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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llie 몰리 Feb 09. 2024

한국을 떠났는데 또 한국이다.

한인타운에 첫 집을 얻다

아이의 국제학교 입학시험과 인터뷰, 그리고 해외살이의 첫 집을 위해서 1박 2일간 중국을 처음으로 방문했다. 베이징 수도 공항에는 우리를 마중 나온 낯설지만, 한국말이 가능한 조선족 부동산 직원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준비해 놓은 차로 집을 구하러 가는 차에서 창문을 통해 바라본 중국의 첫인상은 우리나라의 60년대 모습일 거라는 우리의 예상과 다르게 쭉 뻗은 광활한 대로와 수도 없이 지나가는 외제차들과 언덕이 없는 평지인 점도 신기했다.


조선족 직원이 소개해준 집리스트가 적힌 파일을 보며, 월세 가격에 더 눈이 휘둥그래해지기도 했다. 주재원들이 많이 모여사는 한인 아파트의 아파트 월세 가격이 보통 40평 전후였고, 한 달 월세가 자그마치 460만 원이 훌쩍 넘었다. '와, 이 집주인들은 1년에 월세만 받아도 얼마야?'라며 서울 집값이 비싼 게 아니었다며 중국 출장시마다 놀랬던 남편의 말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중국의 아파트들은 내부는 다 주인의 취향대로 인테리어를 해서, 마루 바닥, 대리석 바닥, 벽지 혹은 페인트 벽 등 집 내부는 각양각색이었다. 또 대부분 가구와 가전을 기본 옵션으로 하고 있었고, 한국인들이 집을 깨끗이 쓴다는 이미지가 강해서 한국인 세입자를 좋아한다고 듣기도 했다.



이국적인 느낌을 좋아하던 나는 나만의 외국생활을 꿈꾸며 바로 옆 나라인 중국이지만, 뭔가 자유롭고 제대로 해외살이 하는 듯한 느낌을  원했지만, 현실은 한국말이 주변에서 들리고, 엘리베이터에서 조차 한국인을 만나고, 근처에 한국 학원이 있는 한국인들이 살기에 최적합한 동네를 추천받게 되었다. 하지만, 한국이 아닌, 회사 사람들의 가족과 학교엄마들과 근처에 살며 또 하나의 한국 커뮤니티를 형성하며 살아간다는 게 내향적인 나의 성격에는 불편할 수도 있을 거라는 직감적인 느낌이 있었다. 집투어를 할 때마다, '이곳은 누가 사셔. 또 저기는 누가 산다고 들었어.' 등 남편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뭔가 갑갑함이 밀려왔다. 그럼 내가 어느 선까지 알고 살아야 하는지, 나의 어디까지가 오픈이 되어야 하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차 타고 지나오다가 우연히 본 전원주택스러운 느낌의 동네를 보고 그곳을 문의했으나, 조선족 부동산은 주로 한인타운의 아파트 물건만 가지고 있었고, 본인이 가지고 있는 물건 위주로 추천을 하며, 그 동네는 한국 사람들이 살기 불편하다는 말만 연신 해댔다. 짧은 기간 동안 집을 구할 수 없었고, 결국 우리는 발령 후에 1달간의 호텔살이를 하며 집을 구하기로 결정하게 되었다.


화려한 난민 같은 호텔 생활을 하던 중 남편이 알아온 중국 부동산 어플을 통해서 주말에 우리 가족끼리 가고 싶던 곳의 부동산 투어를 했으나, 어이없게도 우리가 원했던 집의 사진들은 모두 '가짜'인 '허구의 집'임을 알고 실망한 채 결국 한인 타운의 어느 한 아파트에 첫 집을 구하게 되었다.


중국의 월세 계약은 보통 1년으로 이곳에서 우리 가족의 첫 중국 주재원 생활의 막이 열리게 되었다. 중국에 도착하고 나서 일주일 뒤부터 아들은 국제학교에 입학을 했고, 남편도 첫 주재원으로서의 업무를 시작하게 되고, 나는 혼자 있는 시간에 주변 마트 탐방을 하며 빈집 청소, 주변 탐방 등을 하며 하나둘씩 이 사회에 적응하게 되었다.


호텔에서 아이의 스쿨버스를 혼자 기다릴 때까지는 나와 아이만 버스 정류장에서 대기를 해서 한국이랑 별다른 차이를 느끼지 못했다. 단지, 엎어지면 코 닿을 곳의 초등학교를 다니다가 스쿨버스를 타야 한다는 게 신기할 뿐이었다. 하지만, 한인타운의 아파트로 이사를 하고 아이를 정류장에서 태울 때 만나게 된 여러 한국 엄마들과의 첫인사는 다소 부담스러운 상황들이었다. 신입생 가족을 향한 주목과 관심들, 어디에서 왔는지, 얼마나 머물 계획인지, 아이 학년과 영어는 어느 정도 하는지, 남편 직장은 어딘지, 집은 어딘지 등의 내 생각에 있어서는 사생활이라고 느껴지는 여러 질문들이 여러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까발려지는 느낌이 들었다. 초면부터 너무 오픈되는 나의 생활들이 부끄럽기도 하고, 나는 아직 잘 모르는 사람인데, 몇 번의 만남으로 발가벗겨지는 기분이 들었다.


비슷한 시기에 온 사람들은 이미 그 사람끼리 친해져 있기도 하고, 나와 비슷한 때에 왔어도 아파트의 동, 같이 다니는 중국어 학원, 남편의 회사 등으로 인해서 뭔가 친한 그룹들이 하나의 큰 퍼즐 조각들처럼 나뉜 것 같았다. 또 단지에 사는 사람들끼리 단톡방이 있다는 걸 알고 제발 나를 초대하지 않기를 하고 바랬지만, 너무 친절한 한 분에 의해서 자동 추가가 되었다. 한국에서는 가족 단톡방조차 갑갑해서 나가기를 반복하는 사람인데, 오자마자 단지 사람들의 단톡 추가와 거기서 또 개개인의 친구 추가 등으로 모르는 사람들을 한 번에 알아야 한다는 게 나한테는 다소 무리였다.


한인타운에 있어서 편했던 점은 우리의 이삿짐이 들어오기 전의 보름의 빈집살이에서 소소한 물품 등을 한국 이웃으로부터 감사하게 빌릴 수 있었고, 한인마트에서 위챗을 통해서 먹고 싶은 걸 주문하고, 분식, 돈가스, 설렁탕, 치킨, 한국 국과 반찬, 김치 등을 원하면 언제든지 주문 또는 식당에서 먹을 수 있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조금 불편하고 도전이 필요하더라도 한국과 다르게 살아보고 싶은 나만의 로망이 있었기에, 내가 원하던 해외살이는 아니었다는 점에서 첫 집을 계약했지만 틈틈이 마음은 콩밭에 가 있었다.


삶의 질적인 면에서는 가장 적응하기 편하고, 큰 노력 없이 살아갈 수 있는 한인타운에 들어왔지만, 내적인 삶은 점점 피로하고, 원치 않는 환경들이 생기면서 '풍요 속의 빈곤'과 같은 느낌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 자유로운 땅에 와서, 누구보다 나 자신을 타인에 의해서 드러내야 할 경우가 많았고, 내 색깔을 지우지 않기 위해 때로는 불편함을 속으로 참아야 했다.


그들이 하는 주된 대화에 나는 공감하지 못하거나   없는 부분들이 많지만, 투명 인간처럼 서있어야   그때가 가장 힘들었던  같다.


사진출처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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