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아버지가방에들어가신다 (공포 점수 : ★★☆☆☆)

FATHER GOES INTO THE BAG

by 미히

아버지가 없어졌다.


월요일 아침이었다. 늘 그렇듯 집 안은 잠에서 깨어 북적일 시간이었다. 부엌에서는 엄마가 아침밥을 준비하며 라디오를 틀어놓고, 나는 아직 잠이 덜 깬 눈을 비비며 방에서 나올 준비를 하고 있어야 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평소라면 현관문을 열고 "다녀오겠습니다"라고 묵직한 목소리로 말하며 집을 나서는 아버지의 모습이 있어야 했는데, 그 흔적이 없었다. 아버지가 감쪽같이 없어진 것이다. 그의 낡은 검정 구두는 현관에 고스란히 놓여 있었고, 늘 손에서 놓지 않던 열쇠고리도 문 옆 작은 탁자 위에 얌전히 있었다. 마치 그가 집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지 않은 것처럼.


“수아야, 너희 아빠 봤니?”
엄마의 목소리가 부엌에서 날아왔다. 평소보다 조금 높고 날카로운 톤이었다. 나는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오며 고개를 갸웃했다.
“아니, 주말 내내 못 봤는데.”
내 대답은 짧았다. 사실 주말 동안 나는 방에 틀어박혀 밀린 과제를 하느라 정신없었고, 아버지가 집에 있었는지조차 제대로 신경 쓰지 못했다. 아버지는 늘 조용한 사람이었다. TV를 볼 때도 소리를 키우지 않고, 주말이면 소파에 앉아 신문을 넘기거나 오래된 라디오를 만지작거리곤 했다. 그래서인지 그의 부재는 더 갑작스럽게 느껴졌다.


엄마가 부엌에서 나와 거실로 걸어왔다. 손에는 아직 물기가 묻은 행주를 쥐고 있었고, 얼굴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휴대폰도 두고, 어딜 간 거야.”
엄마는 그렇게 말하며 두리번거렸다. 그녀의 눈은 거실 구석구석을 훑었고, 마치 아버지가 소파 뒤나 커튼 뒤에라도 숨어 있을 거라는 듯한 표정이었다. 나는 엄마를 따라 자연스레 시선을 돌렸다. 아버지의 휴대폰은 식탁 위에 놓여 있었다. 화면은 꺼져 있었고, 늘 그의 손에 들려 있던 그 낡은 스마트폰이 그렇게 조용히 놓여 있으니 이상하게 낯설었다. 충전기도 연결되지 않은 채였다.


“언제 없어진 건데?”
내가 물었다. 목소리에 약간의 불안이 섞여 나왔다. 아버지가 아침에 일찍 나갔다면 내가 잠든 사이였을 테고, 그렇지 않다면 주말 동안 이미 집에 없었던 걸지도 몰랐다. 머릿속이 조금씩 복잡해졌다.
“글쎄다, 평소처럼 방에 있는 줄 알았지. 아니면 친구들 만나러 갔거나.”
엄마의 대답은 확신이 없었다. 그녀는 행주를 내려놓고 아버지의 방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나는 엄마를 따라갔다. 아버지의 방 문은 살짝 열려 있었고, 안은 어스름한 빛으로 채워져 있었다. 커튼이 반쯤 쳐져 있어 햇빛이 제대로 들어오지 못했고, 침대는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마치 아무도 잠을 자지 않은 것처럼. 책상 위에는 몇 권의 오래된 책과 먼지가 살짝 쌓인 안경이 놓여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없었다.


엄마가 방 안으로 들어가며 중얼거렸다.
“이 사람이 대체 어디로 간 거야? 말도 없이…”
그녀는 침대 옆 작은 옷장을 열어보더니, 곧장 문을 닫았다. 나는 방 한쪽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러다 문득, 금요일 밤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는 꿈인 줄 알았던, 이상하고도 생생한 장면이었다.
“사실 내가 본 게 있긴 해.”
내 목소리가 방 안을 채웠다. 엄마가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봤다. 그녀의 눈썹이 살짝 올라가며 궁금증이 묻어났다.
“언제 봤는데?”
엄마가 다급하게 물었다. 그녀는 옷장에서 손을 떼고 내게로 한 걸음 다가왔다.


“금요일 밤에 봤는데, 꿈 꾼 건 줄 알았지.”
내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그날 밤, 나는 과제를 끝내고 늦게 잠들기 전 물을 마시러 거실로 나왔다가 우연히 아버지의 방 앞을 지나쳤다. 문이 살짝 열려 있었고, 방 안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삐걱이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 움직이는 그림자가 보였다. 나는 잠이 덜 깬 상태라 신경 쓰지 않고 방으로 돌아갔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그게 꿈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희 아빠 뭐하고 있든?”
엄마의 목소리가 나를 현실로 끌어당겼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아빠 방 문이 조금 열려 있었는데, 봤는데… 아빠가 가방 안에 들어가고 있더라고. 그 오래된 갈색 가죽 가방 있잖아.”
내 말이 끝나자마자 엄마의 표정이 굳었다. 나는 그 가방을 또렷이 기억했다. 낡아서 여기저기 긁히고 색이 바랜 갈색 가죽 가방. 아버지가 오래전부터 가지고 있던 물건으로, 방 한쪽 구석에 늘 놓여 있었다. 가끔 그걸 들여다보는 아버지를 본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 안으로 들어간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런데 왜 이렇게 그 장면이 생생하게 떠오르는 걸까.


“아, 그 가방?”
엄마가 천천히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놀라움과 함께 약간의 불안이 섞여 있었다.
“응, 그 가방 어디 있어?”
내가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방 안을 둘러봤지만 그 가방은 보이지 않았다. 구석에 있어야 할 그 낡은 가죽 가방이 텅 빈 공간을 남긴 채 사라져 있었다. 엄마가 입술을 살짝 깨물더니 말했다.
“그거 토요일 아침에 버렸는데? 낡은 게 방 한 켠을 혼자 차지하고 있길래 말이야.”
엄마의 말이 끝나는 순간, 나와 엄마는 서로를 바라봤다. 눈빛이 마주친 그 짧은 순간,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내가 입을 열었다.


“큰일이다, 아빠를 버려버렸나 봐.”


엄마가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그 가방, 분명히 헌옷수거함 앞에 버렸어. 스티커 붙여서 말야. 주말에 버렸으니까, 아마 아직 거기 있을지도 몰라!”

엄마의 목소리는 다급함과 희망이 뒤섞여 있었다. 토요일 아침, 엄마가 집 안을 정리하며 그 낡은 가방을 들고 나갔던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그때 방에서 과제에 몰두하느라 별 관심을 두지 않았는데, 이제 그 순간이 이렇게 큰 사건으로 돌아올 줄은 몰랐다. 엄마의 말이 끝나자마자 내 가슴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정말 그 가방 안에 있었다면, 지금쯤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상상만으로도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럼 빨리 가서 찾아봐야겠어!”

