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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엄마작가 선영 Jan 07. 2020

소중한 나에게 집중한다는 것

나를 찾아가는 물음

                              

무엇이든 그리고 싶은 욕구가 길을 잃고 있었습니다.


무엇이든 표현하고자 하는 욕구 말입니다.


언젠가부터 그리고 싶고, 보여주고 싶은 이야기만 표현하려는 습관이 생겨 버렸습니다.


한편으로는 그런 모습이 대가들의 위치에서 느껴져, 나도 모르게 그래야 한다고 몸으로 인식한 것은 아닌지 의심도 해 봅니다. 제 마음보다 더 크고 멋진 마음에 늘 관심이 있어서 이겠지요. 매우 걱정스러운 습관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그 마음을 바라만 보고 달려도 괜찮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도 상관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한 가지만 잘하면 충분한 줄 알았습니다. 내 마음이 거짓을 보고 달려간다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작가의 의도라고 포장을 하면 모든 것이 아무렇지 않게 이해가 되곤 했습니다.



거짓을 꾸미지는 않아습니만 그것이 거짓이 돼버릴 줄은 예측하지 못했습니다.



조금 이상한 불편함은 가시지 않았습니다. 왠지 마음이 꽉 찬 제 것이라는 당당함 보다, 늘 허전함이 저를 따러 다녔죠. 그 기억이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남들과는 다른 매우 개인적인 문제입니다.


저는 그 불편함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왜 나는 무엇이든 표현하고 싶은 욕구도 자신감도 점점 약해졌는지 이제야 답을 할 수 있는 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왜 나에게는 무엇이든 그리고 싶은 용기와 세상 모든 것을 자유롭게 표현해보고자 함이 결여되었는가?



대학원, 학부, 고등학교, 중학교 시절에 바라본 것을 온전히 혼자만의 세계로 표현해 보았는가에 대해 마음이 흘렀습니다. 지난 과거를 들춰보면 제 모습은 매일 반복되는 석고와 정물과 풍경을 그리는 모습입니다. 그 안에는 어떻게 하면 좀 더 아카데믹하고 완성도 있는 물체를 그려야 하는가에 대한 목표 중심적 성취가 함께 하였습니다. 저는 학창시절 매우 온순하고 고분고분한 학생이었습니다. 시키는 것을 잘 수행하고 어떻게 하면 인정을 받거나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는지에 대한 만족도 배제하지 않았습니다. 나에 대한 존재에 충실함보다 학생으로서의 위치에서 더 충실했던 시간이었습니다. 그림을 그리는 10대에 만들어지는 감수성은 그렇게 ‘잘 그리는 그림'을 그리기에 몰입하였습니다.



대학 진학 후폭풍처럼 밀려오는 문화적인 변화를 취합할 시간보다 여전히 새로운 재료와 기술을 익히는데 몰입하게 됩니다. 그 안에서 저의 복잡한 감정만을 쏟아내는 그림을 그리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오로지 나의 감정 밖에는 보이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 시절 내 감정 보다 중요한 것은 없었으니까요. 오로지 내가 생각하는 감정에 매달려 순간 순간 맞닿는 우연한 이름모를 감정에 집착했던 시간들을 쫓아가 봅니다.



