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실ㅎ증 (공포 점수 : ★☆☆☆☆)

APFASIA

by 미히

어느 눅눅한 오후, 나는 병원 진찰실에 앉아 있었다. 창밖으로 비가 내리지는 않았지만, 하늘은 회색빛으로 무겁게 내려앉아 마치 내 마음을 짓누르는 듯했다. 의사의 하얀 가운은 어쩐지 빛을 잃은 것처럼 보였고, 안경 너머 눈빛에는 미묘한 연민이 스며 있었다. 그는 손에 든 차트를 내려다보며 나지막이 입을 뗐다.


“실ㅎ증에 걸리셨습니다.”


“실… 뭐요?”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 낯선 단어가 귀에 맴돌았지만, 혀끝에서 제대로 맺히지 않았다. 마치 바람에 흩어지는 먼지처럼 잡히지 않는 소리였다.


“실ㅎ증입니다.” 의사는 차분히 말을 이었다. “말 그대로 ‘ㅎ’ 발음을 잃게 되는 병이에요. 신경계의 미세한 이상으로, 특정 음절을 내뱉는 능력이 손실되는 증상이지요. 드물진 않습니다만, 환자분께는 생소할 수도 있겠네요.”


나는 그의 설명을 들으며 머릿속으로 ‘ㅎ’ 소리를 떠올려 보았다. ‘하’, ‘히’, ‘헤’… 익숙했던 음절들이 뇌 안에서 선명하게 떠올랐지만, 입을 벌려 소리를 내뱉으려는 순간, 그들은 안개처럼 사라졌다. “하…” 나는 숨을 깊이 들이쉬고 힘껏 발음을 시도했지만, 입안에서 맴도는 건 공허한 공기의 떨림뿐이었다. ‘하’라는 단순한 소리조차 내게서 멀어져 갔다. 가슴이 답답해졌다.


“왜…” 나는 질문을 던지려 했으나, 말이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왜 하필 나지?’라는 물음이 목구멍에 걸린 채 나오지 못하고, 대신 무거운 침묵만이 방 안을 채웠다. 의사는 내 혼란스러운 표정을 읽었는지,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생각보다 흔한 질병입니다. 현대인의 삶에서 자주 나타나죠. 반복되는 일상, 억눌린 감정… 그런 것들이 신경을 무디게 만들고, 결국 이런 증상을 낳는 겁니다.”


‘흔하다고?’ 나는 속으로 반문했다.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병명이었다. 그러나 그의 말은 묘하게 납득이 갔다. 매일 같은 거리를 걷고, 같은 얼굴들을 마주하며, 웃음조차 잊고 살아온 나에게 어울리는 병 같았다. 어쩌면 내 삶이 ‘ㅎ’를 잃어버린 지 오래였을지도 모른다.


“치료법이 있나요?” 나는 간신히 목소리를 쥐어짜 물었다. 목이 바짝 마른 탓에 말이 거칠게 튀어나왔다.


의사는 잠시 뜸을 들이다 대답했다. “일상에서 벗어나는 게 가장 좋습니다. 여행을 추천드려요. 해외로 떠나 낯선 공기를 마시고, 새로운 풍경 속에서 잃어버린 감각을 깨워보세요.”


“저는 그…” 나는 ‘해외’라는 단어를 꺼내려 했지만, 역시 ‘ㅎ’가 빠진 채 “애외…”로 끝나버렸다. 나는 한숨을 삼키며 말을 이었다. “대부분의 외국은 이미 다 다녀봤습니다. 유럽의 골목길부터 아시아의 시장까지… 더 갈 곳이 없어요.”


의사의 얼굴에 난감한 기색이 스쳤다. 그는 안경을 고쳐 쓰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더니 다른 제안을 꺼냈다. “그렇다면 웃어보는 것도 방법입니다. 단, 억지로 짜낸 미소가 아니라, 허파가 들썩이고 온몸이 진동할 정도의 진짜 웃음이어야 해요.”


그는 시범이라도 보이듯 크게 웃어 보였다. “하하하!” 그의 웃음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그 소리는 내게 잃어버린 ‘ㅎ’의 메아리처럼 들렸고, 한편으로는 낯설게 느껴졌다. 나는 뚱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웃음이라니, 내게는 먼 나라의 언어처럼 생소한 것이었다.


“환자분은 잘 웃지 않는 스타일이신가 보군요.” 의사가 머쓱하게 웃으며 말했다. “사실 이 병은 그런 분들에게 더 흔합니다. 웃음이 부족한 삶이 신경계를 굳게 만들죠. 다른 방법도 있습니다. 약물 치료를 해보는 겁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약이라면, 억지로라도 이 묘한 병을 떨쳐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스쳤다. 의사는 책상 서랍을 열어 작은 빨간 알약 하나를 꺼냈다. 그것을 물컵과 함께 내밀며 말했다.


