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어느 날, 거울 속 나에게 자아가 생겼다>, 4화
하지만 말뿐이다. 그의 목소리는 아까와 달리 많이 누그러져 있다. 그는 얼마간 더 서성인다. 이 상황을 감당하지 못하겠다는 듯 머리를 헝클어트리며 힘겹게 숨을 몰아쉰다. 그러다. 그러다.
손가락을 타고 붉은 피가 흐른다. 왼쪽 검지 손톱 옆의 살이 힘없이 뜯어진다. 좁은 틈 사이로 피가 배어 나온다.
“뭐 하는 짓이에요!”
항의한다. 하지만 그는 태연하게 묻는다.
“몇 번째 손가락이야?”
“장난해요, 지금? 왜 멀쩡한 살점은 뜯어내고 난리예요? 그것도 가장 아픈 곳을!”
“몇 번째 손가락이냐니까?”
“왼쪽 검지요, 왼쪽 검지! 어제 잔뜩 뜯어냈던 바로 그곳! 뜯은 데 또 뜯어서 아파 죽겠잖아요!”
말라비틀어진 살갗을 부여잡고 성을 낸다. 그러나 그는 아무런 대꾸도 없다. 이윽고 분을 이기지 못하는 악성이 들려 온다. 한참을 그르렁대던 그가 내던지듯 쏘아붙인다.
“치가 떨려. 내가 너랑 같은 사람이라는 게.”
그가 양손으로 눈을 벅벅 긁는다. 녹슨 쇠를 긁는 텁텁한 소리가 거울을 타고 새어 나온다. 연이어 불어닥친 혼란을 제대로 소화하기 어려운 듯 그의 뇌가 힘겹게 신음한다. 두통은 금세 내게도 전해진다. 그의 두통은 어느새 나의 두통이 된다. 그의 난제 또한 나의 난제가 된다. 나는 거울 너머의 그처럼 욱신거리는 왼쪽 관자놀이를 지그시 내리누른다. 우리는 동시에 고민을 내뱉는다.
“우리 중 대체 누가 진짜인 거지?”
“둘 중에 대체 누가 진짜인 거죠?”
함께 멈칫한다. 같은 사람이라는 사실이 우습게 티가 난다. 헛웃음을 짓는다. 소리 내어 말하지 않았지만, 지금 머릿속에 떠올리는 생각까지 완벽하게 같을 것이다. 둘 중 누구 하나가 사라져야 한다면 그건 거울 너머의 당신이어야 한다. 이편의 나는 절대 당신을 위해 희생되지 않을 테다. 우리는 이런 상황에서조차도 서로를 살쾡이처럼 살핀다. 그가 나임을 알면서도 서로에게 총구를 겨눈다.
오늘 아침, 나의 거울은 어긋났다. 어긋난 거울에는 시차가 발생한다. 시차가 사라지려면 비뚤어진 거울을 바로잡아야 한다. 거울이 기울어진 원인을 알아야 한다. 하지만 우리에겐 그보다 더 중요한 사실이 있다. 누가 진짜인지를 가려내는 것. 거울의 난제 끝에 누가 살아남을 수 있는지를 파악하는 것. 결국 둘 중 하나가 사라질 수밖에 없는 혹독한 운명 앞에서, 거울을 바로 세우려는 노력보다, 망가질 대로 망가진 이 상황을 돌이킬 계획보다, 더 긴급한 사안은 누가 진짜인지를 알아내는 것이다. 이건 절대 이기적인 궁금증일 수 없다. 누구든 나와 같은 상황에 처한다면 자연스레 같은 고민을 하게 될 것이므로.
그때, 휴대폰 알림음이 울린다. 오늘 있을 성대한 행사를 친절하게 상기시켜 주는 알람. 휴대폰을 집어 드는 그의 소리가 들린다. 나도 그와 똑같은 모습으로 메시지를 확인하고 있다.
‘지호 결혼식, 11시까지.’
