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국제정원박람회 2
# 걷기 적당한 곳
새벽 5시가 좀 지났는데 그 시간 바깥은 환했다. 아침이라 선선한 바람이 불었다. 그날은 주일이어서 6시 새벽미사를 드리러 갔다. 미사를 마치고 성당에서 나오자마자 '어디 걸을만한 곳' 없을까,라고 했고 국제정원박람회가 열리는 보라매공원에 다시 가보는 것도 좋겠다 싶어 버스를 탔다. 20분 만에 공원에 도착했다.
'차 없고 사람 적고 꽃과 나무가 모여사는 곳'이라면 걷기에 적당한 것 같다. 그날은 미사로 얻은 좋은 기운과 아침의 상쾌함을 연장시키고 싶은 마음이 컸던 것 같다. 성당에서 공원으로 이어지는 긴 시간, 행복했다.
# 장마꽃
장마지려면 능소화가 핀다더니 구불구불한 몸으로 뒤틀면서 꽃을 피우려나. 이미 핀 것도 있는데 다 피면 능소화 터널은 환상적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날이 습하고 꿉꿉해서 살림살이에 신경 쓸 일이 많아져 귀찮고 불쾌지수가 올라갈 때 장마꽃을 떠올리면 좀 나으려나. 장마꽃을 떠올리면서 별 탈없이 장마가 지나가기를 기다려야겠다. 장마를 지나야 뙤약볕이 내리쬘 것이고 그래야 오곡백과가 무르익을 것이다. 순서대로, 자연스럽게, 조금씩 달라지는 자연의 이치처럼 나도 그렇게 성장하고 무르익어가고 싶다.
# 내 사랑 느티나무
오래 살아있는 느티나무 아래에 서면 반대편에서 해가 뜬다. 언제가 추운 겨울 이곳에 왔을 때 태양경배를 하는 사람을 본 적이 있다. 품으로 달려드는 아이를 맞이하는 엄마처럼, 탕자를 끌어안는 예수님처럼, 태양의 에너지를 품고 끌어안으려는 듯 두 팔 벌린 모습이 기억에 남아있다. 이 나무는 헐벗은 겨울날에 더욱 빛이 나는데 고고한 구도자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보라매공원에 올 때마다 눈도장을 찍고 손바닥으로 어루만지는 내 사랑, 느티나무다.
느티나무 곁에 나를 위해 마련한 것처럼 썬베드가 놓여있었다. 정원박람회 때문에 꾸며진 공간이지만 마치 해변에 혼자 와있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마침 아무도 없다! 나는 거의 눕다시피 해서 물 멍, 숲 멍하고... 오래 머물렀다.
# 가장 마음에 들었던 작품 [Nesting]
# Seoul Piano를 치는 할머니
할머니 한 분이 오른손가락으로 건반을 누르고 계셨다. 처음에는 무슨 곡인지 모르겠었는데 귀 기울여 들어보니 제목이 가물가물했지만 뽕짝이 분명했다. 건반에서 음을 찾아가며 손가락번호와는 전혀 무관하게 연주를 하다니. 슬그머니 다가가 말을 걸었더니 할아버지가 운동하는 동안 나는 피아노 치고 끝나면 같이 집에 간다면서 하모니카는 어찌어찌해서 불 수 있고 피아노도 띵가띵가 하는 거라고 했다. 악보 없이 소리만 듣고 건반을 찾아가면 두드리는 게 예사롭지 않았는데 할머니는 무심하게 말씀하셨다. 나는 할머니한테 양손 엄지 척을 해드리면서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될 우연을 기대하고 있었다.
# 자연카페
푸드트럭도 보라매청소년수련관 카페도 열리지 않는 이른 아침에는 편의점이 최고다. 구운 달걀 2개와 250ML 우유가 아침이다. 여러 사람과 같이 올 때는 간단한 먹거리나 도시락을 싸와서 펼쳐놓으면 그럴듯한 한 상이 차려질 테지만 혼자면 이 정도로도 충분하다.
# 담아주고 담기는 관계
휴일 아침이라 그런지 사람이 많지 않아서 여유 있게 돌아볼 수 있었다. 이렇게 걸을만한 곳이 가까이 있다는 게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다. 언제라도 OK, 혼자여도 OK, 나에게 이렇게 OK 사인을 보내주는 것은 보라매공원만이 아니라 자연일 것이다. 자연이 나를 담아주고 나는 거기에 담길 수 있어서 든든하다. 힘이 난다. 이것이 휴일아침 단잠에 빠져있는 내 남자는 모르는 나만의 비밀스러운 외출이다. 내가 말하지 않으면 전혀 눈치채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른 아침 혼자 걷는 즐거움에 대해서는 두말이 필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