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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llie 몰리 Jul 28. 2024

주재원의 알 수 없는 운명

의미 없는 n 년 발령 주재기간

주재원의 운명은 예측할 수 없다. 일반적으로 몇 년 주재기간을 예정으로 나오지만, 회사 상황이나 현지 상황에 따라서 바뀌는 경우가 많아서 매년 언제 들어갈지 모른다는 긴장감을 가지고 살아간다. 우리도 3+2년의 주재기간을 예정하고 떠나왔지만, 초기 3년이 보장되기는커녕 2년 차 때부터 갑작스러운 코로나와 또 회사 상황에 따라서 몇 번이나 "이번에 우리 갑자기 들어갈 수도 있으니 준비해." 이 이야기를 수도 없이 들어왔다.


그때마다 가장 나를 괴롭히고 선택의 기로에 놓게 했던 건 아이의 학교 문제였다. 갑자기 한국으로 귀국을 해야 할지도 몰랐기에 수시로 교육청에 전화를 걸어 귀국 편입학을 알아보고, 학교에 문의하여 티오를 물었다가, 다시 귀임 계획이 쏙 들어가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현지 일상에 복귀를 해야 한다. 늘 갑자기 떠날 준비를 가슴 한편에 두고 일상을 여행처럼 살아가는 모습이다.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하자 인테리어 잘된 빈집들이 엄청 나온다는 소식도 들리고, 지인들 중에 내가 제일 먼저 귀국하는 가족일 것 같았는데 느닷없이 중국 내 타지로 발령을 받거나, 한국으로 돌아가거나, 갑자기 다른 나라로 이동을 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심지어 이사를 하고 집들이 겸 새 집에서 밥을 먹다가 "우리 다음 달에 갑자기 타지 발령받았어요." 이사한 지 한 달 만에 타지 발령을 받는 청천벽력 같은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져서 갑자기 이별을 준비해야 하는 지인의 경우도 있었다. 이렇게 불확실하고 예측 불가능한 생활을 자주 하다 보니 늘 약간의 불안감을 깔고 일상을 살게 되는 일이 잦다. 매해 확정되지 않는 스케줄로 꾸역꾸역 하루를 살아가는 날들이 많다.


어른들이야 취업과 거주의 문제만 해결되면 지장이 없는 일상으로 언제든 돌아갈 수 있지만, 교육 과정과 환경에 180도로 바뀌는 아이의 경우는 다르다. 준비되지 않은 한국 학교의 적응 문제는 나보다 직접 부딪쳐야 하는 아이의 입장에서는 가장 큰 걱정이 아닐 수가 없다. 코로나로 인해서 발이 묶이게 되면서 3+2년, 총 5년의 주재원이 최대였던 우리는 1년을 또 연장하게 되어서 6년의 주재원 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번에는 계획 변동이 없을 거란 예상으로 6개월 전부터 본격적인 귀국 준비에 돌입했다. 집, 학교, 이사 등 생각해야 할 것들과 풀어야 할 난제들이 수도 없이 쏟아졌고, 해결해 가는 과정에서 꽤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다. 그래도 이것만 지나면 끝이니 오래된 불안한 생활에서의 나의 감정들은 어느 정도 단단해졌다.



그렇지만, 예측 불허의 순간들이 계속되고 우리의 운명을 알 수 없는 상황들이 지속되자 나와 남편의 스트레스도 꽤 커져갔다. 한국에서도 가족들이나 지인들이 종종 묻는 게, "언제 들어와? 다음에 어디로 가? 집은 어디에서 살 거야? 아이 학교는?" 이런 질문들이 릴레이처럼 이어지면, 확실히 대답을 할 수 없는 상황인 데다 반복되는 답을 하는 게 마치 회피를 하는 모습처럼 보이기도 했고, 우리조차도 모르는 상황들을 대답해야 하는 되풀이되는 상황들이 점점 불편해질 때가 많았다.


자금 계획, 아이의 학업 계획, 거주 계획 또 우리의 미래나 은퇴를 걱정하면서도 그냥 회사의 부름이나 결정에 따라야만 했기에 그런 보이지 않는 점들이 스트레스로 작용하기도 했고, 평상시에도 장난은 쳐도 별 싸움이 없는 우리 부부지만, 이런 일들로 대화를 하다 보면 서로 날이 서있는 상황에 예민해지기도 했다.


이번에도 역시 귀국 준비를 하며, 나름 아이의 학업을 돕고자 학교를 알아보았고, 그 사이 새로 생긴 생소한 '계약갱신 청구권'의 문제와 기타 사사로운 문제들로 인해서 부동산과도 힘들었고, 귀국 이사와 아이의 학업을 마치기 위해 몇 개월은 아이와 함께 남아있기 위한 단기 이사 등 올해의 시작과 동시에 몇 개월동안은 코로나 시절은 저리 가라 할 정도로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상황이 계속되었다.


귀국을 코 앞에 둔 시점에 갑자기 남편이 물었다.

"너희 여기 중국에서 더 지내는 거 어때?"

"갑자기 그게 또 무슨 말이야? 지금 다 들어갈 준비 하는데."

"아니, 또 그런 말이 나와서, 물어보더라고. 중국 타지에서 몇 년 더 있으면 어떠냐고."


정말 내 귀를 의심했다. 남편은 귀임계획서를 이미 몇 개월 전에 제출하고, 귀국을 몇 주 앞두고 또 타지 발령을 제안받아서, 우리만 오케이를 하면 또 몇 년 중국 주재원 생활을 계속할 수 있는 분위기였다. 도시는 베이징보다 좋았고, 아이도 국제학교를 졸업할 수 있는 꿀 같은 기회기도 했지만, 우리는 중국이라는 나라에서의 삶에 좀 지쳐있었다. 이미 여행도 안 다닌 지 오래고, 우리에게는 무료한 베이징을 포함해서 아이가 중국에서 10년을 지내는 것도 그다지 메리트가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또 새로 주재원을 발령받아서 가는 곳은 초기 사업 단계라서 집에 들어오지 못하는 날이 있다고 들었고, 지금도 바쁘고 한국에서보다 과한 업무량과 책임감에 성장하기도 했지만, 많이 늙기도 했다. 그런데 이보다 더한 곳, 그리고 그곳이 또 중국이라는 점에서 남편도 마음이 반반이었지만, 우리 같은 직장인의 입장에서 아이를 국제학교에 지원받고 보낼 수 있는 장점에 남편도 생각을 해보자고 이야기했다. 우리는 고민 끝에 중국 생활은 이 정도면 오래 했다고, 이쯤에서 접기로 결정을 했고, 이면에는 우리에게는 또 다른 계획이 있기도 했다. 무모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아직은 젊기에 도전하고 싶기도 했던.


해외에서 이방인으로 사는 잔잔한 불안감과 동시에, 우리가 우리의 미래와 시기를 예측할 수 없는 불투명한 계획과 늘 무산되기 일쑤인 답 없는 생활은 주재원 가족으로 사는 동안 바닥 저 언저리에 늘 도사리고 있었던 것 같다.


주재원의 운명은 정말 손바닥 뒤집기다.


대문사진 출처 :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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