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학문하지 않으면 사람이 될 수 없으니, 이른 바 학문이라는 것은 또한 이상한 별스러운 일이 아니다.°°°요즘 사람들은 학문이 일상생활 속에 있음을 알지 못하고 제멋대로 고원(高遠)해서 실천하기 어려운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때문에 <학문하는 일을> 다른 사람에게 미루어 버리고 스스로 포기함을 편안히 여기니 어찌 슬퍼할 만한 일이 아니겠는가!
이이는 '학문이란, 나날이의 일상에서 물음을 갖고 그 물음을 배움과 생각을 통해서 풀어나가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넓은 의미의 학문입니다. 넓은 의미의 학문을 하는 사람을 학생(學生)이라고 합니다. 그 길에 먼저 나선 학생이 선생(先生)이고, 나중에 나선 학생이 후생(後生)입니다.
3. 학문하는 두 자세
자기에게 문제(무지와 오류)가 많다고 생각하고, 자기 한계를 인정하는 자세로부터 학문은 출발합니다. 그 초발심을 다른 말로 '겸손'이라고 하겠습니다. 학생을 자처하게 되는 겁니다. 자기에게 아무 문제가 없고, 모든 것을 다 알았노라고 하는 자세를 갖게 되면 학문은 폐기됩니다. 학생임을 거부하고 학자입네 하게 됩니다. 그 자만심을 '교만'이라고 하겠습니다.
학문의 반대는 우매가 아닙니다. 학문을 하되 그 학문이 깊지 못한 상태가 우매일 뿐입니다. 학문의 반대는 교만입니다. 자기는 더 이상의 학문이 필요 없다고 하는 우매한 상태가 교만입니다. 거기에 방자함이 덧 보태진 것이 오만방자입니다. 학문은 밖을 향한 통찰이지만, 안을 향한 성찰이기도 하다는 겁니다.
4. 시로 돌아가서
먹구름(黑雲)을 사람들로 볼 것인가, 사람들의 어떤 태도(자세)로 볼 것인가 하는 물음을 제기해 봅니다. 간신배, 당쟁의 무리들 등으로 이해하면 자기는 그 무리에서 쏙 빠지게 됩니다.
사람들의 무지와 우매, 교만함 등으로 이해하면, 자기는 물론 모든 사람들의 깊은 내면에 들어있는 밝음(中天日), 즉 학문하는 자세를 가리고 있는 먹구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보다 근원적인 문제제기이기도 하고, 자기 성찰의 문제제기이기도 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해석해보는 겁니다.
외로운 신하, 율곡의 시심에는 애군우국의 심정이 있습니다. 그 보다 더 근원적인 시심에서 저는 학문하는 자세를 잃지 않는 학생 이이를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