휴대폰의 글자를 보자마자 불현듯 현실로 되돌아온다. 그에게 정신을 빼앗겨 오늘을 잊고 있었다. 연차까지 내고서 분주한 아침을 맞았던 이유를. 온갖 쇼핑몰을 뒤져 값비싼 옷과 신발, 장신구를 구매해야만 했던 이유를, 완전히 잊고 있었다.
“큰일이에요. 늦었어요. 지금 출발해도 10분 늦게 도착할 거예요.”
나는 휴대폰을 보며 다급하게 말한다.
“뭐야. 가려고? 지금 이 상황에서?”
그가 어이없다는 듯이 묻는다.
“그럼 안 갈 거예요?”
내가 되묻는다. 그는 말이 없다.
“안 갈 거냐고요.”
또 한 번 묻는다. 나의 말끝에는 어느새 날이 서 있다.
“가지 않을 거야.”
그가 짧게 답한다. 거울을 응시한다. 촌스러운 초록 테이프가 덕지덕지 붙어 있는 더러운 유리를 노려본다. 진실한 척하는 그가 아니꼽고 역겹다.
“좋아요. 마음대로 해요.”
내가 응수한다.
“정말 가려고? 나 없이?”
“상관없어요.”
화장실에서 나가기 위해 슬리퍼를 끌고 문가로 향한다. 발에 끼고 있던 슬리퍼를 밀어내자, 싸구려 플라스틱 위에 고여 있던 몇 방울의 물이 발등을 타고 흐른다. 발가락 사이로 흘러 들어간 물방울을 짜증스럽게 털어낸다.
“내가 없으면 거울에 아무런 상도 맺히지 않을 거야. 네가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증명할 방법이 없어질 거라고. 그래도 갈 거야? 정말 그래도?”
허공에서 흔들리던 발이 멈춘다. 살집이 두둑한 종아리가 천천히 하강한다. 발바닥으로 차가운 타일을 지그시 밟는다.
“갈 거예요.”
지금 그는 어떤 표정일까. 고매한 척하는 내가 역겨울까?
“좋아. 마음대로 해. 하지만 난 가지 않을 거야. 분명히 말했어.”
그건 그의 마지막 엄포다.
“저녁때 만나요.”
나는 한쪽 슬리퍼를 벗고, 다른 쪽 슬리퍼마저 벗어 던진다. 화장실 불마저 꺼 버리고서 그곳을 박차고 나온다. 오늘 아침 우리의 거울은 어긋났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난 이 거대한 틈을 수선할 마음이 없다. 적어도 지금 당장은.
* 소설 <어느 날, 거울 속 나에게 자아가 생겼다> 중 일부를 발췌한 글입니다.
평범했던 아침, 거울 속에 수상한 ‘내’가 등장한다. 겉모습부터 목소리까지 나와 도플갱어처럼 닮았지만, 독립적으로 말하고 행동하는, 별개의 인격체인 ‘그’. 그는 나를 발견하자마자 눈을 까뒤집고선 뒤로 고꾸라져 버린다. 내가 미처 놀라기도 전에 먼저 선수를 쳐 버린 것.
하지만 어째서? 어떻게 몸을 훔쳐 간 도둑이 주인보다 더 놀랄 수 있는 거지?
정작 기겁해야 하는 건 나인데! 격분하고 경악해야 하는 건 나의 몫인데!
아니, 아닌가? 혹시, 혹시 내가? 아니다. 말도 안 된다.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있어선 안 되는 일이다! 하지만 모르겠다. 우리 중 대체 누가 ‘진짜’인 거지? 만약 그가 진짜라면. 내가 그를 하이재킹한 거라면. 그럼, 나는 누구지? 나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거울을 사이에 두고 분리되어 버린 두 개의 자아.
어긋난 거울을 바로잡기 위한 농밀하고 진솔한 고백의 여정.
현시대와 사회의 단면을 고발하는, 문드러진 한 사람의 심리 분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