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어느 날, 거울 속 나에게 자아가 생겼다>, 5화
“아직 있어요?”
차디찬 공기를 가르며 목소리가 메아리친다. 미라의 내피 같은 테이프는 여전히 거울을 흉측하게 감싸고 있다. 플라스틱 슬리퍼에 발을 대충 얹고서 뒤축을 질질 끌며 세면대로 향한다. 거울 저편은 어둡다. 인기척조차 보이지 않는다. 유리 프레임 안에는 한기 서린 침묵만이 감돌고 있다.
덕지덕지 붙은 테이프로 얼굴을 가까이 가져간다. 울타리 뒤에 숨어서 염탐하는 사람처럼 실눈을 뜨고 초록색 벽에 난 실금들을 살핀다. 눈가 주름이 파르르 떨린다. 눈두덩이에 그득한 살이 맞부딪치며 시야를 가린다. 초점이 맞지 않아 눈앞이 흐리멍덩하다. 눈을 감았다 뜬다. 여전히 청테이프의 허연 잔주름 외에는 보이는 것이 없다.
그는 어디로 갔을까. 나를 놔두고. 나만 놔두고.
한 평도 안 되는 화장실이 광활하게 느껴진다. 하루종일 골칫덩이였는데, 속이 메슥거릴 정도로 께름직했었는데. 막상 그가 보이지 않으니 온 사방이 칠흑같이 암담하다. 고작 거울 하나 어두워진 것뿐인데, 검게 변한 반쪽짜리 유리일 뿐인데.
주먹을 쥔 손을 유리 위에 얹는다. 가볍게 두드린다. 낯선 이의 대문을 노크하듯, 최대한 예의를 차려 그를 부른다.
“이제 왔어?”
방금 잠에서 깬 것 같은 쉰 목소리가 유리 벽 너머로 들려 온다.
반갑다. 왜 반갑지?
“내내 집에 있었던 거예요?”
내가 묻는다.
“딱히 할 일이 있던 것도 아니어서.”
그가 멋쩍은 듯 말한다.
“결국 좀 늦었어요.”
나는 수도꼭지를 만지작거린다.
“그래? 난처했겠네.”
그의 답변. 어쩐지 위안이 된다. 내가 꼭 듣고 싶었던 말이다. 몇 시간 전까지 살해 협박을 남발하던 또 다른 나에게서 받는 위로라니, 기분이 묘하다.
“화장실 벽이 무너져 내렸다고 그랬어요.”
“화장실 벽?”
“늦은 이유요. 낡은 화장실 벽이 뒤틀리는 바람에 벽에 붙은 타일이 전부 엉망진창으로 무너져 내렸고, 그 여파로 문이 잠겨서 한 시간가량 문이랑 씨름하다가 겨우 빠져나왔다고 했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늦었다고요.”
거울 너머의 그가 쿡쿡 웃는다. 나도 연하게 미소 짓는다.
“사람들이 그 말을 믿어?”
“믿지 않으면요?”
그가 킥킥댄다.
“걱정은 해 주던? 결혼식 주인공은 걱정해 줬을 거 같은데. 타일 관련 문제였다면.”
그가 묻는다. 약간 기대하는 목소리다.
“뭐, 그렇죠. 아무래도 타일이니까. 하지만 지호와는 오래 얘기하지 못했어요. 늦게 갔으니까. 그보다는 다른 사람들과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눴죠. 다들 으레 하는 인사치레를 건네더군요. 아유, 어떻게 하냐. 집주인한테는 말했냐. 이참에 이사라도 가야겠다. 그런 집에서는 사는 거 아니다. 등등.”
“그 사람들, 당신이 지금 어디 사는지 알고는 있는 거지?”
“글쎄요. 저번 달에 이사 온 것도 모를걸요.”
우리는 동시에 피식 웃는다. 사람들이란.
“잘 아는 타일 수리공이라도 추천해 줬으면 좋았을 텐데.”
“글쎄요. 오히려 그렇게 도움을 받았다면 부담스러워서 몸 둘 바를 몰랐을걸요. 도움을 받았으면 그에 상응하는 무언가를 해 주어야 할 텐데. 난 자신 있게 추천해 줄 무언가가 하나도 없거든요. 안타깝게도.”
“왜 없어. 맛있는 초콜릿 컬렉션이 있잖아.”
“아, 그 슈퍼마켓 떨이 세일 컬렉션?”
“매번 두리번거리면서 찾는 그거.”
“그런 걸 어떻게 추천해 줘요. 맛이 좋아서 사는 건 아니에요. 슈퍼 마감 때 가면 매번 30프로 세일하고 있으니까 덥석 집는 거지.”
“하지만 줄지어 서 있는 커다란 봉투 중 뭐가 맛있는 건지, 뭐가 맛없는 건지를 정확히 구분할 수 있잖아.”
“싸구려라고 해도 다 같은 싸구려는 아니니까.”
우리는 마지막 문장을 동시에 내뱉으며 웃음을 터트린다.
“하지만 그런 걸 추천해 주면 단번에 욕먹을걸요. 아니면 동정의 눈길을 받거나.”
