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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비를 기다리는 소녀

by 고밀도

*영감이 떠오르면 종종 짧은 소설도 씁니다.


영서는 양말을 신다 말고 창밖을 곁눈질로 보았다. 머리에 헤어롤을 말고 주방과 화장대를 오가는 진화는 딸 영서의 운동회 점심 김밥을 말고 있다. 김밥의 재료는 조촐하다. 당근이나 우엉 따위는 넣을 여유는 없었다. 단무지, 햄, 달걀, 게맛살이 전부였지만, 4가지 재료만 넣고도 맛을 낼 수 있는 것은 진화의 특기였다.


영서는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진화를 눈으로 좇는다. 하고 싶은 말을 내뱉지 못해 입술만 씰룩거리다 눈을 내리 깐다.


“엄마가 계약자 만나고 바로 갈게. 이인삼각 경기 전에는 도착할 거야. 약속!”

‘거짓말.’


진화는 오랜만에 보험 계약 성사를 앞두고 있었다. 수줍음이 많던 진화였지만, 생계를 위해 자신의 외향성을 억지로 끄집어내어 보험설계사 일을 시작했다. 아이들을 돌보면서도 돈을 벌 수 있다는 동네 친구의 말을 믿어 보기로 했다. 집 근처 공단의 가구 공장에서 일하는 남편 정수는 요즘 들어 매일 술에 취해 잠들었다. 얼마 전부터 가구 공장에 말이 잘 통하지 않아 일만 하는 20대 젊은 외국인 노동자들이 많아지고 있었다. 정수는 자신의 자리가 위태로워지는 것 같아 심기가 불편했다. 불안에 등 떠밀려 일을 시작했지만 숯 기가 없는 진화는 사람들에게 보험을 권유하는 것이 늘 고역이었다. 그런데 먼저 친구의 먼 친척이 계약을 하겠다고 연락이 왔다. 순간 영서의 운동회 일정이 떠올랐지만, 당장 다음 달 생활비가 달린 일이기에 일정을 잡았다.


영서는 어깨를 늘어뜨리고 고개를 숙인 채 길을 나섰다. 이따금 하늘을 쳐다보고 다시 고개를 숙였다. 진화는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약속 시간이 다가와 뒤를 돌아 영서와 멀어졌다.


운동회에 못마땅한 표정을 한 얼굴은 영서뿐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못하는 것이 달리기였을뿐더러, 올해는 부모와 함께하는 이인삼각 경기가 기다리고 있었다. 영서는 진화가 계약자를 만나고 학교로 오겠다고 말했을 때, 운동회 날의 모습을 예견했다. 엄마는 시간을 맞추지 못할 것이 뻔했다. 아빠가 오전에 일을 끝내고 학교로 온다고 했지만, 엄마 없이 아빠와 있는 것은 더욱 어색한 일이었다. 모두 들뜬 모습으로 운동회를 즐기는 모습을 보니 혼자 멀뚱히 운동장 구석에 있는 것보다는 누구라도 오면 좋겠다는 마음이 생겼다. 그렇지 않을 거라면 차라리 장대비가 쏟아져 운동회가 멈춰버렸으면 했다. 아침 신문에 비 올 확률이 30%라고 했지만, 하늘은 너무도 맑았다. 눈을 질끈 감고 속으로 ‘비를 내려주세요.’를 외치고 하늘은 쳐다봤다. 구름의 위치만 조금 바뀌었을 뿐이다.


청과 백으로 옷을 나눠 입은 화진초등학교 아이들은 훌라후프 굴리기에 마치 목숨이 걸린 것처럼 달려들어 순식간에 얼굴이 벌게졌다. 모두 운동회에 빠져들고 있었다. 영서만이 집중하지 못하고 교문과 하늘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이인삼각 시간이 다가오고 말았다.


“영서야. 부모님 오늘 오시니?”

“네, 오신다고 하셨는데….”

“그럼 순서를 맨 뒤로 바꿔줄게.”


그 시각 진화는 애를 먹고 있었다. 계약자를 만나기 전 전화로 상품에 대한 설명을 1시간 넘게 했고, 서명만 하면 되는 계약이었다. 하룻밤 사이 고객은 친한 친구가 이 상품이 좋지 않다고 했다면서 재설계를 요구했다. 진화의 눈은 시계와 상품 설명서를 바삐 오갔다. 영서의 축 처진 어깨와 울먹이는 얼굴이 떠올랐지만, 이 계약은 성사해야 했다. 급한 마음에 정수더러 조금 일찍 영서에게 가라고 전화를 걸어야지 싶었다. 좀처럼 공장 사무실에 연락이 되지 않았다. 가까스로 전화를 받은 한 직원의 숨 가쁜 목소리가 들렸다. 그 목소리에 진화는 온몸에 힘이 풀렸다. 전화를 제대로 끊지도 못하고 공단에 있는 응급실로 달려갔다. 계약자는 차마 눈물범벅으로 달려가는 진화를 붙잡지 못했다.


영서의 앞에 단 두 팀만이 남아 있었다. 선생님은 영서에게 같이 뛰어 준다고 했다. 영서는 친구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다. 아무도 오지 않는 것이 눈에 더 띌 테니까. 그때 멀리서 ‘우르릉 쾅’ 소리가 들려왔다. 영서는 온몸에 전율을 느꼈다. 흙먼지 한 톨마저 선명하게 보였던 운동장에 어둠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선생님은 서둘러 두 팀을 출발시키고 영서의 발에 끈을 묶으려 했다. 영서가 하늘을 바라본 순간 아빠의 검지 손가락만 한 굵은 빗방울들이 순식간에 운동장을 적셨다. 모두 소리를 지르며 실내로 대피했다. 영서만이 손으로 비의 힘을 느끼며 운동장에 남았다. 영서는 그대로 교문을 나섰다. 발걸음이 가벼웠다. 아빠의 두꺼운 손가락 같은 빗방울. 걷다가 가끔 웃어댔다. 오늘만큼은 해피엔딩이라고 자신했다. 현관문을 조용히 열었다. 제멋대로 뒤집어진 신발들이 영서를 반겼다.


안방에서 동물의 울음소리가 났다. 진화의 흐느끼는 소리가 함께 곁들여졌다. 안방 문 사이로 장롱에 기댄 정수가 보였다. 검지 손가락에 붕대가 두껍게 감겨 있었다. 영서는 조용히 방으로 들어가 비가 오는 소리가 들리지 않게 귀를 막았다. 귀를 막았지만 잘려 나간 정수의 검지가 창문을 두리는 소리는 작아지지 않았다.


'그지 같은 해피엔딩..'


영서는 혼자 지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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