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밝음 Oct 22. 2022

아무런 준비 없이 마라톤 대회의 출발선에 세운다.


많은 사람들이 아이의 공부를 마라톤에 비유하곤 합니다. 학령기의 시작인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까지 12년의 세월을 달려 ‘대학 입시’라는 결승점에 도달하는 것이라고 하면서요. 그렇다면 유아기는 이 마라톤 대회에서 어느 지점에 있다고 할 수 있을까요? 가볍게 몸을 풀고 있는 순간? 출발선에 서 있는 순간? 아니면 이미 출발 신호를 받아 달리고 있는 순간?     





저는 ‘엄마 손을 잡고 막 경기장으로 들어오는 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자신이 여기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전혀 모른 채로요. 이때 아이 눈에 비친 경기장의 모습은 이 대회에 대한 첫인상을 결정짓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흥겨운 음악이 흘러나오고, 기대로 들뜬 밝은 표정의 사람들이 보이고, 맛있는 음식들이 준비된 모습이라면 아이는 이곳에서 뭔가 재미있는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설렘을 느낄 겁니다. 자신도 이 흥겨운 잔치에 참여하고 싶어질 테고, 이 과정에서 아이는 자연스럽게 관람객에서 참여자로 변화합니다. 스스로 배번호를 달고 운동화 끈을 조여요. 적당히 몸을 푼 후, 알맞게 준비되었을 때 출발선에 섭니다.     


한편, 경기장의 분위기를 파악할 새도 없이 출발선에 세워지는 아이도 있습니다. 엄마는 아이에게 배번호를 달아주며 이야기해요. “이제부터 달리기를 시작할 거야. 긴 거리를 오랫동안 달려야 해. 그러기 위해선 조금이라도 빨리, 앞서서 출발하는 게 좋아. 자 가자.” 아이는 얼마나 가야 하는지, 왜 달려야 하는지 아무런 정보도 없이 경주를 시작합니다.      



두 아이의 경주는 어떻게 펼쳐질까요? 100m 즈음까지는 대체로 후자의 아이가 앞서갈 겁니다. 먼저 출발했으니 당연하겠지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건 100m 경주가 아닙니다.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많은 거리가 남아있어요. 얼마 지나지 않아 준비가 되지 않은 몸에선 과부하 신호를 보낼 것이고, 이유도 모른 채 타인의 손에 이끌려 시작한 달리기는 점차 동력을 잃어갈 것입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이유 없이 제자리에 멈춰 설지도 모릅니다. 생각해보면 이상할 것도 없어요. 애초에 이유도 모른 채 시작한 달리기였으니까요.   


       

무작정 빨리 가기앞서가기를 강조하면 결국은 고꾸라집니다.     


두뇌 발달이 급속도로 이루어지는 유아기가 학습 능력 형성에 있어 매우 중요한 시기인 건 분명합니다. 이를 알기에 저 역시 십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이 시기 아이들이 어떻게 발달하며 성장하는지를 공부하고 있는 것이고요. 하지만 아무리 중요하다 하더라도 아이의 삶 전체를 놓고 보면 극히 일부의 시간일 뿐입니다.      


아이는 아무것도 모르고 경기장에 들어서지만, 아이의 손을 잡고 있는 우리는 큰 그림을 볼 수 있어야 해요. 결승점이 어디에 있는지, 어떤 코스로 이루어져 있는지, 아이가 힘들어할 만한 구간은 어디인지를 체크하고 나면, 비로소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 때인지 보일 겁니다. 엉뚱한 타이밍에 힘을 다 빼느라 제대로 된 결과를 얻지 못하는 안타까운 상황은 생기지 않겠죠.     



그 많던 초등 우등생은 다 어디로 갔을까?     



“우리 애가 초등학교 때까지는 공부도 잘하고 똑똑했는데, 중학교 올라가더니 성적이 확 떨어지기 시작하더라고요.” 주변에 중고등학생 자녀를 키우고 있는 부모님이 있다면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이야기입니다. 제가 대학생 때부터 졸업 후 전업 과외 교사로 일할 때까지 100명 가까이 되는 중고등학생을 가르치면서 학부모님으로부터 가장 많이 들은 말도 바로 이것이었고요.     


초등학교에서 우등생이었던 아이들이 상급 학교에서는 두각을 내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 역시 유초등 시기에 알맞는 과업의 수준을 제대로 설정하지 않고 성급하게 속도를 냈기 때문입니다. 이 시기에 배움의 즐거움을 경험해 본 아이만이 이후 어렵고 힘든 과제를 마주하더라도 '끝까지 붙잡고 풀어냈을 때의 성취와 쾌감'을 생각하며 버틸 수 있거든요.      


그러니 이제 막 자기의 힘으로 세상을 배우고 느끼고 경험하기 시작하는 아이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빨리, 더 많은 것을 소화시키도록 재촉하지 마세요. 많은 시간이 흘러 결국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일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기에는, 한 번뿐인 우리 아이들의 삶이 너무나 귀하고 소중하니까요.

이전 08화 아이의 뇌가 심심할 틈을 주지 않는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