내가 외쳤다. 목소리가 평소보다 높게 튀어나왔다.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엄마와 나는 서로를 쳐다볼 틈도 없이 허겁지겁 집을 나섰다. 현관문을 열자 차가운 아침 공기가 얼굴을 스쳤다. 나는 대학교 오전 수업을 들으러 가려던 복장 그대로였다. 회색 후드티에 청바지, 운동화는 아직 끈도 제대로 묶지 못한 상태였다. 엄마는 앞치마를 벗어던지지도 않은 채 얇은 카디건 하나만 걸치고 나왔다. 문을 잠갔다고 생각했는지, 아니면 그럴 정신도 없었는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곧장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아파트 복도에는 이웃 주민 몇 명이 지나가며 우리를 힐끔 쳐다봤지만, 그들의 시선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밖으로 나오자 아침 햇살이 눈을 찔렀다. 아파트 단지 안 작은 길을 따라 우리는 분리수거장이 있는 곳으로 달렸다. 평소라면 걸어서 5분도 안 걸리는 거리였지만, 지금은 그 몇 분이 한없이 길게 느껴졌다. 엄마의 숨소리가 점점 거칠어졌다. 나도 숨이 차올랐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분리수거장이 가까워지자 엄마가 헐떡이며 말했다.

“제발, 아직 있어야 할 텐데.”

그 목소리에는 간절함이 가득했다. 나도 속으로 같은 말을 되뇌었다. ‘제발, 제발.’ 헌옷수거함 앞에 그 낡은 갈색 가방이 그대로 놓여 있기를. 그리고 그 안에 아버지가 정말 있다면… 아니, 그건 너무 터무니없는 생각인가? 하지만 금요일 밤의 그 장면이 자꾸만 머릿속을 맴돌았다.


드디어 분리수거장이 눈앞에 나타났다. 재활용장에는 낡은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있는 경비 아저씨가 보였다. 그는 손에 종이컵을 들고 느긋하게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주변에는 재활용 쓰레기 더미가 제법 쌓여 있었고, 헌옷수거함은 그 옆에 덩그러니 서 있었다. 나는 숨을 몰아쉬며 아저씨에게 다가가 다급히 물었다.

“아저씨, 헌옷수거함 앞에 낡은 갈색 가방 보셨어요?”

목소리가 떨렸다. 경비 아저씨는 느릿느릿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보더니, 잠시 생각하는 듯했다.

“헬스기구 아래 놓여있던 그 낡은 가방 말이냐?”

그가 느린 말투로 대답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그 가방이었다. 아버지가 늘 방 구석에 두던, 손때 묻은 갈색 가죽 가방. 아저씨가 말을 이었다.

“아까 청소업체에서 와서 싹 수거해갔지.”


그 말이 끝나는 순간, 내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나는 황급히 주변을 둘러봤다. 분리수거장은 이미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헌옷수거함 앞에는 빈 공간만 남아 있었고, 그 옆에 있던 헬스기구 아래에도 아무것도 없었다. 손에 땀이 차기 시작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엄마를 쳐다봤다. 엄마의 얼굴도 나만큼이나 창백했다.

“왜 그러냐?”

경비 아저씨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무덤덤했다. 나는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아빠가 든 채로 가방을 버려버린 것 같아요.”

말이 나오자마자 스스로도 얼마나 터무니없게 들리는지 깨달았다. 하지만 그게 내가 가진 유일한 단서였다. 아저씨는 잠시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그러냐,” 하고 낮게 중얼거렸다. 그는 뒷짐을 지고 잠시 생각에 잠긴 듯했다. 그러다 갑자기 한 손을 들어 거리 쪽을 가리켰다.

“저 차다! 아까 우리 동 수거했던 차야!”


그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가는 길목에 커다란 쓰레기 수거 차량이 서 있었다. 녹색 차체에 노란 글씨가 적힌 그 차는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엔진 소리가 낮게 윙윙거리며 멀어지는 중이었다. 나는 숨을 삼켰다. 저 차 안에 그 가방이, 그리고 어쩌면 아버지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엄마, 저기야!”

내가 외쳤다. 엄마도 동시에 그쪽을 봤고, 우리는 말없이 눈빛을 교환했다. 그러고는 본능적으로 그 차를 향해 뛰기 시작했다.


발밑에서 자갈이 밟히며 바스락 소리가 났다. 운동화 끈이 풀려 있었지만 신경 쓸 틈이 없었다. 엄마는 앞치마 끝자락을 손에 쥔 채 나와 나란히 달렸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지만, 멈출 수 없었다. 저 차가 멀어지면 모든 단서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우리를 몰아쳤다. 수거차의 뒷모습이 점점 가까워졌지만, 아직도 손이 닿지 않는 거리였다. 나는 이를 악물고 속도를 높였다.

“빨리, 엄마!”

내가 소리쳤다. 엄마의 숨소리가 점점 더 거칠어졌다. 저 멀리 차가 큰 도로로 접어드는 모습이 보였다. 우리는 과연 저 차를 잡을 수 있을까? 아니, 잡는다고 해서 정말 아버지를 찾을 수 있을까? 머릿속이 혼란으로 가득 찼고, 발은 멈추지 않았다.


“거기 멈춰요!”
내 목소리가 거리에 울려 퍼졌다. 쉰 목에서 나온 외침은 바람에 실려 수거차량을 향해 날아갔지만, 차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나는 팔을 흔들며 다시 한 번 소리쳤다. 하지만 엔진 소리만 낮게 윙윙거리며 멀어질 뿐, 내 목소리는 그 소음에 묻혀버렸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발밑의 아스팔트가 뜨겁게 느껴졌고, 다리가 점점 무거워졌다.


옆에서 엄마의 거친 숨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나와 나란히 달리다 어느새 속도가 느려졌다. 나는 고개를 돌려 엄마를 봤다. 그녀는 숨을 헐떡이며 손으로 무릎을 짚고 있었다. 얼굴은 땀으로 번들거렸고, 얇은 카디건이 어깨에서 흘러내리고 있었다.
“엄마는, 여기까지가, 한계인가 보구나.”
엄마가 힘겹게 말을 내뱉었다. 엄마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고, 눈에는 체념과 걱정이 뒤섞여 있었다.
“수아야, 아빠를 부탁한다.”
그 말에 내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엄마가 더 이상 따라올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녀의 부탁은 나를 더 몰아쳤다. 나는 고개를 끄덕일 틈도 없이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뒤를 돌아보니 엄마의 모습이 점점 작아졌다. 거리 한가운데서 허리를 굽힌 채 숨을 고르는 그녀의 실루엣이 아침 햇살에 비쳤다. 앞치마가 바람에 살짝 흔들렸고, 그 모습이 왜인지 마음을 아프게 찔렀다. 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아버지가 저 차 안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나를 앞으로 내몰았다. 발밑에서 운동화 끈이 풀려 덜렁거렸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숨이 목구멍을 찌르며 타들어갔고, 폐가 터질 것처럼 팽팽해졌다.


