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킷 10 댓글 공유 작가의 글을 SNS에 공유해보세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끝나지 않는 서사를 사랑하리

멀리 가는 느낌이 좋아, 주민현 시인, 창비

by 시적 Dec 17. 2024
아래로
브런치 글 이미지 1

이 시집은 시집만 판매하는 서점 <조림지>에서 샀다. 그리고 <책보책방>에서 주워온 다육이 화분에서 나온 물이 저 시집에 젖었다. 그때 즐거우면서도 착잡하면서도 내가 정말 착잡해야 하는 것인가 등 꽤 혼란스러웠다. 지금은 다 지나왔더니 추억이 되었다.


그날 친구의 엄마 친구 딸의 가게에 방문했다. 거기서 마치 나는 애니메이션 <센과 치히로>에서 하쿠가 치히로에게 앞으로 가야 할 길을 머릿속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있다. 친구의 엄마 친구의 딸이 작은 메모장에 내가 가면 좋을 법한 서점을 쭉 소개해줬다. 난 되게 길을 걷는 것을 좋아한다. 또 버스를 타고 시내에 나가는 일도 설렌다. 뭔가 익숙한 곳을 벗어나 내가 예측하지 못하는 순간을 즐기는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이 <멀리 가는 느낌이 좋아>라는 시집 제목이 굉장히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언뜻 보았던 글도 내 스타일이었다. 그래서 골랐다. 얘는 얼마나 내 책장에서 묵었는지 모르지만 다른 책에 비하면 신상이다. 유화를 좋아하는 나, 파스텔 분홍 좋아하는 나, 느낌을 중요시하는 나. 나름 의미 있는 충동구매였다는 생각이 든다.


이번에 고른 시는 '우리는 베를린에서'이다. 이 시 제목은 드라마 <그리고 베를린에서>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검색해 보니까 실화를 바탕으로 한 소설이 원작인 드라마라고 한다. 유대교의 하레디에 대해 주제를 하고 있고, 엄격한 규율 속에서 결혼한 여성이 베를린으로 탈출하는 여정을 그린 드라마다. 나무위키에서 보니까 현대 문명에서 동떨어진 것과 바닥난 여성 인권이 잘 드러나는 것 같다.


내가 이미지가 가득하고, 뭔가 이야기가 많은 것을 좋아해서 샀다. 근데 막상 뭔가 시 감상문을 적으려고 할 때 나도 모르게 적당히 짧고 이해가 잘 되는 것을 찾으려고 한다. 하지만 내가 고른 '우리는 베를린에서'는 좀 은유적이고 상징적인 것 같아 바로 읽었을 때 의미가 다가오지 않는다. 원래 시가 수수께끼이며 퍼즐인 점을 상기시키며 천천히 첫 행을 봐야겠다.


가장 의미심장한 문구는 "우리는 베를린에서 베를린을 잊어버리네"이다. 시에서 웃음을 터뜨린다고 하지만 이게 진짜 웃겨서가 아니라 약간 자조적인 웃음이 아닐까 싶다. "우리는 무너진 극장을 가지고 놀지"라는 표현은 굉장히 비극적인 연출이 잘 드러나는 대목 같다. 마치 폐허가 된 집에서 부모 없이 어린아이가 혼자 장난감이 아닌 것을 갖고 노는 장면처럼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베를린에서 베를린을 잊어버리네'는 베를린이라는 공간이 갖고 있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을 것 같다. 거기 사는 사람이라면 그 의미를 항상 상기하며 살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엄격한 규율 속에서 피폐한 삶을 살던 여성이 베를린이란 공간으로 이주한다면 '잊었던 베를린'을 다시 떠올리는 일이 되지 않을까 싶다.


되게 제목이 하나의 힌트가 되어서 시 속에 있는 은유들을 그 내용과 연결 지어서 생각하니까, 한결 시를 내 식대로 이해하기 수월한 것 같다. 되게 도발적인 시의 구절이 있다. "고무장갑은 선물 받고 싶지 않아/ 앞치마는 길게 찢어 세수할 때나 머리에 두르고" 이것은 마르셀 뒤샹의 샘과 유사하지 않을까 싶다. 포스트 모더니즘. 탈구조주의. 잘은 모르지만 대학생 때 전공 수업 때 많이 들었던 내용이다. 백조의 호수에서 백조가 보통 여자인데 남자였던 것이 화제가 되었던 것도 기억이 난다. 아무튼 나도 여성으로서 뭔가 이번 행은 굉장히 공감도 가고 재밌었다.


나는 '우리는 베를린에서'라는 시를 대강 다 읽었을 때 느낀 점은 '시가 따뜻하다'와 '참여적이다'와 '반성적이다'라는 생각이었다. "나의 것은 가늘고/ 너의 것은 조금씩 어긋나는 음"을 본다면 나는 한국에 있어서 관심이 있다고 해도 그렇게까지 굵기는 힘들다. 그리고 너의 것은 여기서 너를 지칭하는 것이 제목 속 여자라면 '조금씩 어긋나는 음'이라는 것도 이해가 간다. 삶이 평탄하지 않고 나아가 보려고 애를 쓰지만 현실은 녹록지가 않은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 시에서 이 구절이 가장 좋았다. 만약 내가 책갈피를 한다면 이 구절을 할 것이다. "등 돌린 천사와 마리아상은 12월의 이미지가 되고/ 흰 비닐봉지 안에서 우유는 빛나며 상해간다" 이 시집을 사기를 잘했다고 또 급 행복해진다.


이제 마지막 행을 보겠다. "미완성의 식사/ 불협화음의 목소리/ 끝나지 않는 서사를 사랑하리" 이 마지막 행을 타이핑하며 드는 생각은 '멋지다'이다. 끝나지 않는 서사를 사랑하리, 이것은 이 서사가 지지부진하고 어렵고 힘겨워도 포기하지 않고 사랑하겠다는 다짐이 내게 멋져 보였다.


내가 이 시와 비슷하게 144 청소의 이해, 그 시도 청소라는 게 굉장히 개인적인 영역으로 내가 공감하고 읽었을 때 마냥 개인적이지 않고 사회적이다라는 인상을 받았었다. 069 우리는 베를린에서, 이 시와 유사한 느낌을 갖고 있는 것 같다.


물론 이 시집에서 다른 시는 또 어떤 느낌을 갖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저 내가 고른 시가 너무 마음에 들었을 뿐이다. 그리고 드는 생각이 내가 관심이 가는 것이 있다면 자세히 관찰하고 들여다봐야 하는구나 하고 느꼈다. 예전에 피디님 강연을 들었을 때 이런 말을 들었다. "내가 모르는 것조차 모르는 것" 무지에 대해 디테일하게 설명을 들었다.


출처) 멀리 가는 느낌이 좋아, 주민현 시인, 창비시선 490, 2023

작가의 이전글 한국인의 힘은 밥심

브런치 로그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