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리장성에서 밤 새울 뻔한 날
연식이 된 중국 전기차의 애로사항은 차량에 남아있는 전기량이 주행 거리를 못 따라갈 때 발생한다. 주말에 전기차로 여행을 다니던 우리는 늘 어디를 가든지 주차장에 전기차의 충전기가 설치된 곳을 찾아서 주차를 했다. 그렇지 않으면 근처 어딘가에 어플의 맵을 검색 해서 조금이라도 전기 충전을 해야 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늘 전기차를 충전하는 곳조차 우리에게는 잠시의 나들이 타임이었다.
지루한 충전 시간을 즐기는 나름의 방법이었다. 늘 뜨거운 물과 컵라면, 과자나 초콜릿 등의 간식의 출발 전 준비는 물론이고, 돗자리와 캠핑용 의자는 늘 차량 뒤칸에 보관 중이었다. 전기차를 충전하며 아무도 없는 곳의 한편에 돗자리를 깔고 파란 하늘을 보는 낭만도 좋고, 길 가다가 갑자기 멋진 배경을 보면 멈추어 서서 배경을 풍경 삼아 먹는 컵라면도 일품이었다. 그래서 가끔은 충전하는 이 시간을 기다리기도 했다.
우리 가족에게 베이징에서 가장 좋았던 여행지를 꼽으라면 단연코 '만리장성'이다. 중국에 오기 전에는 만리장성이 하나인 줄 알았지만, 만리장성은 가장 유명한 팔달령장성(빠다링)부터 모전욕장성(무티엔위), 사마대장성(쓰마타이) 이외에도 우리 가족이 주말에 심심하면 즐겨 찾은 인적이 드물고 계단을 벗 삼아 등산하기 좋은 황화청장성, 수관장성과 거용관장성(쥐용관)이 있다. 주말에 갈 곳도 없고, 뭐 "콧바람 쐬러 어디 갈래?"라고 물으면 늘 "만리장성"이 제일 먼저 튀어나왔다.
그렇게 출발을 했고, 늘 그렇듯이 주차장의 한쪽에 설치된 전기 충전기에 충전용 차량 호스를 꽂고, 앱을 작동시켜서 잔액 확인 및 충전을 시켜놓고 라면까지 신나게 먹고, 만리장성 등반에 올라서 하루를 즐기고 왔다. 사계절마다 다른 만리장성의 자연이 주는 느낌도 다르지만, 장성마다 색깔이 다른 재미를 느껴보는 것도 기억에 남는 추억이 되었다.
만리장성에 올라서 더 이상 갈 수 없는 곳의 표지판 앞에서 시간마다 지나가는 기차와 경적 소리를 들으면서 반갑게 손을 흔들어보기도 하고, 여름에는 꼭 매점 같은 곳에 들러서 매그넘 아이스크림을 사 먹고, 겨울에는 우리가 챙겨간 보온병의 따뜻한 커피와 과자 봉지를 까서 만리장성의 담벼락에 올려놓으면 "끼악끼악"하고 울어대는 까마귀와 까치, 각종 새들이 잽싸게 날아와서 집어가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특히 다른 곳에 비해 이름이 많이 알려지지 않았는지 늘 사람이 별로 없기도 하고 케이블카도 없는 반면 계단 하나의 높이가 정말 높고 경사도 가파른 수관장성과 거용관장성은 겨울에 가는 매력이 있었다.
이날이었다. 수관장성에서 신나게 하루를 즐기고 먹고 남은 과자 봉지들을 챙겨서 폴대에 의지한 채 어둑어둑해지는 가파른 만리장성을 내려왔다.
"충전은 다 끝났겠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앱에서 확인을 하니 충전은 이미 100% 완료이다. 완료를 누르고, 남편이 차량에 꽂혀있는 차량 호스를 빼려는데 움직이지 않았다. 뭔가 걸린 것 같다고 하며, 다시 앱을 열어서 on / off 버튼을 찾아 작동시켜보기도 하고, 충전 기기의 터치 스크린을 눌러보기도 했다. 그런데도 호스는 꿈쩍을 않고 움직이지 않았다. 주변을 둘러봐도 사람은 우리뿐. 기기에 전화번호를 찾으려 해도 보이지 않았다.