쓰레기 수거차량은 멈출 기미 없이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아파트 단지를 벗어나 큰 도로로 접어드는 순간, 차는 오히려 속도를 높였다. 녹색 차체가 햇빛에 반사되며 점점 멀어졌다. 나는 이를 악물고 마지막 힘을 짜냈다.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은 거리였지만, 현실은 냉정했다. 차와의 간격은 점점 벌어졌고, 내 다리는 더 이상 속도를 내주지 않았다. 결국 나는 멈춰 섰다. 무릎이 휘청이며 앞으로 쏠릴 뻔했다.


가쁜 숨을 내쉬며 손으로 무릎을 짚었다. 숨소리가 거칠게 귀를 채웠고, 심장이 쿵쿵 뛰며 온몸을 흔들었다. 땀이 이마에서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나는 고개를 들어 멀어지는 수거차를 쳐다봤다. 이제는 손톱만 한 크기로 작아진 그 차가 도로 끝으로 사라질 때까지, 나는 그저 멍하니 서 있었다. 실패했다는 생각이 머리를 채웠다. 아버지를 놓친 걸까? 아니, 애초에 아버지가 저 안에 있었던 게 맞기는 한 걸까? 혼란과 무력감이 밀려왔다.


“빵~”
갑작스런 경적 소리에 몸이 흠칫했다. 뒤에서 다가온 차량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나를 비껴갔다. 나는 깜짝 놀라 도로 한가운데에 서 있다는 걸 깨달았다. 급히 인도로 몸을 끌고 갔다. 인도에 올라서자마자 다시 숨을 몰아쉬었다. 손바닥으로 가슴을 누르며 뛰는 심장을 달래려 했지만, 여전히 진정되지 않았다. 땀에 젖은 후드티가 몸에 달라붙어 있었다. 나는 인도에 주저앉아 잠시 숨을 골랐다.


멀리 수거차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진 도로를 멍하니 바라봤다. 그러다 문득, 차 뒤쪽에 붙은 번호판이 눈앞에 떠올랐다. 달리는 동안 무의식적으로 본 숫자와 글자가 기억 속에서 선명해졌다. 나는 입술을 달싹이며 중얼거렸다.
“67바 0702.”


나는 숨을 헐떡이며 경찰서 문을 밀고 들어갔다. 달리느라 땀에 젖은 후드티가 몸에 달라붙어 축축했고, 운동화 끈은 여전히 풀린 채였다. 경찰서 안은 조용했다. 로비에는 플라스틱 의자가 몇 개 놓여 있고, 벽에 붙은 낡은 포스터가 눈에 들어왔다. 접수대 뒤에 앉아 있던 젊은 남자 경찰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제복은 단정했지만, 표정은 약간 지루해 보였다. 나는 숨을 고를 틈도 없이 접수대 앞으로 다가가 말을 쏟아냈다.
“아저씨, 급한 일이 있어서 그러는데 차량 번호 조회 좀 해주세요.”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숨이 아직 제대로 돌아오지 않아 말끝이 떨렸다. 경찰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나를 쳐다봤다.
“그런 걸로 번호를 조회해줄 수 없단다.”
그의 대답은 단호했다. 목소리에 약간의 피로가 묻어 있었고, 마치 이런 부탁을 자주 듣는 사람처럼 보였다. 나는 당황하며 손을 주머니에 넣었다가 다시 꺼냈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다.


“67바 0702에요.”
내가 다급히 말했다. 번호를 입 밖으로 꺼내자 손이 저절로 떨렸다. 경찰이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나는 숨을 한 번 삼키고 덧붙였다.
“우리 아빠가 산산히 갈려 죽을지도 몰라요.”
목소리가 점점 높아지며 끝에 가서는 울먹이는 소리가 섞였다. 눈앞이 흐려지면서 눈물이 고였다. 경찰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 그는 의자에서 몸을 살짝 앞으로 기울이며 나를 똑바로 쳐다봤다.
“그게 무슨 말이니?”
그의 목소리에 의아함과 약간의 긴장감이 묻어났다. 나를 진지하게 보기 시작한 게 느껴졌다.


나는 숨을 몰아쉬며 눈물을 삼켰다. 로비 한쪽에 있는 테이블로 걸어가며 손짓으로 그를 불렀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따라왔다. 테이블 앞에 앉자 다른 경찰 한 명이 다가왔다. 나이 든 남자였다. 그의 제복에는 주름이 조금 있었고, 얼굴에는 세월의 흔적이 깊게 패여 있었다. 나는 테이블에 손을 올리고, 숨을 고르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빠가 금요일 밤에 가방에 들어가는 걸 봤어요. 낡은 갈색 가죽 가방이에요. 꿈인 줄 알았는데, 오늘 아침에 아빠가 없어졌어요. 엄마가 그 가방을 토요일에 버렸다고 했고, 헌옷수거함에서 수거차량이 가져갔다고 해서 쫓아갔는데… 결국 놓쳤어요.”
말을 쏟아내며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땀과 눈물이 섞여 끈적거렸다.
“그 차 번호가 67바 0702였어요. 아빠가 그 안에 있을지도 모르는데, 지금 수거차량이 가버리면…”
나는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목이 메여 더 이상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젊은 경찰과 나이 든 경찰이 서로를 쳐다봤다. 그들의 표정은 진지했다. 나이 든 경찰이 턱을 살짝 만지며 말했다.
“흐음, 아주 긴급한 상황이군.”
젊은 경찰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
“그런 거라면 조회를 해주어야겠구나.”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덧붙였다.
“더 늦으면 너희 아버지가 가방째로 들어가 산산조각날지도 몰라. 리폼을 위해서 말이지.”
그 말에 나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리폼’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에 강하게 박혔다. 폐기물 처리장에서 가방이 분쇄기에 들어가고, 그 안에 아버지가 있다면… 상상만으로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나는 다급히 말했다.
“그러니까요, 빨리요.”
목소리가 떨렸고,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나는 손등으로 눈물을 닦으며 경찰을 쳐다봤다.


젊은 경찰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그는 접수대 뒤로 가서 컴퓨터 앞에 앉았다.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가 조용한 경찰서 안에 리듬감 있게 울렸다. 나는 테이블에 앉은 채로 그를 바라봤다. 손톱을 물어뜯으며 초조하게 기다렸다. 나이 든 경찰은 내 옆에 서서 팔짱을 낀 채 화면을 힐끔거렸다. 시간이 흐를수록 내 심장은 점점 더 빠르게 뛰었다. ‘제발, 제발.’ 속으로 계속 중얼거렸다. 아버지가 정말 그 차 안에 있다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기를.


몇 분이 지나자 젊은 경찰이 고개를 들었다.
“찾았다.”
그의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화면을 보며 말했다.
“신일산업이구나. 여기서 가까운데야.”


나는 경찰서에서 나온 뒤 휴대폰을 꺼내 지도 앱을 열었다. 손이 살짝 떨렸지만, 주소를 입력하고 ‘신일산업’ 위치를 확인했다. 경찰이 말한 대로 걸어서 10분 거리였다. 숨을 한 번 깊게 들이마시고 발걸음을 뗐다. 땀에 젖은 후드티가 몸에 붙었고, 운동화 끈이 풀려 있었지만 바로잡을 틈은 없었다.


