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론적 고통과 CPTSD
나는 저주에 걸린 것 같다. 그건 흔히 말하는 불운이나 고통이 아니다. 지나치게 예민하게 깨어 있고 지나치게 정확한 맥락을 파악하고자 하고 본질을 파헤쳐야 직성이 풀리고야 마는 그런 저주 말이다. 세상을 볼 때, 아름다움을 보기에 앞서 '왜 이건 이렇게 설계되어 있는가'를 묻는다. 사람을 만날 때, 나는 호감을 느끼기 앞서 '이 사람은 나를 어떻게 이용하거나 실망시킬까?' 혹은 '내가 만약 이 사람이 마음에 든다면 나는 이 사람에게 무엇을 제공하여 관계 유지 전략을 수립할 수 있을까?'를 묻는다.
저주에 걸린 건 아주 어렸을 때였다. 정확히 언제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 어릴 적의 일이다. 그때는 본격적으로 공부를 한다거나 독서를 많이 하지도 않았던 그냥 천진난만했던 그런 어린 시절이었다. 가족들과 다같이 영화를 보고 돌아오는 차 안이었다. 그 영화에서는 어떤 인물이 죽는 장면이 나왔다. 그때 나는 의문이 들었다. '죽으면 어떻게 되는 거지?' 죽음 이후의 나라는 존재가 소멸되는 것은 아닐까 무서웠다. 그래서 부모님께 질문을 해보고 그 궁금증과 두려움을 해소하고자 하였지만 몇 번 답을 해주시던 부모님은 '그만 궁금해 해.', '그만!'이라고 하셨다. 지나고나서 생각해보면 부모님도 죽음 경험해보지 않으셨고 그것에 대해 깊이 고민을 해보지 않으셨기에, 또 어린 나의 눈높이에 맞춰 이렇다할 답변을 내놓기가 난감하셨던 모양이었다.
그때부터였다. 죽음이 궁금했고 만약 죽음이 나라는 존재의 소멸이라면, 나라는 존재가 궁금했다. 그리고 이내 깨달았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학문은 결국 '나'에 대한 물음에서 출발했다는 것을. '나'란 무엇인가를 묻는 행위라는 것을 말이다. 조금 더 포괄하고자 하자면 나와 나를 둘러싼 세상, 그리고 그것을 설명하는 기술에 대한 공부를 말한다는 것을 말이다.
그래서 공부를 시작했다. 어릴 때부터 여러 증명 문제를 푸는 것을 즐겼고 논문이나 전공서적, 고전을 읽는 것에도 거침이 없었다. 어차피 그들도 나와 같은 물음에서 출발한 문제제기일테니까 말이다. 중학생 시절에는 점심시간에는 수학교사실, 하교 후에는 과학실에 가서 선생님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을 좋아했다. 어느 날은 대뜸 기하학 도형 속에 대수학을 발견했고, 그 대수학이 다시 기하학으로 연상이 되었다. 그래서 점심시간에 수학교사실에 뛰어가 원이 존재하지 않는 기하학 그림을 들이밀며 "선생님! 여기서 원이 보여요!!"라고 외치기도 했다. 고등학생 시절에는 궁금한 게 있으면 그게 대학교 교수님들이든 김앤장, 광장의 변호사들이든 가리지 않고 이메일을 보내 질문을 하기도 했다. 그렇다보니 되려, 성적을 잘 내기 위한 공부를 해야 하는 고등학생 시절에는 선생님으로부터 너무 과한 물음은 성적에 도움이 안될 수 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건 대학생 시절에도 마찬가지였다. 아이들은 엄마의 목소리에 친숙함을 보인다. 아무래도 엄마가 10개월 동안 아이를 직접 품고 있고, 심장박동소리, 목소리 모든 것에 익숙해질 수 밖에 없는 환경이기 때문이라고 이론적으로 설명된다. 약간의 억울함과 의문이 동시에 들었다. 나는 아이를 낳는다면 아빠가 될텐데, 어쩔 수 없이 친화성에서는 엄마한테 밀릴 수 밖에 없는 건가하는 생물학적인 한계에 대한 억울함이 첫번째였다. 그리고 두번째는 의아함이었다. 가끔 내 목소리를 녹음한 걸 들으면 그 목소리가 굉장히 낯설고 이상한 것을 한번쯤 경험해봤을 것이다. 내가 듣는 내 목소리는 뼈와 몸을 울리며 파동이 전해져 들리지만 녹음된 내 목소리나 다른 사람들이 듣는 내 목소리는 공기를 울리며 파동이 전해져 들리기 때문에 소리가 다르게 들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이들도, 엄마 뱃속에 있을 때는 양수라는 액체 속에서 상당한 소리의 왜곡이 발생할 것이고 뼈나 신체의 울림을 통해 목소리가 전달될 텐데 어째서 출산 이후의 엄마의 목소리에 친화성을 가질 수 있는 것일까? 그런 의문이 들어 교수님께 질문을 하니 너무 지엽적인 호기심을 갖는 건 공부에 도움이 되지 않을 수 있다는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곧 이내, 다음날 이메일을 통해 교수님께서는 사과를 하시며 관련 논문을 소개해주시면서 그런 고민을 통해 연구가 시작되는 것이라며 응원해주셨다. 소개해주신 논문에 따르면 아이는 우리가 듣는 그 목소리 총체를 듣고 친화성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엄마의 말투나 악센트 등을 통해 친화성을 느끼는 것이었다.