추운 겨울, 어둑해지는 저녁 시간, 곧 있으면 정말 깜깜한 밤이 되려는 시각이고, 이곳 주변은 마트나 식당도 없어서 혹시 모를 식량도 걱정이었다. 우리가 점심으로 먹은 건 컵라면과 과자 몇 봉지와 당 떨어질까 봐 챙겨간 초콜릿과 커피뿐이었다. '어떡하지? 회사 지인에게 전화를 걸어서 도움을 청해야 하나?' 그런데 주말이라 그것도 민폐였다. 일단 어떻게든 손을 써봐야 했다.
주차장에서 나와 화장실 근처로 갔다. 혹시 길을 지나가다가 볼 일이 급한 사람들이 화장실을 들를 수도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누구라도 보이면 도와달라고 손짓발짓이라도 해보려는 심산이었다. 하지만, 그 썰렁하고 두꺼운 휘장막으로 막힌 화장실에는 개미 한 마리조차 얼씬거리지 않았다. 그날따라 청소하는 사람이나 경비원들조차 보이지 않았다. 너무 늦어버린 시간이라 그곳을 찾는 사람들이 이미 없어 보였다. 잘못하면 만리장성에서 하루 차박을 해야할 판이었다.
그때 저 쪽에 중국인으로 보이는 듯한 아저씨 무리가 1-2명 있었고, 멀리서 그 모습을 보자마자 다짜고짜 달리기 시작했다. "니하오! 칭방워, 워처츠어 부크능,,,(안녕하세요! 나 좀 도와주세요. 우리 차가,,, 안 돼요.)" 손으로는 양손으로 호스가 빠지지 않는 듯한 제스처를 취하며 손가락으로 저 멀리 있는 우리의 차량을 가리켰다. 중국인들은 나의 말을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그냥 온몸으로 사람들을 몰라서 차량이 있는 곳으로 데리고 갔다.
그때 상황 파악이 된 아저씨가 일행들에게 뭐라고 이야기를 하며, 함께 힘을 합쳐서 호스를 빼려고 안간힘을 쓰기 시작했다. 한 일행은 어디에 전화를 걸어서 지인을 더 데리고 오고, 또 어느 업체에 전화를 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들의 말이 들리는 건, 알아들을 수 없는 중국어와 "에이효, 아이야, 에이야,,," 등등의 탄식과 낑낑거리는 소리뿐이었다. 그렇게 남편과 힘을 합쳐서 차량의 앞바퀴가 통통거리고 위로 들릴 정도로 5-6명의 남자들이 잡고 흔들고, 기기를 작동시키고 하던 찰나에 갑자기 호스가 "탁"하고 빠지는 것이었다.
일제히 우리가 해냈다는 희열감과 서로 무안한 안도감의 웃음을 지었고, 우리는 머리가 땅에 닿도록 인사하고 손을 흔들며, "쎼쎼, 타이쎼쎄러" 등의 우리 수준에 최대의 중국어와 감정 표현을 하며 엄지 척을 날렸다. 정말 그들 아니었으면 우리는 점점 어두워지는 길가에서 추위와 배고픔에 떨며, 만리장성 입구 어디에선가 차량을 주차해 놓고 밤을 새웠을지도 모른다. 한국이 아니라서 좀 더 무섭기도 했고, 집과 거리가 있어서 밤새 무슨 일이 일어나지는 않을까 겁이 났다. 누구 하나 아플까 봐 마음 졸이기도 했다.
중국에 살면서, 중국인들은 개인적이라서 남의 일에 보통 관심이 없고, 내 갈길만 간다고 들었다. 남의 생각이나 배려대신 나의 기준으로 생각하는 경우도 종종 있지만, 또 이렇게 어려울 때 힘을 모아서 도움을 받을 때도 있고, 주차장이나 티켓팅을 할 때 웬만하면 경적을 울리지 않고 답답한 상황을 잘 참는 것을 보기도 했다. 우리에게 알려진 국민성도 있지만, 또 살다 보면 그들에게 언젠가 도움을 받고 고마운 마음을 표현할 때도 있는 게 해외 생활을 하며 넓어지는 견문과 더불어 따라오는 나와 다른 사람에 대한 이해와 포용 같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