걸으면서 아버지와 그 가방 생각이 머릿속을 채웠다. 금요일 밤, 방 문틈으로 본 장면이 떠올랐다. 꿈인지 현실인지 확실치 않았지만 생생한 그 장면, 지금은 그게 중요한 단서였다. 지도에서 파란 점이 목적지에 가까워질수록 심장이 조금씩 빨리 뛰었다. 드디어 신일산업 사무실 앞에 도착했다. 나는 문 앞에서 망설이지 않고 문을 밀고 들어갔다.


사무실 안에는 중년 남자가 앉아 있었다. 작업복을 입고 휴대폰을 보고 있던 그의 머리는 희끗희끗했다. 내가 들어오는 소리에 그가 고개를 들었다. 나는 곧장 말을 꺼냈다.


“아저씨, 신일산업에서 신룡동 아파트 101호 수거해가셨죠?”


목소리가 약간 떨렸지만, 차분히 물었다. 그는 나를 잠시 쳐다보더니 느릿한 말투로 대답했다.


“그쪽이 우리가 수거하는 아파트이긴 하다만,”


그는 말을 멈추고 나를 다시 봤다. 나는 그의 다음 말을 기다리며 숨을 고르고 있었다. 그가 물었다.


“뭐 때문에 그러니?”


그의 눈에 살짝 불안함이 비쳤다.

나는 잠시 숨을 들이쉬고 나지막이 말했다.


“저희 아빠가 가방에 들어갔는데, 그걸 수거해가셨어요.”


말을 마치자 사무실에 조용한 침묵이 흘렀다. 그는 나를 한동안 쳐다봤다. 내가 한 말이 이상하게 들릴 거란 걸 알았지만, 그게 내가 아는 사실이었다. 잠시 후, 그는 고개를 살짝 숙이고 의자에 몸을 기댔다.


“그거라면 나가서 김주동 기사 아저씨를 찾아보렴.”


그는 담담히 말하며 의자를 빙글 돌렸다. 다시 휴대폰으로 시선을 돌렸다.


나는 그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더 묻고 싶었지만, 여기서 시간을 끌 필요는 없었다. “알겠습니다,”라고 조용히 답한 나는 사무실을 나와 김주동 기사를 찾기 시작했다.


나는 사무실을 나와 신일산업의 작업장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작업장은 사무실에서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 낡은 철제 울타리로 둘러싸인 공간 안에 트럭 몇 대와 폐기물 더미가 어지럽게 쌓여 있었다. 멀리서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낮게 윙윙거렸다. 나는 숨을 한 번 깊게 들이마시며 마음을 다잡았다. 김주동 기사를 찾아야 한다. 그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작업장 한쪽에 작은 흡연장이 보였다. 오래된 컨테이너를 개조한 듯한 공간에 플라스틱 의자와 재떨이가 어설프게 놓여 있었고, 작업복 차림의 기사 몇 명이 담배를 피우며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망설임 없이 그쪽으로 다가갔다. 발밑에서 자갈이 밟히며 바스락 소리가 났고, 그 소리에 기사들이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봤다. 그들의 얼굴에는 피로와 무료함이 묻어 있었다.


“안녕하세요, 아저씨들.” 내가 조심스레 입을 뗐다. 목소리가 살짝 떨렸지만, 최대한 차분하게 말하려 애썼다. “혹시 김주동 기사님이 여기 계신가요?”


기사 중 한 명이 입에 문 담배를 손으로 빼며 느릿느릿 대답했다. “김주동 기사는 저쪽에 있을 텐데.” 그는 턱으로 작업장 반대편을 가리켰다. 그쪽은 트럭이 주차된 곳 너머, 폐기물 처리 기계가 있는 방향이었다. 나는 고맙다는 인사를 얼른 하고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심장이 다시 쿵쿵 뛰기 시작했다. 김주동 기사를 찾으면 뭔가 단서를 얻을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 나를 몰아갔다.


하지만 그곳에 도착했을 때, 김주동 기사는 보이지 않았다. 트럭 옆에는 작업복을 입은 다른 직원이 쓰레기 더미를 정리하고 있었지만, 내가 찾는 사람은 없었다. 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손톱을 살짝 물었다. 불안이 점점 커졌다. ‘어디 있는 거지?’ 속으로 중얼거리며 다시 발걸음을 옮기려던 찰나, 작업장 한쪽에 붙은 작은 화장실 문이 삐걱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한 아저씨가 엉거주춤 바지를 올리며 문 밖으로 나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작업복 상의에 적힌 ‘김주동’이라는 이름 석 자가 흐릿한 조명 아래에서도 선명하게 보였다.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저 사람이구나. 망설일 틈도 없이 나는 큰 소리로 그를 불렀다. “아저씨!”


내 목소리가 작업장 안에 울리자, 그는 깜짝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봤다. 손에는 아직 물기가 묻어 있었고, 바지를 제대로 올리지 못한 상태라 허리춤을 어색하게 붙잡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햇볕에 그을려 거무스름했고, 이마에는 주름이 깊게 패여 있었다. 나는 숨을 몰아쉬며 그에게 달려갔다. 운동화 끈이 풀린 채로 덜렁거렸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김주동 아저씨시죠?” 내가 다급히 물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그의 작업복에서 나는 땀 냄새와 담배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는 잠시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손에 묻은 물을 바지에 대충 닦으며 대답했다. “그렇단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걸걸했지만, 어딘가 무덤덤한 톤이 섞여 있었다.


나는 숨을 한 번 삼키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저희 아버지가 가방에 들어가셨는데, 그걸 아저씨가 수거해가셨어요.” 말이 나오자마자 스스로도 얼마나 터무니없게 들리는지 알았지만, 그게 내가 가진 유일한 진실이었다. 금요일 밤의 그 장면, 낡은 갈색 가죽 가방, 그리고 아버지의 실종. 모든 게 그 한 문장에 담겨 있었다.


김주동 아저씨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 그는 손을 멈추고 나를 빤히 쳐다봤다. 그의 눈썹이 살짝 올라가며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뭐?” 그가 낮게 중얼거렸다.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작업장 안의 기계 소리가 갑자기 더 커진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의 반응을 기다리며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손바닥에 땀이 차기 시작했다.


그는 잠시 침묵하더니, 곤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런 거라면… 우리 사장이랑 얘기를 해보아야겠는데?”


나는 다시 신일산업 사무실 문을 밀고 들어갔다. 나는 문턱을 넘으며 숨을 한 번 깊게 들이마셨다. 김주동 기사가 사장과 얘기하라고 했으니, 여기서 뭔가 해결책을 찾아야 했다.


책상 뒤에 앉아 있던 중년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사무실에서 처음 봤던 그였다. 작업복 차림에 희끗한 머리, 얼굴에는 세월의 흔적이 깊게 새겨져 있었다. 그의 책상 위에는 금색 명패가 반짝이며 놓여 있었다. 명패에는 한자로 된 이름이 또박또박 새겨져 있었는데, 나는 한자를 잘 몰라 정확히 읽을 수는 없었다. 그 옆에는 작은 액자가 눈에 띄었다. 액자 속에는 그의 어린 아들과 딸, 그리고 아내라고 짐작되는 여자와 함께 찍은 사진이 담겨 있었다. 행복해 보이는 미소가 담긴 사진은 이 어두컴컴한 사무실과 묘하게 대조를 이뤘다.


