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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와 Sep 22. 2024

율곡 선생의 시심에서 학생 이이를 보다

서론(書論)

栗谷 李珥 율곡 이이

四遠雲俱黑 사원운구흑
中天日正明 중천일정명
孤臣一掬淚 고신일국루
灑向漢陽城 쇄향한양성

사방은 온통 먹구름인데
중천엔 해가 참으로 밝구나.    
외로운 신하 한 줌 눈물을    
한양성을 향해 뿌리누나.

[청와 론]

1. 현실정치로부터

율곡 이이(1536-1584) 선생이, 계미년(1583년) 여름에 배로 해주(海州)에 내려가면서 지은 시랍니다.

당쟁을 중재하고자 했으나 오히려 역풍을 맞아 뜻을 이루지 못하고 벼슬을 버린 채 홀로 떠나면서 지은 시랍니다.

그러니 '먹구름'(雲俱黑)과 '중천의 해'(中天日)는 정치적 파당들과 임금으로 각각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시의 주제를 '애군우국'(愛君憂國)이라 말하곤 합니다.

그런데 달리 해석할 방법은 없을까 하는 물음을 제기해 봅니다.

현실정치적 해석을 전혀 배제하지 않으면서, 삶의 근본적인 자세에 대한 성찰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해 볼 수 있는 길을 찾아보겠습니다.

2. 학문이란 무엇인가?

학문이란, 어떤 이론적 바탕 위에 이루어진 전문적인 지식의 체계를 말합니다. 이것은 좁은 의미의 학문입니다. 좁은 의미의 학문을 하는 사람이 학자입니다.

그런데 이이는 <격몽요결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擊蒙要訣序

人生斯世에 非學問이면 無以爲人이니 所謂學問者는 亦非異常別件物事也라.°°°今人은 不知學問在於日用이요 而妄意高遠難行 故로 推與別人하고  自安暴棄하니 豈不可哀也哉리오?

<어리석음을 깨우치는 비결의 서문>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학문하지 않으면 사람이 될 수 없으니, 이른 바 학문이라는 것은 또한 이상한 별스러운 일이 아니다.°°°요즘 사람들은 학문이 일상생활 속에 있음을 알지 못하고 제멋대로 고원(高遠)해서 실천하기 어려운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때문에 <학문하는 일을> 다른 사람에게 미루어 버리고 스스로 포기함을 편안히 여기니 어찌 슬퍼할 만한 일이 아니겠는가!

이이는 '학문이란, 나날이의 일상에서 물음을 갖고 그 물음을 배움과 생각을 통해서 풀어나가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넓은 의미의 학문입니다. 넓은 의미의 학문을 하는 사람을 학생(學生)이라고 합니다. 그 길에 먼저 나선 학생이 선생(先生)이고, 나중에 나선 학생이 후생(後生)입니다.

3. 학문하는 두 자세

자기에게 문제(무지와 오류)가 많다고 생각하고, 자기 한계를 인정하는 자세로부터 학문은 출발합니다. 그 초발심을 다른 말로 '겸손'이라고 하겠습니다. 학생을 자처하게 되는 겁니다. 자기에게 아무 문제가 없고, 모든 것을 다 알았노라고 하는 자세를 갖게 되면 학문은 폐기됩니다. 학생임을 거부하고 학자입네 하게 됩니다. 그 자만심을 '교만'이라고 하겠습니다.

학문의 반대는 우매가 아닙니다. 학문을 하되 그 학문이 깊지 못한 상태가 우매일 뿐입니다.
학문의 반대는 교만입니다. 자기는 더 이상의 학문이 필요 없다고 하는 우매한 상태가 교만입니다. 거기에 방자함이 덧 보태진 것이 오만방자입니다. 학문은 밖을 향한 통찰이지만, 안을 향한 성찰이기도 하다는 겁니다.

4. 시로 돌아가서

먹구름(黑雲)을 사람들로 볼 것인가, 사람들의 어떤 태도(자세)로 볼 것인가 하는 물음을 제기해 봅니다. 간신배, 당쟁의 무리들 등으로 이해하면 자기는 그 무리에서 쏙 빠지게 됩니다.

사람들의 무지와 우매, 교만함 등으로 이해하면, 자기는 물론 모든 사람들의 깊은 내면에 들어있는 밝음(中天日), 즉 학문하는 자세를 가리고 있는 먹구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보다 근원적인 문제제기이기도 하고, 자기 성찰의 문제제기이기도 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해석해보는 겁니다.

외로운 신하, 율곡의 시심에는 애군우국의 심정이 있습니다. 그 보다 더 근원적인 시심에서 저는 학문하는 자세를 잃지 않는 학생 이이를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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