그 안에서 그림이 타인을 위해 해야 하는 역할에 대해 묻는 이도, 생각할 기회도 허락되지 못했습니다. 나라는 존재에 도취되어 누구든 내 그림을 감동하게 될 것이라고 자만 아닌 자만을 했었는지 모릅니다. 그림이라는 온갖 우월함을 내 마음에 철썩철썩 바르고는 마치 내 모습인 양 착각을 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대학원에 진학 후에는 그런 내 마음이 자꾸 저를 피하려 했습니다. 세상 밖으로 허공으로 우주로 떠돌아다닙니다. 내 옆에 작은 사랑과 커피향 따위는 거들떠보지 않습니다. 제 마음에 우주에 빛을 쫓기 위해 몹시도 바빴기 때문입니다. 우주에 빛이라니 얼마나 근사합니까? 그때는 우주의 빛 정도는 돼야지 그림이 아름답고 훌륭한 것이라고 생각했나 봅니다. 그럼에도 아무도 누구도 절 나무라지도 지적하지도 않았습니다. 아마도 그림이라는 특수성 때문인 것 같습니다. 무엇이 되었든 타인의 감정을 표현하는 예술을 지적할 스승님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저 역시 마음을 표현하는 큰 열정을 나무랄 권리는 없다고 생각했을 터입니다. 다만 그 시작이 어디에서 왔고 어느 곳을 가고 있는지는 물어주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가면 네 그림이 어떤 역할을 했으면 좋겠냐고 그 역할이 너에게 적절한 요인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물어 주겠습니다. 안타깝게도 지난 20년 동안 아무도 제게 그런 질문을 해 주는 스승님은 없었습니다.



스스로에게 물었던 모든 질문들이 결국 나를 알아가기 위한 하나의 길이었다는 것을 오늘에야 알 아가기 시작했습니다. 내 그림이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데 꼬박 25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나 봅니다.


'너의 그림이 어느 곳에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니?'


그 질문을 곰곰이 생각해 보니


'너는 어떤 사람이고 어떤 일을 할 수 있니?'라는 말과 같았습니다. 제가 누구이고 어떤 역할을 할 수 있고, 사회의 어느 곳에 필요한 사람인지를 스스로에게 묻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가고 싶은 곳이 아니라 나를 필요로 하는 곳 말입니다. 이제야 제가 저에게 깊이 관심을 갖고 애정을 들이니 저에게 참된 관심을 갖기 시작합니다.



조심스레 누군가에게 당신의 모습을 들여다보세요.라고 전합니다.


온전히 당신에게 집중하세요.


그리곤 당신의 모습을 표현해 보세요.라고 말합니다. 당신이 원하는 것보다 오늘 내가 고민하고 좋아하는 것들에 사랑을 전하세요. 당신을 필요로 하는 곳에서 당신이 원하는 역할이 무엇인지 질문해 보세요. 이런 저는 과연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 사람인가요?라고 되 집어 질문합니다.


이제 저는 제가 어느 자리에서 빛을 쫓는 것이 아닌 빛을 밝게 비춰야 할지 생각을 모음니다. 저는 그렇게 저를 찾기 위해 제게 질문을 했습니다. 네가 누구냐고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매일 같이 질문했습니다.



이제야 제가 그림을 그리고 자함에 있어 어떤 역할을 해야 할지 서서히 저만의 우주를 만들어 가기 시작합니다. 작가가 세상 어느 것이든 표현해보고 싶은 욕구가 없다는 것은, 자신에게 품은 빛을 비추지 못하고 타인의 큰 빛을 쫓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만 바라보고 빛을 쫓는 것은 세상 많은 것들에 사랑 나누기를 가려줍니다. 생각을 깊이 감상하려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보고 싶은 것, 감상하고 싶은 것만 감상하려 했던 결과는 많은 것을 포용하지 못하고 마음의 문을 한쪽 방향만을 열어 놓은 것입니다.



새로운 세상을 늘 관심을 가져 보세요.


새로운 세상을 그려보세요.


세상 모든 것을 그려 본다는 것은 세상 모든 것을 사랑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림을 그리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세상 모두에게 관심을 갖고 사랑을 나누고 사랑을 전하는 것입니다. 제게 그림이란 누군가 쉬어 갈수 있도록 마음을 내어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디 제 그림이 낯설고 차가운 세상에 따뜻한 온기가 되어 사람들에 가슴을 포근히 감싸 주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자신에 감정에 충실한 도서관에서 처음만난 다혜! 감히♡ 용감하게 다가와 나의 드로잉 북에 공동 작업을 ^^






할머니 할아버지와 산다는 다혜가 저 맑고 사랑스런 마음을 잃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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