그가 자리에서 몸을 살짝 일으키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손에는 얇은 명함 한 장이 들려 있었다. “노형평이라고 한단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묵직했지만, 어딘가 느긋한 톤이 섞여 있었다. 나는 명함을 받아들고 잠깐 내려다봤다. 깔끔한 글씨로 이름과 직함,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나는 그것을 후드티 주머니에 대충 쑤셔 넣으며 입을 열었다. “한수아라고 해요. 김주동 아저씨가 사장님과 얘기를 해보라고 했어요.” 목소리가 약간 떨렸지만, 최대한 단호하게 말하려 애썼다.


그는 의자에 다시 앉으며 팔짱을 꼈다. “아버지가 가방에 들어가셨다는 이야기는 참 놀랍구나.” 그가 천천히 말을 꺼냈다. 그의 눈썹이 살짝 올라가며 호기심 어린 표정이 스쳤다. “하지만 말이야, 그쪽 아파트는 우리가 수거하기로 되어 있어. 우리에게 온 이상 그 가방은 우리 거란다.” 그의 말투는 담담했지만, 마치 소유권을 주장하는 듯한 단단함이 묻어 있었다.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가슴이 뜨끔했다. 가방이 그들의 것이라니, 그럼 아버지는?


“하지만 그 안에 사람이 있었단 말이에요.” 내가 그의 말을 끊으며 다급히 말했다. “사람을 수거해가신 거잖아요.” 목소리가 점점 커졌고, 끝에 가서는 떨림이 섞였다. 손이 저절로 주먹을 쥐며 책상 위를 내려다봤다. 그의 말이 터무니없게 느껴졌다. 아버지가 든 가방을 그냥 물건 취급하다니, 상상할 수도 없었다.


노형평은 잠시 나를 쳐다보더니,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눈을 가늘게 떴다. 웃음인지 아닌지 모를 미소였다. “사람이라, 알지. 그래도 아버지를 꺼내드리려면 좀 더 정리된 곳에서 얘기하는 게 낫지 않을까? 카페라도 가서 말이야.” 그는 손으로 턱을 살짝 문지르며 말을 이었다. “그럼 이곳에서 가방을 가지고 나가야 할 텐데, 가방은 우리 거라… 그게 참.” 그의 목소리에는 묘한 여유가 깔려 있었다. 마치 이 상황을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그의 표정을 보며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이 사람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그래서요, 얼마를 드리면 되는데요?” 내가 그를 노려보며 쏘아붙였다. 눈썹이 씰룩이며 올라갔고, 목소리에 날이 섰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아버지를 찾는 일이 돈으로 해결될 문제라면, 그게 얼마든 간에 당장 끝내버리고 싶었다. 노형평은 내 반응에 살짝 놀란 듯했지만, 이내 다시 그 느릿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손가락을 까딱이며 말했다. “아버지의 가치를 고려해서… 만구천 원으로 하자꾸나.”


나는 그를 멍하니 쳐다봤다. 그의 눈빛은 여전히 느긋했고, 마치 농담을 던진 것처럼 보였다. 나는 주머니 속에서 지갑을 꺼냈다. 현금은 한 푼도 없었다. 카드 몇 장과 영수증만 덜렁 들어 있을 뿐이었다.


“현금이 없어요.” 내가 작게 말했다. 목소리가 갈라지며 힘없이 나왔다. 노형평은 잠시 나를 바라보더니, 아무 말 없이 손가락을 들어 책상 위 액자 뒤를 가리켰다. 나는 그의 손끝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액자 뒤에 붙은 작은 포스트잇이 보였다. 그 위에는 볼펜으로 쓴 듯한 계좌번호가 적혀 있었다.


나는 결국 만구천 원을 노형평 아저씨의 계좌로 송금했다. 은행 앱에서 계좌번호를 입력하고 확인 버튼을 눌렀다. 송금이 완료되자마자 그는 느릿한 동작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창고로 사라졌고, 몇 분 뒤 낡은 갈색 가죽 가방을 들고 돌아왔다. 가방은 여기저기 긁히고 색이 바랜 모습 그대로였다. 정말 아버지가 이 안에 있을까? 상상만으로도 머리가 어지러웠지만, 이제 가방을 되찾았으니 확인할 차례였다. 노형평은 “잘 확인해보라”며 무덤덤한 목소리로 말한 뒤 다시 의자에 털썩 앉았다. 나는 가방을 들고 사무실을 나왔다.


그의 말대로 근처 카페로 향했다. 신일산업에서 몇 블록 떨어진 곳에 있는 작은 카페였다. 유리문을 밀고 들어가자 커피 향이 공기를 가득 채웠다.


“계산하시고 앉으셔야 해요.” 내가 자리에 가방을 내려놓으려는 순간, 카운터에서 젊은 남자 사장의 목소리가 날아왔다. 그는 앞치마를 두른 채 손에 빈 잔을 들고 있었다. 나는 멈칫하며 가방을 테이블에 살짝 올려놓았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주세요.” 내가 카운터 앞에 서며 말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커피 머신을 조작하기 시작했다. “3,000원이에요.” 그가 무덤덤하게 말했다. 나는 잠시 멈칫하다가 문득 생각난 듯 덧붙였다. “아, 두 잔으로 주세요.” 아버지가 가방 안에 있다면, 혹시 목마플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3일 동안 아무것도 못 먹고 못 마셨을지도 모르니까.



“두 잔 다 아이스죠? 6,000원이에요.” 그가 확인하듯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지갑을 꺼냈다. 카드로 결제한 뒤, 자리로 돌아왔다. 가방은 여전히 테이블 위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나는 숨을 한 번 깊게 들이마셨다. 이제 가방을 열어야 할 때였다.


아버지에게 물어볼 게 너무 많았다. 왜 갑자기 그 가방에 들어간 걸까? 언제부터 그런 이상한 가방을 가지고 있었던 거지? 안에 공간은 좀 넉넉한지, 숨 쉬기는 괜찮았는지. 그리고 만약 그 안에 먹을 게 없었다면, 금요일 밤 이후로 3일 내내 굶었을 아버지가 떠올라 가슴이 살짝 아렸다. 나는 손을 뻗어 가방의 지퍼를 잡았다. 손바닥에 땀이 차 있었고,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지퍼는 오래된 탓인지 약간 뻑뻑했다. 손끝으로 힘을 주자 지퍼가 천천히 옆으로 밀리며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가방 안에서 어두운 공간이 조금씩 드러났다. 지퍼를 끝까지 열자 가방 입구가 활짝 벌어졌다. 나는 숨을 삼키며 안을 쳐다봤다. 카페 안의 따뜻한 조명이 가방 안으로 스며들며 그 안의 비밀을 드러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눈앞에 펼쳐진 건 텅 빈 공간뿐이었다. “이게 뭐야,” 내가 무의식적으로 내뱉었다. 목소리가 작게 떨리며 카페의 조용한 공기 속으로 흩어졌다. 눈이 휘둥그레지며 가방 안을 다시 확인했다. “없잖아…” 그 한마디가 입에서 새어나오자마자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아버지가 없었다. 내가 그토록 쫓고, 찾으려 했던 아버지의 흔적은 이 낡은 가방 안에 존재하지 않았다.


