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간 나에게 직장이란 안전하고확실한 울타리였다. 그 단단한 울타리 바깥은 자유로웠지만 "불확실"이라는 가시가 돋친 순례자의 길과도 같았다.
물론 울타리 안에도 언제, 어디서 포식자가 나타날지 모른다는 리스크가 있었지만, 전지전능한 어떤 것이 울타리를 넘을 수 없는 존재로부터 나를 보호해 주고 있었다. 그 보호막을 뚫고 나가기에는 그 안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너무 많았다.
1. 성취감
문제점을 찾고, 일을 발견하고, 해결할 방법을 고민하고, 실행하고. 그렇게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점점 성장하는 나를 발견하는 것.
2. 롤 모델
커리어를 가진 일하는 엄마로 살기.엄마는 집사람, 아빠는 바깥양반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기. 우리 아이들에게, 가정을 위해 희생하는 여자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당당히 능력을 발휘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욕심. 특히 내 딸들 또한 그렇게 살아가기를 바라는 마음.
3. 평판
번듯한 명함을 가진 딸, 며느리, 아내, 누나, 언니로 사는 것. 회사 이름에 기대면 쉽게 나를 설명할 수 있게 되는 편리함. 그럴 때 스스로 느끼는 자부심과 외부에서 보는 그럴듯한 모습.
4. 보상
따박따박 들어오는 월급, 보너스, 그리고 회사 복지. 법인카드로 밥 먹기. 나라는 사람이어서라기보다는, 그 자리에 있기 때문에 누리는 혜택들.
5. 내 시간
노동과 자기 계발의 경계에 있는 하루 8시간. 바쁘면 바쁜 대로, 여유가 있을 땐 있는 대로 일을 해야 하는 정해진 시간 동안 뭔가를 하고 있다는 만족감. 시간을 허투루 쓰고 있지 않다는 안도감.
6. 피난처
사무실이라는 물리적인 공간으로 피신할 수 있다는 분리감. 일상의 고뇌와 일의 고뇌를 적절히 조절할 수 있는 양다리 인생.
나라는 세계에서 직장은 이런 거였다.
사람마다 직장이 가지는 의미는 다 다르다.
중요하게 여기는 가중치도 다 다르다.
그런데 하루하루 일개미처럼 주어진 일상을 살다 보면 가야 할 곳을 잊은 채 관성대로 살게 된다. 익숙하고 쉬운 선택만을 하기 쉽다. 딱히 불안을 느낄만한 이유가 없는 경우라면 그렇게 살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 매번 의미만 좇는 인생은 피곤하다.
하지만, 누구나 갈림길에 서야 하는 때가 온다.
나는 최근에야 내가 왜 직장을 다니고 있었는지 진지하게 생각을 해보게 됐다. 지난 15년간 막연하게나마 놓을 수 없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그 실체는 긴 시간에 묻혀 형체를 알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내가 어떤 길을 더 원하는 걸까?
도저히 답을 낼 수 없을 정도로 혼란스럽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현실을 피하고만 싶었다. 상담이 끝나고 나서 생각해보니,내가 중요하게생각하는 것들이 직장생활 안에 있었다는 걸 알게 됐다. 그리고 한쪽 길을 선택했을 때 뭘 포기해야 하는지 정리를 해보니 뭔가 명확해졌다. 잃는 것의 가짓수는 중요하지 않다. 내가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게 어느 쪽인지가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