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살 후반에 들어설 즘일입니다. 그림에 방향성이 희미해져 갈 무렵이었죠. 그룹전에서 100호 사이즈 전시가 있었어요. 대학원을 마치고 살아가는 것에 중심을 두고 그림과 현실의 가운데에서 두리번거리고 있었죠. 작품에 대한 열정보다 그리기가 숙제로 다가오는 시기였습니다. 그런 와중이었습니다. 그림 역시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그렸습니다. 숙제처럼 혹은 혹은 더 급한 것을 하고 나서야 그림을 그렸습니다. 상상도 하지 못했던 시절은 결국 그림에 대한 열정도 정체성도 멈추게 하였습니다. 어느 교수님께서 해주신 말씀입니다. "너 구림 바뀌었더라. 그냥 쓱 지나가면서 봐도 되는 그림으로 바뀌었더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적지 않은 충격이었겠지요. 제가 어떤 답을 했는지 기억 해내지 않았습니다. 적절한 답변이라 하여도 자존심을 살리겠다는 대답 따위는 중요치 않기 때문입니다. 마음속에 이미 그분의 말씀을 인정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어떤 말로 칭찬을 한들 작품이 위대해지지 않습니다. 작품 앞에 당당함은 작가가 잡은 칼자루에 있습니다. 감정이 상하고 안 상하고 보다, 제 그림에게 부끄러움이 더 컸습니다.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흔들렸기 때문입니다.
그 후 저는 본격적으로 그리기에 대한 자신감이 약해졌습니다. 당당하지 못하다고 그리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제 스스로 무엇을 원하지는 모르기 때문이죠. 내가 즐기는 것, 내가 하고 싶은 것에 집중하지 못했기 때문이에요. 내 마음을 들여다보기 보다 타인이 나를, 내 그림을 어떻게 볼까? 하는 마음에 타인의 기준에 어울리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그리곤 내가 그리는 것이 전부 나의 사유라고 착각을 일으킵니다. 나에 대한 정체를 잃어 간다는 것은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것과 같습니다. 작가가 정체성을 잃는다는 것은 말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모르거나 표현하고 싶은 것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물론 그 시절에는 제가 왜 그림으로 행복하지 못하는지, 자신감이 떨어지는지 또한 알지 못했습니다. 그리기가 어색하고 자꾸만 내 마음을 과장하고 장식하려 하였습니다. 그렇게 가식적인 그림을 그리려 한다는 것은, 누군지 알 수 없는 자아와 대화하는 것이죠. 점점점 세상 밖으로 눈을 돌립니다. 내 모습이 아닌 타인의 옷을 걸쳐보고 멋있는 것을 취하려 합니다. 나의 존재와 색깔은 서서히 사라집니다. 누군가의 옷을 걸치거나 계속해서 옷을 갈아입습니다. 시간이 지나 자신감은 사라져 가고 자존심만 남겨집니다. 저는 이것을 슬럼프라 말합니다. 슬럼프를 흔히 자신의 기량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시기라고 말하지만, 비교적 슬럼프의 이유는 다양합니다. 다양한 만큼 슬럼프의 원인을 정확히 알면 슬럼프를 반드시 이겨낼 수 있습니다. 저는 슬럼프의 시작과 함께 결혼과 육아로 그림과 단절된 시간이 매우 길었습니다. 긴 시간만큼 슬럼프를 이해하고 이겨내는 기간도 적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슬럼프에 기로에 있다면 비관적으로 생각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자신에 대해 깊이 들여다보시길 바랍니다. 또한 크게 성장할 수 있는 기회이니 슬럼프를 성장의 도구로 삼아 보셔도 좋습니다. 우선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적어 보십시오. 자신의 성격에 대해서도 질문해 보시고 뭐든 솔직하게 적어 보세요. 내 취향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나열해 보세요. 자유분방함에도 누군가의 시선을 의식해서 자신의 성향과는 맞는 않는 기법을 고집하고 있지는 않으신가요? 그리고 평소 자신과 같은 관점 스타일의 작가들에 대한 정보도 충분히 탐색해 봅니다. 그분들의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화했던 경로도 놓치지 마세요. 과거에 작품들과 기록을 꼼꼼히 되 집어 보세요. 언젠가 그렸던 그림을 보고 깜짝 놀라시지 않으셨나요? 놀라 셨다면 왜 놀라셨는지 염두에 두세요. 그리고 과거 주로 그렸던 방법과 자신의 성향을 기억해 둡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자신이 어떻게 그렸는지, 어떤 방향성을 추구하는지까지 송두리째 잃어버리는 경우가 있으니, 과거 자신의 작품들을 회상해 보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여기까지 자신이 알고 있던 기록들에 대해 기억했다면 오늘 내가 관심을 갖은 일상들을 기록하세요. 표현이 생각을 따라가지 못하는 경우, 생각에 맞는 표현기법들은 시간을 내어서 연구가 필요합니다. 의도에 어울리는 기법들은 궁합이 따로 있습니다. 의식의 변화를 소홀히 생각하지 마세요. 의식이 변하면, 표현 기법도 달라집니다. 과거를 반추했다면 오늘 그리기에 집중하세요. 에스키스, 스케치, 드로잉처럼 간단하면서 의식을 살릴 수 있는 작업을 짧은 시간 자주 하세요. 매일 그리기 전 30분 생각을 모으고 의식을 찾는 행위를 잊지 마세요. 매일 드로잉 30분은 슬럼프에서 이기는 비법이면서, 슬럼프에 빠지지 않게 하는 비법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표현하고 싶은 메시지를 글로 표현하세요. 자신도 모르게 그리고 말하는 의식들이 그리고자 하는 방향성을 제시해 준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슬럼프를 이겨낸 후의 성장이 그 어느 때 성장보다 크게 성장할 수 있는 지름길이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