허무함이 밀려왔다. 마치 누군가 내 안의 모든 기대를 단번에 꺼버린 것처럼 몸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손은 여전히 가방 입구를 잡고 있었지만, 힘이 빠져 손끝이 살짝 떨렸다. 지금까지의 모든 노력—수거차를 쫓고, 경찰서에 가고, 만구천 원을 지불했던 그 모든 순간들이 물거품처럼 느껴졌다. 나는 멍하니 가방 안을 바라봤다. 먼지가 살짝 쌓인 안쪽 천과 여기저기 긁힌 가죽만이 눈에 들어왔다. 아버지가 이 안에 있었다는 금요일 밤의 기억은 대체 뭐였던 걸까? 꿈이었나? 아니면 내가 잘못 본 걸까? 머릿속이 혼란으로 뒤엉켰다.


“아메리카노 나왔습니다.” 카운터에서 젊은 사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퉁명스럽지만 무덤덤한 톤이 나를 현실로 끌어당겼다. 나는 고개를 들고 숨을 한 번 깊게 들이마셨다. 정신을 차려야 했다. 가방을 테이블에 그대로 둔 채 카운터로 걸어갔다. 나무 바닥이 발밑에서 삐걱거렸고, 카페 안의 커피 향이 코를 채웠다. 카운터 위에는 내가 주문한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이 쟁반에 담겨 있었다. 얼음이 잔 안에서 반짝이며 녹아내리고 있었다. 나는 쟁반을 들고 자리로 돌아왔다. 손에 든 잔의 차가움이 손바닥을 통해 전해졌지만, 그 냉기가 내 혼란스러운 머리를 식혀주진 못했다.


테이블에 쟁반을 내려놓고 자리에 앉았다. 가방은 여전히 내 앞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나는 한 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차가운 커피가 목을 타고 넘어가며 쓴맛이 혀끝에 퍼졌다. ‘도대체 아빠는 어디로 간 거지.’ 머릿속에서 그 질문이 끊임없이 맴돌았다.


문득, 시선이 다시 가방으로 향했다. 열린 지퍼 사이로 안쪽이 살짝 보였는데, 그때 뭔가 반짝이는 게 눈에 들어왔다. 가방 안 속주머니에서 희미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나는 잔을 내려놓고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손을 뻗어 속주머니를 조심스레 열어봤다. 손끝에 천이 스치며 먼지가 살짝 묻어났다. 주머니 안에서 차가운 금속성 물체가 만져졌다. 심장이 다시 쿵쿵 뛰기 시작했다. 나는 그것을 꺼내 빛 아래로 가져왔다.


휴대폰이었다.



“세컨폰을 쓰고 있었단 말이야?” 아버지가 그런 걸 따로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조용하고 평범했던 아버지가 이렇게 비밀스러운 면을 숨기고 있었다니, 조금 분개하는 마음이 치밀었다.


나는 숨을 한 번 깊게 들이마시고 전원 버튼을 눌렀다. 화면이 깜빡이며 켜지자 잠금 화면이 나타났다. 패턴 입력창이 떠 있었다. 손가락이 저절로 움직여 아버지가 늘 쓰던 패턴을 그리기 시작했다. 집에서 아버지가 휴대폰을 풀 때 몇 번 본 적이 있던 그 단순한 L자 모양이었다. 선이 화면 위를 따라갔다. 하지만 패턴이 완성되자마자 화면이 붉게 변하며 흔들리더니 허물어졌다. “아니잖아?” 내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목소리에 당황한 기색이 묻어났다.


패턴이 안 된다면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나는 화면을 다시 보다가 핀 번호 입력 모드로 전환했다. 작은 숫자 키패드가 화면에 떠올랐다. 뭔가 의미 있는 숫자일 거라는 생각에, 가장 먼저 떠오른 건 내 생년월일이었다. “020117.” 나는 조심스레 숫자를 하나씩 눌렀다. 입력을 마치고 확인 버튼을 누르자, 암호가 양옆으로 흔들리더니 파스스 소리와 함께 사라졌다. 또 틀렸다. “이것도 아니잖아?” 나는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테이블 위의 아메리카노 잔에서 얼음이 녹아내리며 작은 물방울이 맺히고 있었다.


머릿속이 점점 더 혼란스러워졌다. 이번엔 언니의 생년월일을 떠올렸다. 하지만 결과는 또 실패였다. 화면이 흔들리며 경고 메시지가 떴다. 남은 시도 횟수가 줄어들고 있다는 알림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입술을 살짝 깨물며 의자에 몸을 기댔다.


그러다 문득 엄마의 생년월일이 떠올랐다. 나는 숨을 고르며 숫자를 하나씩 입력했다. “740612.” 손끝이 키패드를 누를 때마다 긴장감이 손바닥을 타고 올라왔다. 마지막 숫자를 누르고 확인을 눌렀다. 잠시 정적이 흐른 뒤, 화면이 부드럽게 전환되며 잠금이 풀렸다. 작은 진동과 함께 홈 화면이 나타났다. “됐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중얼거렸다. 심장이 쿵 내려앉는 동시에 안도감이 밀려왔다.


“어떤 비밀을 가지고 있는 거야?” 잠금이 풀린 화면은 아버지의 비밀을 풀 열쇠처럼 느껴졌다. 심장이 여전히 쿵쿵 뛰었고, 손바닥에는 땀이 차 있었다. 나는 숨을 한 번 깊게 들이마시고, 떨리는 손가락으로 화면을 터치해 주소록 아이콘을 눌렀다.


주소록이 열리자 익숙한 이름들이 눈에 들어왔다. 엄마 이름과, 나, 언니가 저장되어 있었다. 그리고 낯선 이름 하나가 튀어나왔다. ‘호천낚시터’.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그 번호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나는 곧바로 ‘호천낚시터’ 번호를 눌렀다. 신호음이 몇 번 울리자 거친 남자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여보세요?” 목소리는 낮고 걸걸했다. 나는 숨을 한 번 삼키고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한수아라고 하는데요.”
목소리가 약간 떨렸지만, 최대한 차분하게 말하려 애썼다. 그러자 그 남자가 갑자기 반색하며 대답했다.
“수아구나? 아버지 여기 있단다. 바꿔줄까?”


나는 얼떨결에 짧게 대답했다.
“네.”


잠시 후, 전화기 너머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낮고 묵직하면서도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우리 딸, 수아니?”
아버지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억눌렀던 감정이 터져 나왔다. 카페 안의 조용한 분위기도 잊은 채 나는 소리를 질렀다.
“어딨어? 당장 들어와!”