“이 약을 드세요. 단, 부작용으로 당분간 환각이 보일 수 있습니다. 모두 환자분을 웃게 만들기 위한 과정이니 놀라지 마세요. 내일 다시 오십시오.”


나는 망설임 없이 약을 입에 넣고 물을 들이켰다. 알약은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며 묘한 열기를 남겼다. 병원을 나서자, 익숙한 거리가 눈앞에 펼쳐졌다. 회색빛 건물들 사이로 사람들의 발걸음이 반복되고, 공기는 늘 그렇듯 퀴퀴했다. ‘똑같은 하루하루인데, 도대체 어떻게 웃으라는 거지?’ 나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그때, 옆을 스쳐 지나가는 한 남자의 손에 기묘한 음료가 들려 있었다. 투명한 플라스틱 컵 안에서 뜨거운 커피와 라면 면발이 뒤엉켜 있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그 광경에 나는 놀라 물었다. “저기요, 지금 그게 뭐죠?”


그는 빨대인 줄 알았던 나무젓가락을 반으로 쪼개 면발을 집으며 태연히 대답했다. “이거요? 커라면이에요. 커피 맛 나는 라면이죠. 우유 커피 맛도 있어요. 요즘 유행이에요.” 그의 표정은 마치 당연한 것을 묻는 나를 의아해하는 듯했다. 나는 속이 울렁거렸다. 이게 그 환각이란 걸까?


큰 거리로 나오자 더 황당한 광경이 펼쳐졌다. 사람들이 팬티를 패션 아이템처럼 머리 위에 쓰고 걸어가고 있었다. 유명 브랜드 로고가 새겨진 화려한 팬티들이 바람에 나부꼈다. 한 여자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이게 최신 트렌드예요. 머리끈 대신 팬티가 최고죠. 실용적이잖아요.” 나는 어이가 없어 중얼거렸다. “이런 걸로 날 웃게 만들겠다고?”


그 길로 직장으로 향했다. 나는 인형탈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평소처럼 입구에서 사람들에게 어색한 인사를 건네고, 탈의실로 가려는데 상사가 나를 붙잡았다. 놀랍게도 그의 얼굴은 병원 의사와 똑같았다. 그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이걸 깜박했네.”


그가 내민 건 갈색 알약이었다. “이게 뭔데요?” 내가 묻자, 그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자네 업무잖아. 사람들 앞에서 웃음을 주는 일.” 나는 망설였지만, ‘일이라면 해야지’라는 생각에 알약을 삼켰다. 쓴맛이 입안에 퍼졌다.


탈의실에 들어가 옷을 갈아입으려는 순간, 몸에서 이상한 변화가 시작되었다. 손등에서 검은 털이 돋아나더니, 순식간에 온몸을 뒤덮었다. 거울 속 내 모습은 내가 연기하던 인형탈 괴물 그 자체였다. 털투성이 몸, 우스꽝스러운 눈, 괴상한 입. 나는 당황하며 소리쳤다. “이게 뭐야?”


그때 커튼이 걷히며 동료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나를 보며 배꼽을 잡고 웃었다. “평소에 인형탈 갈아입기 귀찮다고 투덜대더니, 이젠 갈아입을 필요도 없겠네!” 그들의 웃음소리가 귀를 찔렀다. 나는 울상을 지었다. 이 모든 게 그 의사의 계략임을 직감했다.


나는 탈의실을 뛰쳐나와 상사를 붙잡고 애원했다. “잘못했어요, 제발. 다 없던 일로 해주세요.” 그 순간, 눈앞이 흐려지며 나는 의사의 집무실에서 눈을 떴다. 의사가 부드럽게 말했다. “치료가 끝났습니다. 이제 ‘ㅎ’ 발음이 잘 나오시죠?”


“후…” 나는 한숨을 내쉬어보았다. 놀랍게도, ‘ㅎ’ 소리가 자연스럽게 새어 나왔다. “하… 하하…” 나는 조심스럽게 웃음을 흉내 내 보았다. 입술 사이로 빠져나오는 소리가 어색하면서도 따뜻했다.


의사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실ㅎ증 치료에 웃음이 좋은 약이긴 하지만, 때로는 극한의 상황을 가정해보는 것도 효과적입니다. 지금 자신이 얼마나 행복한지 깨닫게 해주죠.” 그는 ‘행’ 자를 강조하며 눈을 찡긋했다.


나는 병원을 나와 거리로 나섰다. 사람들이 평범하게 아메리카노를 들고 지나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커라면을 먹는 세상이 아니라서 다행이야.’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일 시작 전, 카페에 들러 따뜻한 음료를 주문했다.


“헤이즐넛 라떼, 핫으로요.” 목소리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ㅎ’가 내게 돌아왔다. 나는 잔을 손에 쥐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회색 하늘이 조금씩 맑아지고 있었다. 어쩌면 내 마음도 그럴지 모른다.

keyword
월, 화, 수, 목, 금, 토, 일 연재
이전 07화베터리 주식회사 (공포 점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