“요즘은 그렇지도 않아. 경기가 얼마나 어려워졌는데. 의외로 그런 정보를 기다릴지도 모른다고. 누군가는.”
“그래요, 좋아하겠죠. 누군가는.”
하지만 동정의 눈길은 여전할걸요? 아니면 동료를 발견한 얼굴이거나. 뭐가 됐든 난 싫네요. 그렇게 읊조린다.
“예민한 답변이네.”
그의 말에 고개를 든다.
“예민하지 않을 수가 없는 날이잖아요.”
내가 얼버무리듯 답한다.
타일 바닥과 부딪치는 플라스틱 마찰음이 들린다. 그가 슬리퍼를 대충 구겨 신는 소리다. 곧이어 그의 화장실에 불이 들어온다. 거울이 한순간에 환해진다.
“결혼식, 어땠는지 궁금하지 않아요?”
다가오는 그의 발소리에 대고 묻는다.
“딱히 별생각 없었지만, 막상 질문을 들으니 궁금해지네. 어땠어?”
그는 뚜껑이 덮인 변기 위에 주저앉았다. 문득 그의 허벅다리가 시리지 않을지 걱정된다. 화장실의 밤은 이불에서 막 빠져나온 아침만큼 싸늘하다. 그가 두툼한 실내복을 입었을까. 만약 아니라면 방에서 의자라도 하나 가져오면 좋을 텐데.
나는 대체 이런 걱정을 왜 하는 걸까.
“좋았어요. 유쾌했죠. 신랑과 신부가 가장 행복해 보이더군요.”
“좋네. 주인공이 기쁜 게 제일 중요하지. 음식은 뭐가 나왔어?”
“웨딩홀 결혼식이 다 똑같죠, 뭐.”
“뷔페?”
“스테이크요.”
“아, 스테이크. 와인은?”
“테이블마다 한 병씩.”
“겨우 한 병?”
“시간이 짧아서 그 이상 먹을 시간도 안 되겠던데요?”
나는 얼마간 더 결혼식 풍경을 서술한다. 가상의 공간에 웨딩홀을 스케치한 후 그를 초청한다. 하얀색 실크 커튼이 드리워진 웅장한 버진로드, 순백의 길옆으로 펼쳐지던 반사광 없는 대리석 바닥. 검은 대리석을 폴카 도트처럼 수놓았던 동그란 테이블들, 테이블을 에워싸고 앉아 있던 사람들. 사람 수만큼 놓인 하얀 식기들. 상 가운데 홀로 고고한 유리 화병과 화병마다 풍성했던 화려한 가든 로즈 꽃다발.
“참으로 이상적인 결혼식이군.”
유리 뒤로 어른거리는 그의 검은 실루엣이 보인다. 세면대에 팔을 올린 채 한쪽 턱을 괴고 있다. 내 이야기에 푹 빠진 모습이다.
“친구에게 마음을 담아 축하를 보내 주었나?”
그가 묻는다.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답한다.
“뒤돌아 인사할 때 내가 가장 크게 박수 쳤을 거예요. 손바닥이 따가울 정도로.”
“그 정도로 멋진 결혼식이었나 보네.”
“그랬나 보죠. 그랬을 테죠.”
나의 답변에 그가 문득 고개를 들어 이편을 돌아본다.
“씁쓸해 보이네.”
“아마도요.”
“아마도요? 모호한 표현인데.”
“신경 쓰지 마요. 시끌벅적한 파티가 끝나면 으레 몰려드는 공허함이에요.”
검은 그림자가 나를 물끄러미 응시한다.
“혹시 결혼이 하고 싶었던 건 아니지? 뭐, 부러웠다거나.”
“전혀요.”
“그럼,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게 된 건가?”
“무슨 뜻이죠?”
* 소설 <어느 날, 거울 속 나에게 자아가 생겼다> 중 일부를 발췌한 글입니다.
평범했던 아침, 거울 속에 수상한 ‘내’가 등장한다. 겉모습부터 목소리까지 나와 도플갱어처럼 닮았지만, 독립적으로 말하고 행동하는, 별개의 인격체인 ‘그’. 그는 나를 발견하자마자 눈을 까뒤집고선 뒤로 고꾸라져 버린다. 내가 미처 놀라기도 전에 먼저 선수를 쳐 버린 것.
하지만 어째서? 어떻게 몸을 훔쳐 간 도둑이 주인보다 더 놀랄 수 있는 거지?
정작 기겁해야 하는 건 나인데! 격분하고 경악해야 하는 건 나의 몫인데!
아니, 아닌가? 혹시, 혹시 내가? 아니다. 말도 안 된다.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있어선 안 되는 일이다! 하지만 모르겠다. 우리 중 대체 누가 ‘진짜’인 거지? 만약 그가 진짜라면. 내가 그를 하이재킹한 거라면. 그럼, 나는 누구지? 나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거울을 사이에 두고 분리되어 버린 두 개의 자아.
어긋난 거울을 바로잡기 위한 농밀하고 진솔한 고백의 여정.
현시대와 사회의 단면을 고발하는, 문드러진 한 사람의 심리 분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