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집은 시집만 판매하는 서점 <조림지>에서 샀다. 그리고 <책보책방>에서 주워온 다육이 화분에서 나온 물이 저 시집에 젖었다. 그때 즐거우면서도 착잡하면서도 내가 정말 착잡해야 하는 것인가 등 꽤 혼란스러웠다. 지금은 다 지나왔더니 추억이 되었다.
그날 친구의 엄마 친구 딸의 가게에 방문했다. 거기서 마치 나는 애니메이션 <센과 치히로>에서 하쿠가 치히로에게 앞으로 가야 할 길을 머릿속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있다. 친구의 엄마 친구의 딸이 작은 메모장에 내가 가면 좋을 법한 서점을 쭉 소개해줬다. 난 되게 길을 걷는 것을 좋아한다. 또 버스를 타고 시내에 나가는 일도 설렌다. 뭔가 익숙한 곳을 벗어나 내가 예측하지 못하는 순간을 즐기는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이 <멀리 가는 느낌이 좋아>라는 시집 제목이 굉장히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언뜻 보았던 글도 내 스타일이었다. 그래서 골랐다. 얘는 얼마나 내 책장에서 묵었는지 모르지만 다른 책에 비하면 신상이다. 유화를 좋아하는 나, 파스텔 분홍 좋아하는 나, 느낌을 중요시하는 나. 나름 의미 있는 충동구매였다는 생각이 든다.
이번에 고른 시는 '우리는 베를린에서'이다. 이 시 제목은 드라마 <그리고 베를린에서>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검색해 보니까 실화를 바탕으로 한 소설이 원작인 드라마라고 한다. 유대교의 하레디에 대해 주제를 하고 있고, 엄격한 규율 속에서 결혼한 여성이 베를린으로 탈출하는 여정을 그린 드라마다. 나무위키에서 보니까 현대 문명에서 동떨어진 것과 바닥난 여성 인권이 잘 드러나는 것 같다.
내가 이미지가 가득하고, 뭔가 이야기가 많은 것을 좋아해서 샀다. 근데 막상 뭔가 시 감상문을 적으려고 할 때 나도 모르게 적당히 짧고 이해가 잘 되는 것을 찾으려고 한다. 하지만 내가 고른 '우리는 베를린에서'는 좀 은유적이고 상징적인 것 같아 바로 읽었을 때 의미가 다가오지 않는다. 원래 시가 수수께끼이며 퍼즐인 점을 상기시키며 천천히 첫 행을 봐야겠다.
가장 의미심장한 문구는 "우리는 베를린에서 베를린을 잊어버리네"이다. 시에서 웃음을 터뜨린다고 하지만 이게 진짜 웃겨서가 아니라 약간 자조적인 웃음이 아닐까 싶다. "우리는 무너진 극장을 가지고 놀지"라는 표현은 굉장히 비극적인 연출이 잘 드러나는 대목 같다. 마치 폐허가 된 집에서 부모 없이 어린아이가 혼자 장난감이 아닌 것을 갖고 노는 장면처럼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베를린에서 베를린을 잊어버리네'는 베를린이라는 공간이 갖고 있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을 것 같다. 거기 사는 사람이라면 그 의미를 항상 상기하며 살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엄격한 규율 속에서 피폐한 삶을 살던 여성이 베를린이란 공간으로 이주한다면 '잊었던 베를린'을 다시 떠올리는 일이 되지 않을까 싶다.
되게 제목이 하나의 힌트가 되어서 시 속에 있는 은유들을 그 내용과 연결 지어서 생각하니까, 한결 시를 내 식대로 이해하기 수월한 것 같다. 되게 도발적인 시의 구절이 있다. "고무장갑은 선물 받고 싶지 않아/ 앞치마는 길게 찢어 세수할 때나 머리에 두르고" 이것은 마르셀 뒤샹의 샘과 유사하지 않을까 싶다. 포스트 모더니즘. 탈구조주의. 잘은 모르지만 대학생 때 전공 수업 때 많이 들었던 내용이다. 백조의 호수에서 백조가 보통 여자인데 남자였던 것이 화제가 되었던 것도 기억이 난다. 아무튼 나도 여성으로서 뭔가 이번 행은 굉장히 공감도 가고 재밌었다.
나는 '우리는 베를린에서'라는 시를 대강 다 읽었을 때 느낀 점은 '시가 따뜻하다'와 '참여적이다'와 '반성적이다'라는 생각이었다. "나의 것은 가늘고/ 너의 것은 조금씩 어긋나는 음"을 본다면 나는 한국에 있어서 관심이 있다고 해도 그렇게까지 굵기는 힘들다. 그리고 너의 것은 여기서 너를 지칭하는 것이 제목 속 여자라면 '조금씩 어긋나는 음'이라는 것도 이해가 간다. 삶이 평탄하지 않고 나아가 보려고 애를 쓰지만 현실은 녹록지가 않은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 시에서 이 구절이 가장 좋았다. 만약 내가 책갈피를 한다면 이 구절을 할 것이다. "등 돌린 천사와 마리아상은 12월의 이미지가 되고/ 흰 비닐봉지 안에서 우유는 빛나며 상해간다" 이 시집을 사기를 잘했다고 또 급 행복해진다.
이제 마지막 행을 보겠다. "미완성의 식사/ 불협화음의 목소리/ 끝나지 않는 서사를 사랑하리" 이 마지막 행을 타이핑하며 드는 생각은 '멋지다'이다. 끝나지 않는 서사를 사랑하리, 이것은 이 서사가 지지부진하고 어렵고 힘겨워도 포기하지 않고 사랑하겠다는 다짐이 내게 멋져 보였다.
내가 이 시와 비슷하게 144 청소의 이해, 그 시도 청소라는 게 굉장히 개인적인 영역으로 내가 공감하고 읽었을 때 마냥 개인적이지 않고 사회적이다라는 인상을 받았었다. 069 우리는 베를린에서, 이 시와 유사한 느낌을 갖고 있는 것 같다.
물론 이 시집에서 다른 시는 또 어떤 느낌을 갖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저 내가 고른 시가 너무 마음에 들었을 뿐이다. 그리고 드는 생각이 내가 관심이 가는 것이 있다면 자세히 관찰하고 들여다봐야 하는구나 하고 느꼈다. 예전에 피디님 강연을 들었을 때 이런 말을 들었다. "내가 모르는 것조차 모르는 것" 무지에 대해 디테일하게 설명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