사회적 상상력으로 연결할 때, 지성은 살아 있는 책임이 된다.
#생각번호202509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