목소리가 너무 커서 카페 안에 있던 몇몇 손님들이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봤다. 창가에 앉아 노트북을 보던 남자가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고, 맞은편 테이블의 중년 여성은 커피 잔을 들다 말고 나를 힐끔거렸다. 하지만 그런 시선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아버지가 말했다.
“아빠가 여기 경기도에 와있어서 좀 걸려. 여기 옆에 예쁜 카페가 있는데, 호천카페라고, 여기로 택시 타고 올래?”
그의 목소리는 느긋했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담담했다. 그 여유로운 태도가 오히려 내 속을 더 뒤집어 놓았다.


“어디라고?”
내가 다시 소리를 높였다. 목소리가 카페 안을 쩌렁쩌렁 울렸고, 이번엔 카운터 뒤의 사장까지 고개를 들어 나를 봤다. 손에 들고 있던 빈 잔을 내려놓으며 나를 의아하게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아버지가 다시 차분히 대답했다.
“호천카페야. 아빠가 주소 문자로 알려줄게.”


“아냐, 택시 네비게이션 찍고 가면 돼.”
나는 더 이상 말할 기운도 없이 퉁명스럽게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휴대폰을 테이블 위에 던지듯 내려놓자 쨍 하는 소리가 났다. 손이 부들부들 떨렸고, 가슴 속에서 분노와 안도감이 뒤엉켜 소용돌이쳤다. 아버지가 멀쩡히 낚시터에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그럼 내가 본 금요일 밤의 그 장면은 뭐였던 거지? 가방에 들어가는 모습, 그 생생한 기억은 대체 뭐였던 거야? 머릿속이 혼란으로 가득 찼다.


택시 뒷좌석에 앉아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던 나는 손에 든 아버지의 휴대폰을 다시 열어보았다. 잠금이 풀린 화면을 터치하자 홈 화면이 다시 눈앞에 펼쳐졌다. 배경사진이 먼저 시선을 사로잡았다. 흑백으로 된 오래된 사진이었다. 중학교 졸업식 때 찍은 듯한 모습으로, 어린 시절의 아버지가 교복을 입고 어색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사진 속 아버지는 지금보다 훨씬 마르고 키가 작아 보였는데, 그 옆에는 아버지의 형과 누나—그러니까 큰아빠와 큰고모—가 함께 서 있었다. 두 사람 다 단정하게 차려입고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었지만, 표정은 어딘가 굳어 있었다. 흑백 사진 특유의 분위기 때문인지, 그 장면은 시간 속에 갇힌 듯한 느낌을 주었다. 나는 잠시 그 사진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아버지의 어린 시절을 이렇게 가까이에서 본 적은 처음이었다.


궁금증이 더 커져서 문자 메시지 앱을 열어봤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메시지 목록은 깨끗했다. 스팸 문자들이 대부분이었다. 전형적인 사기성 메시지와, 각종 상업 광고들이 화면을 채우고 있었다. “최신 스마트폰 할인 이벤트!”라거나 “카드 혜택 지금 확인하세요” 같은 내용들뿐이었다.


다음으로 OTT 앱을 발견했다. 아이콘이 눈에 띄길래 눌러봤더니, 놀랍게도 영화 몇 편이 재생 목록에 저장되어 있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인생은 아름다워, 로리타, 시네마천국. 나는 눈을 깜빡이며 제목들을 다시 읽었다. ‘매일 액션 영화만 보는 줄 알았는데, 이런 영화를 본단 말이야?’ 아버지가 주말마다 TV 앞에서 터미네이터나 007 시리즈를 반복 재생하며 좋아하던 모습만 기억에 남아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감성적이고 클래식한 영화를 즐겼다니, 새로운 아버지의 일면을 발견한 기분이었다.


사진 앱으로 넘어갔다. 갤러리를 열자마자 예상 밖의 풍경이 펼쳐졌다. 내 사진은 단 한 장도 없었다. 언니나 엄마 사진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흑백 사진 속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눈에 들어왔다. 낡은 한복을 입고 카메라를 똑바로 쳐다보는 두 분의 모습은 엄숙하면서도 따뜻했다. 그 아래로는 어린 시절의 큰아빠와 큰고모 사진이 이어졌다. 색 바랜 옷을 입고 나무 아래 서 있는 모습, 강가에서 물장난을 치는 장면들이었다. 그리고 최근의 컬러 사진들로 넘어가자, 나이 든 친구들과 함께 산과 계곡에서 찍은 사진들이 갤러리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아버지가 등산복을 입고 친구들과 포즈를 취하거나, 계곡에서 물에 발을 담그고 웃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사진 속 아버지는 밝고 활기차 보였다. 나는 손가락으로 사진을 넘기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언제 이런 데 다녀왔던 거지?”


더 놀라운 건 SNS 앱들이었다. 동호회 목적의 앱과, 사진 기반의 앱, 텍스트 기반의 SNS 앱이 설치되어 있었다. 하나를 열어보니 아버지가 꽤 활발하게 활동 중인 흔적이 보였다. 나는 눈을 비비며 화면을 다시 확인했다. ‘중년들 사이에서도 SNS가 이렇게 활발하구나…’ 새삼 놀라움이 밀려왔다.


하지만 곧 의심이 고개를 들었다. “그래도 수상해. 평소에 휴대폰도 잘 안 보던 사람이, 폰을 두 개나 쓸 이유가 있단 말야?” 나는 손으로 턱을 괴며 생각에 잠겼다. 아버지가 늘 손에 들고 있던 그 낡은 스마트폰은 식탁 위에 충전도 안 된 채 놓여 있었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런데 이렇게 세컨폰을 따로 가지고 다니며 SNS까지 하고 있었다니, 뭔가 숨기고 있는 게 분명했다. 낚시터에 간 것도 그렇고, 금요일 밤 가방에 들어갔던 모습도 그렇고, 모든 게 미스터리였다.


택시 창밖으로 풍경이 점점 한적해졌다. 아파트와 빌딩이 사라지고, 들판과 나무들이 눈에 들어왔다. 네비게이션에서 “목적지까지 5분 남았습니다”라는 기계음이 울렸다. 나는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호천카페가 가까워질수록 심장이 다시 쿵쿵 뛰기 시작했다. 아버지를 만나면 물어볼 게 너무 많았다. 왜 세컨폰을 썼는지, 왜 SNS를 우리에게 숨겼는지, 그리고 무엇보다 금요일 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택시가 속도를 줄이며 목적지 근처에 도착하자, 나는 창밖으로 작은 카페 간판을 발견했다. ‘호천카페’라는 글자가 햇빛에 반짝이고 있었다. 차가 멈추자마자 문을 열고 내렸다. 이제 진실을 마주할 시간이었다.


