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래도 정해진 길은 없는 것 같다

운명과 인생에 관한 최근의 단상들

운명은 없다(NO FATE)

우리가 정한 것 외에는

어릴 적 터미네이터 2에서 사라 코너가 몸에 휴대하던 칼로 탁자에 새기던 말이다.

그녀는 당시 지상군을 다시 일으켜 미래에서 온 터미네이터와 끝장을 보려던 여전사였다.

그런데 정말 인생에 정해진 길이 있을까?


내 것인지 알아보는 법

작년 12월 말부터 2월의 끝이 얼마 남지 않은 지금까지,

하나의 맥락에 대해서 정리하려고 노트북을 열었다.


이번엔 두 번의 기회가 있었다.

한 곳은 내노라는 자리이지만 버겨운 곳이었고, 나머지는 부산이어서 주에 며칠은 지방근무가 필요했다.

사실 둘 다 썩 내키지는 않았다.


내노라는 자리는, 커리어 상으로는 굉장히 일치해서 지도 교수님은 "여기가 바로 너의 자리네!" 해주셨지만, 부담감 때문일까. 느긋한 삶을 꿈꾸는 나로선, 능력이 부족한 나로선 매일 뛰어야 할 것만 같다.

국내 머리좋다는 학부생들이 모인 그곳에서는 영어로 수업을 해야했다. 외국에서 대학을 나오지 않은 나로서는 "지금? 굳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신입사원 시절 매주 다국적 임원회의를 들어가서 회의록을 작성하고 코디했던 적이 있지만, 그때도 썩 유쾌하지 않았다.

한편 부산의 대학 또한, 주말 부부를 해본 나로서는 뭐랄까 주 2-3일 KTX를 타고 남의 지역을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상상이 되지 않았다. 제 아무리 여행을 좋아한다지만, 매주 하기에는 생각만 해도 지친다.


그래도 헷갈렸다. 기독인으로서 믿음을 갖고 인생을 사는 나는, 어떤 일이나 기회를 일부러 찾거나 무리해서 시행하는 것을 즐기지 않는 면이 있다. 그래도 주어진 기회이니 안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결국

"그래 일단 신이 나를 그곳에 보낼지 안 보낼지 알아볼 수 있는 기회이니, 시도는 해보자." 하며 진행하게 됐다.

(사실 지도 교수님이 추천해준 자리라 안 할 수도 없는 노릇였는데도, 되면 마음이 힘들거나 몸이 힘들 옵션이라서 고민이 됐던 것 같다. 마치 그런 거다. "내 운명이 이런 거면, 고생해야 해? 간판 좋아서 뭐하냐. 그냥 숲 속의 코알라가 되리라.")

다행히 둘다로부터 연락이 오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연락이 오지 않자 내심 기쁘기까지 했다.

"아니, 하기 싫으면 안 하면 되지 무슨 이상한 소리야?".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나도 이렇게 스스로를 관찰자 시점으로 바라보면서 마음과 다른 행동을 할 때, 이게 뭔가 싶기도 하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마음을 비우고 침착하게 감정과 무관하게 "이 것은 내 길인가?"하고 두들겨 본 것이다. 경험한 소견으로는 일반 기업에 지원하는 것과 연구직이나 교수 지원에 드는 에너지 소모는 달랐다. 특히 가방끈이 긴 박사가 지원해야 하는 연구소나 대학의 지원은, 일단은 제출해야 할 학력 증빙만 해도 졸업증명, 성적증명 X 3= 총 6장이다. 즉 마음을 열고 해야 하는데 이런 시도들이 결코 마음을 따로 두고 지원서를 낼만한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진짜 원하는 것은 무엇이 되느냐 아닌 삶의 모습

육체이탈 방식의 시도로 한 가지 깨달은 점은,

전제가 잘못됐다는 것이다.


운명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세상에는 내가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에 내 길이 아니어버린 길이 생각보다 많다. 노력을 했든 능력이 부족했든 어쨌거나 가보지 않았단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물론 타이밍이라는 것은 분명히 있다. 당연하지 않겠어? 세상에 이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의지대로 살아가면서(누군가는 항상 어쩔 수 없이 했다. 한다고들 하지만) 마주치거나 한 곳에 있거나 할 확률이 크지는 않을 테니까. 또 반대로 내가 하는 일이 얼마나 특성화되고 카테고리화 되느냐에 따라서 사실은 그냥 숙명처럼 만나게 되는 사람과 기회가 있기도 하다.


그래서, 가급적 종합 점수를 봐야 할 것 같다.

감정과 이성적 필요룰 모두 고려한.

그때면 그때

지금이면 지금

가장 원하는 게 뭔지를 생각해야겠다.

결국 그냥 내가 하는 것을 하게 돼 있다.

때로는 열정 넘치는 논문을 써대고 싶다가도

주에 며칠은 도시를 떠나 자연인이고 싶거나

지금은 그저 친구와 호수를 바라보며 차나 마시고 싶다.

(나이탓을 하기엔 아직 젊다. 취향이 사실은 한량이었나보다)


keyword
이전 25화나를 나답게 만드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