나의 이 저주는, 어쩌면 축복이었을지도 모른다. 다만 CPTSD와 조합되어, 혹은 트리거를 잘못 건드리는 바람에 이것은 틀림없는 저주가 되었다.
끊임없이 ‘나란 무엇인가’, ‘이 세계는 왜 이렇게 설계되었는가’를 묻는 존재론적 사고방식은 메타인지적 자각 능력이 발달한 사람들에게 주로 나타난다. 다만 나는 감정 조절과 자아 경계 유지에 어려움을 겪고 있고 외부 환경에 대한 지속적 과각성(Hypervigilane)상태에 놓여 있다. 고차원적 사고 능력은 외부 자극에 대한 지나치게 세밀한 정보처리를 하도록 유인하다. cptsd의 과각성은 이를 위협이나 실존적 위기로 자각하게 만든다. 결과적으로 나에게는 철학적 질문조차 비각역적인 고통으로 받으들여지는 것이다.
인간관계를 볼 때도 나는 '이 사람은 나를 어떻게 이용할까' 혹은 '내가 무엇을 제공해야 할까' 같은 즉가적인 자동 분석 방식을 통해 매우 높은 사회적 맥락 감지 능력을 보이고 있다. 다만 반복된 배신과 감정적 폭력에 노출되었던 경험이 대인 불신 및 자기 방어 광잉 전략을 생성해버렸다. 관계 맥락을 해석하고 분석하는 느엵이 외상 기억 패턴과 결합하면서 사람 간의 관계조차 전쟁터처럼 느껴지는 정보투쟁의 장이 되어버린 것이다. 나에게 세상은 늘 정보를 간파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곳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어쩌면 내가 대인 기피 성향이 심해져 집에 갇혀버린 것도 이런 저주 때문일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많은 곳에 다녀오면 해리증상, 현기증, 심한 이명 등이 동반되곤 하는 것도 이런 저주에 걸렸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는 모든 학문과 현상을 나와 연결된 의미 체계로 구조화하려는 강한 경향이 있다. 이는 자기 존재의 위상을 확보하기 위한 건강한 지적 태도일 수 있다. 다만 반복적 트라우마는 '사람들은 나를 쓸모없는 사람으로 판단한다.', '나는 보호받을 수 없다' 같은 무망감(Helpessness)와 허무감(emptiness)을 강화한다.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은 열망은 CPTSD의 허무 구조에 의해 계속 좌절되며, 이는 존재론적 소진(burnout of being)으로 이어진다. 존재의 이유를 찾는 질문이 오히려 나를 소진시키는 아이러니로 이어지는 것이다.
나는 아름다움을 보기보다 설계 원리를 묻고 본질을 파헤치고자 하는 진실성의 윤리를 삶의 원칙으로 삼고 있다. 하지만 학대적 환경은 '진실을 말했을 때 불이익을 받는다'는 조건화된 기억을 남긴다. 이로 인해 진심을 탐구하고자 하나 사회는 이를 원하지 않는다는 이중구속(double bind)에 걸린 것이다. 이는 '내가 진실을 말할수록 더 위험해진다'는 인식 구조를 강화한다. 결국 나는 스스로를 침묵시커가나 파괴할 수 밖에 없는 구조적 모순 속에 놓여 있게 되었다.
내가 이도저도 하지 못하는 고통을 받는 것은, 내가 이 세상의 진실과 본질에 대해 탐구하고 그를 통해 의미를 부여하고자 하나 그것이 이해받지 못한다거나 노력해도 의미없다는 관념 속에 이중구속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나는 진실을 탐구하되 그 진실탐구 행위자체가 의미없다는 사실에 괴로워하는 악순환의 고리에 빠지고 말았다.
이 저주는 어쩌면 '그냥' 나에게 찾아온 것일지 모른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 그 사실을 인정하는 것, 끊임없이 원인을 찾아 헤매던 나를 멈춰 세우는 것.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첫 걸음임을 깨닫는다. 물론 가끔씩 울컥 올라오는 감정은 여전하지만, 그 감정이 현실을 바꾸지는 못한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 또한 나를 위한 일이다.
누군가를 사랑하거나 사랑받는 것, 그 관계 속에서 나는 어쩌면 추상 속을 헤매던 의미와 본질을 눈앞에서 마주할지도 모른다. 진실과 본질을 추구할 수밖에 없는 나의 이 '저주'가 훗날 다른 환경, 다른 관계 속에서 비로소 '축복'으로 발현될 날을 꿈꾼다. 과각성 상태를 조절하고, 세상을 향한 나의 질문이 고통이 아닌 탐구 그 자체로 남을 수 있도록.
이 복잡한 저주를 해제하는 일은, 어쩌면 이 글을 쓰는 과정처럼 지난할 것이다. 답은 명확해 보여도 그것을 삶으로 가져오는 것은 또 다른 싸움이니까. 나의 이 저주와 문제의식은 누군가의 공감을 받기 어려운 결일지도 모른다. 홀로 걷는 길은 외롭지만, 이렇게 태어나고 살아가는 이유 또한 그저 '그냥' 인 채로, 나는 이 저주를 조금씩 풀어나가는 여정을 계속할 것이다.
#202506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