나는 호천카페의 모습을 처음 마주하고 잠시 숨을 멈췄다. 잔잔하고 넓은 호수가 카페 바로 앞에 펼쳐져 있었고, 물 위로 햇빛이 반사되며 은빛으로 반짝였다. 호수 주변에는 갈대가 부드럽게 흔들렸고, 멀리 나무들이 초록빛으로 우거져 있었다. 나는 잠시 그 풍경에 넋을 잃고 서 있다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우리 아빠 취향이 좋은데?’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가자 싱그러운 식물 냄새가 코를 채웠다. 곳곳에 놓인 커다란 화분들에는 푸른 잎이 무성한 관엽식물이 가득했고, 천장에는 덩굴 식물이 얽혀 내려와 있었다. 테이블 사이사이에는 작은 다육식물들이 장식처럼 놓여 있었고, 벽 한쪽에는 이끼로 만든 초록색 아트월까지 걸려 있었다. 평일이라 손님이 많지 않아 공간은 한적했고, 부드러운 재즈 음악이 낮게 깔리며 분위기를 더했다. 나는 잠시 주변을 둘러보며 감탄을 삼켰다. 이런 곳이라면 나라도 자주 오고 싶을 것 같았다.


눈을 돌리자 금방 아버지를 찾을 수 있었다. 그는 호수가 훤히 보이는 창가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햇빛이 유리창을 통해 그의 얼굴을 비추며 따뜻한 빛을 더했다. 아버지는 낡은 체크무늬 셔츠를 입고 있었고, 늘 보던 그 소박한 모습 그대로였다. 내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소리를 들었는지, 그가 뒤를 돌아 나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수아야!” 그의 목소리는 밝고 경쾌했다. 손을 흔드는 모습에서 낯선 활기가 느껴졌다. 나는 그 웃음에 잠시 멈칫했지만, 곧 그의 테이블로 걸음을 옮겼다.


아버지 앞에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이 놓여 있었다. 잔 위에 얹힌 얼음이 천천히 녹으며 투명한 유리벽에 물방울을 맺고 있었다. 그가 나를 보며 말했다. “여기 아메리카노가 맛있어.” 나는 의자에 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대답은 짧았지만, 마음속으로는 여전히 혼란이 가라앉지 않았다. 아버지가 이렇게 느긋하게 커피를 마시고 있을 동안, 나는 그를 찾아 헤매며 수거차를 쫓고 경찰서까지 다녀왔다. 그 대조적인 상황이 속에서 부글부글 끓었다.


자리에 앉은 순간, 문득 허전함이 느껴졌다. 손을 내려다보니 가방이 없었다. 그 낡은 갈색 가죽 가방, 내가 이틀 넘게 쫓아다니며 되찾은 그 물건이 사라진 것이다. 나는 당황하며 기억을 더듬었다. 택시 안에 두고 내린 걸까? 아니면 신일산업에서 카페로 오는 길에 어디 떨어뜨린 걸까? 아니면 아까 내가 앉았던 그 카페에 놓고 온 걸까?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하지만 아버지가 눈앞에 앉아 있는 지금, 그걸 굳이 꺼낼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 짐짓 모른 척하며 입을 열었다.



“어떻게 된 거야? 아빠가 금요일에 가방에 들어가는 걸 봤어.”
내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아버지는 내 말에 당황한 기색 없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나를 쳐다봤다. 그의 눈빛은 차분했고, 입가에는 미소마저 살짝 걸려 있었다. “그건 아빠가 할아버지랑 하던 놀이야.” 그의 대답은 느긋했다. 나는 그 말에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더 듣기를 기다렸다.


“할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잖아. 아빠가 할아버지한테 물려받은 물건이야. 그 가방 외에는 할아버지 사진이랑 은반지를 받았지.”
아버지가 말을 이어갔다. 나는 그의 비어 있는 검지 손가락을 자연스레 쳐다봤다. 그 손가락에 늘 끼워져 있던 은반지는 이제 엄마 손에 있었다. 몇 년 전 엄마가 “이거 내가 낄게”라며 아버지에게서 가져갔던 기억이 떠올랐다. 아버지는 손가락을 살짝 움직이며 말을 이었다.
“아빠가 아주 꼬마였던 시절에, 할아버지가 그 가방에 아빠를 넣는 놀이를 했어. 아빠는 그 가방 안에 쏙 들어갔단다. 그럼 할아버지가 가방을 잠그겠다고 장난을 치셨지. 그러면 할머니가 들어와서 ‘우리 예쁜 새끼를 왜 가방 안에 넣냐’며 할아버지를 타박하곤 했어.”


아버지의 눈이 깊어졌다. 그 안에는 어린 시절의 추억이 담겨 있는 듯했다. “할아버지가 관에 들어가시고 많이 울었어. 그 이후에 가끔 할아버지, 할머니가 생각날 때 그 안에 들어가본단다. 물론 이제는 발 하나 들어갈 정도밖에 되지 않지만, 그래도 그러고 나면 혹시나 할아버지가 가방을 잠근다고 장난을 치지 않을까, 뒤에서 할머니의 목소리가 다시 들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지.”

아버지는 나를 보며 방긋 웃었다. 그 미소 속에서 어린 시절의 아버지가 잠시 스쳐 지나갔다.


“그럼 주말 내내 어디 있었어? 엄마가 그 가방 버렸어.”
내가 다시 물었다. 아버지는 살짝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현주가 그걸 보기 전에 내가 잘 숨겨놓았어야 했는데.”
아버지는 늘 엄마를 이름으로 불렀다.
“주말에 낚시터 간다고 한 달 전에 말하지 않았니? 월요일에는 휴가를 내고 말이야.”


그제서야 기억이 떠올랐다. 몇 주 전, 가족 메신저방에서 아버지가 “낚시터 간다”며 툭 던지듯 말했던 적이 있었다. 내가 과제에 치여 정신없을 때라 대충 보고 넘겼던 메시지였다. “회사 단체 휴가거든.” 아버지가 덧붙였다. 나는 입을 다물고 창밖 호수를 바라봤다. 잔잔한 물결이 햇빛에 반사되며 반짝였다. 이 모든 소동이 엄마와 나의 오해에서 비롯된 거라는 사실이 서서히 머릿속에 스며들었다.


“호수가 참 예쁘구나.”
아버지가 말했다. 나는 고개를 돌려 아버지를 쳐다봤다. 그의 입가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28년간 가장으로 살아온 아버지였다. 이제 얼굴에는 주름이 깊게 패이고, 머리카락은 희끗희끗해졌지만, 지금 이 카페에 앉아 있는 그의 표정은 달랐다. 내가 한 번도 보지 못한 젊은 시절의 아버지, 자유롭고 편안한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그 미소에 나도 모르게 마음이 풀렸다.
“그나저나 이렇게 딸이랑 오랜만에 카페를 오니까 참 좋구나. 우리 앞으로 주말에 한 번씩 올까? 너희 엄마에겐 네가 말하고 말야. 내가 말하면 안 된다고 할 거야.”
아버지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나는 그제서야, 아빠에게 할 마지막 질문이 생각났다. “아빠, 그리고 폰이 두 개더라? 무슨 목적이야?”

나는 궁금했던 그 점을 꺼냈다. 아빠는 잠시 눈을 깜빡이더니 피식 웃었다.
“그거 수아 네 옛날 폰이잖아. 새 폰으로 바꾼다고 아빠가 써도 된다고 네가 그랬는데. 기능은 아직도 멀쩡하더구만.”

keyword
월, 화, 수, 목, 금, 토, 일 연재
이전 08화실ㅎ증 (공포 점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