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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 속에서 피어난 꽃 (제18 화)

(소설) 책임

by 황윤주

제18 화


이른 아침부터 들리는 헛구역질 소리에 희경의 가족들은 촉각을 세웠다.

무슨 일인가 싶어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소리 나는 쪽으로 모두 다가갔다.

어머니 얼굴이 핼쑥해졌다.

식구들을 바라보는 눈에 왠지 모르게 부끄러움이 가득 차 있었다.

쑥스러웠지만 어렵사리 가족들에게 임신 사실을 털어놓았다.

가족들은 매우 당혹스러웠다.

사십이 넘었는데 임신을 했다니 참으로 놀라웠다.

가장 놀란 사람은 희숙이었다.

늦둥이 동생이 생긴다는 사실에 커다란 눈이 더 커지고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보통 이런 경우에 축하를 해주어야 하는데 축하한다는 말 보다 놀람의 감탄사가 먼저 나왔다.

희경도 놀란 건 마찬가지다.

사십이 넘은 나이에도 임신이 가능한 것이 신기하고 놀라웠다.


희경어머니는 속이 후련했다.

체증이 쑥 내려간 것 같았다.

벙어리 냉가슴 앓듯 끙끙거리던 것을 털어내고 나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옆에 서 있던 희경아버지 또한 당혹스러웠다.

자식들 보기가 민망하고, 쑥스럽고, 부끄러웠다.

늦둥이 아버지가 된다니 어깨가 더 무거워짐을 느꼈다.

책임져야 할 가족이 도 한 명 늘어나는 것이다.

그렇지만 기분은 좋았다.

겉으로 드러내지는 못했지만 속으론 싱글벙글하였다.

놀람 속에 즐겁고 기쁜 웃음소리가 이른 아침 온 방에 가득 울려 퍼졌다.


나는 커다란 물 항아리에 매일 물을 길어다 채워야 했다.

딱히 누가 시킨 것도 아니다.

그냥 내가 해야 할 것 같아 하다 보니 자연스레 내 몫이 되었다.

평소에도 조금 힘들었지만 오늘따라 유난히 물지게가 무겁게 느껴졌다.

어깨를 짓누르는 것 같았다.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뗄 때마다 물이 출렁거렸다.

머리카락이 쭈뼛거리고 촉각이 곤두섰다.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나는 양동이를 잠시 내려놓고 정신을 가다듬었다.

허리와 등도 잠시 폈다.

그리고 이내 물지게 지고 가는데 집중을 했다.

그렇게 몇 번을 비탈길을 오가며 항아리 가득 물을 채워놓았다.

옷소매로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가득 채워진 물을 보니 뿌듯하였다.

"후우~~~ "하고 내뱉는 소리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말해주고 있었다.


식구가 많다 보니 물을 쓰는 양도 많았다.

나는 그렇게 힘이 들어도 누굴 원망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 보고 하라고 하지도 않았다.

그냥 학교에서 돌아오면 의례이 하는 일쯤으로 여겼다.


나는 숙제나 공부는 언제나 밤에 하였다.

조용한 밤에 하다가 조금 부족한 것은 새벽에 일어나서 하였다.

새벽 4시면 어김없이 눈을 떴다.

모두가 잠들어 있는 시간이면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집중할 수가 있기 때문이었다.

성격이 내성적이라 학교에서 친구들을 많이 사귀지는 못하였지만 그래도 대여섯 명은 사귀었다.

친구들과 함께 얘기도 하고 밥도 같이 먹을 만큼 친해졌다.


환경미화 심사 때가 되면 수업을 마치고 친구들과 함께 교실 뒤 벽면을 꾸미기도 하였다.

서로 아이디어를 내어가며 빈 공간을 채우면서 서로 우정도 쌓아갔다.

학업 성적도 노력을 해서인지 그리 나쁘지 않았다.

꿈도 점점 많아졌다.



희경은 조용하면서도 차분하게 학교 생활을 이어갔다.

여학교라 그런지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까르르~~~ 깔깔~~

창문밖 운동장에 늘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늦가을이다.

날씨가 제법 쌀쌀해졌다.

거리마다 곱게 물든 단풍잎, 은행잎들이 떨어져 바람에 흩날렸다.

발길 닿는 곳곳마다 낙엽이 쌓여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힌다.

희경은 빨갛게 물든 단풍잎과 노랗게 물든 은행잎을 주워서 살며시 책갈피에 끼워 넣는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예쁘게 카드를 만들어 친구들에게 보낼 생각이다.


저 멀리 눈에 익숙한 모습의 남자가 희숙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희숙은 활짝 웃음을 지어 보인다.

남편남규가 군복무를 다 마치고 집으로 오는 것이다.

군복무 하는 동안 면회 한 번 못 가봤었다.

희숙은 아들 민혁이를 안고 남규를 향해 걸어갔다.

남규도 걸음이 점점 빨라지더니 달리기 시작한다.

얼마만의 가족 상봉인가?

세 사람은 얼싸안았다.

눈물이 핑 돌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목이 메어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기쁨의 눈물만 흘렸다.

삼 년이란 긴 세월 동안 서로에 대한 애틋한 마음만 가지고 그리워하면서 지내왔다.

희숙은 초등학교 1학년을 다니다 말았기 때문에 글도 온전히 깨우치지 못하였다.

그래서 남편에게 편지 보낼 생각을 못하였다.

오직 남편에게서 보내온 편지만 읽고 마음을 달랬을 뿐이었다.


남규가 제대함으로써 희경의 가족이 모두 모였다.

남규는 이제부터 가장으로서 책임을 다 해야겠다고 다짐을 했다.

이제껏 못다 한 사랑을 하면서 아들을 사랑으로 잘 키워보리라 마음먹었다.


희경어머니, 희숙, 희경까지 남규를 위해서 정성껏 음식을 만들었다.

지지고, 볶고, 끓이고... 있는 반찬 없는 반찬 다 꺼내어 상을 차렸다.

마치 잔칫상을 차린 듯하였다.

남규는 해맑게 웃는 민혁을 안고 좋아서 어쩔 줄 몰라했다.

웃음소리, 얘기소리, 숟가락 젓가락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거리의 가로등이 하나 둘 켜져 갔다.

하늘은 어느새 반짝이는 별들로 가득했다.

초승달도 떠올랐다.

집집마다 창문에 드리워진 불빛들로 쓸쓸한 거리를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밤에 조금씩 내리던 눈이 새벽이 되자 어느새 함박눈이 되어 온 세상을 하얗게 만들었다.

지붕 위에도,

장독대에도 소복이 쌓이고 온 마을이 하얀 눈으로 모두 덮였다.

희경은 아무도 걷지 않은 새하얀 눈길을 걷기 시작했다.

한 발 한 발 발을 뗄 때마다 뽀드득뽀드득 소리가 마음에 속삭였다.

'맘껏 달려 봐'라고



나는 함박눈이 내리는 새벽에 하얀 눈밭을 마음껏 달렸다.

볼에 와닿는 눈이 시원했다.

하얗게 내리는 눈꽃을 맞으며 한참을 달리고 달렸다.

지나온 발자국이 그림을 그려놓았다.

어디서 왔는지 귀여운 복슬강아지 한 마리가 좋아서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나뒹굴었다.

하얀 도화지 위에 강아지 발자국 그림이 그려져 가고 있었다.

나는 양팔 벌려 흰 눈을 가슴에 가득 받아 안았다.

심호흡도 크게 하였다.

새벽 공기의 신선함이 가슴 가득 퍼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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