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역은 다음 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내리실 문입니다.”
지하철 안에서 들려오는 안내 방송에 나는 귀를 의심했다. 평소와 다른 어색한 문장에 잠시 멍하니 앉아 있다가, 곧이어 “출입문 열립니다”라는 말에 호기심이 발동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문밖으로 나가자, 승강장은 고요했다. 나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내리는 승객도, 기다리는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열차 안의 사람들은 무심한 표정으로 창밖을 바라보거나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며, 이 정체불명의 “다음 역”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출입문이 닫히고, 열차는 부드럽게 출발하며 나를 홀로 남겨두었다. 승강장 벽에는 커다란 글씨로 “다음 역”이라고 적혀 있었다.
‘나가는 곳’이라는 안내판을 따라 화살표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발소리가 텅 빈 공간에 메아리쳤다. 곧 계단이 나타났다. 올라가며 계단 수를 세어보니 정확히 28개였다. 계단 끝에 대합실이 나왔고, 그곳에는 단 하나의 회전식 개찰구가 있었다. 개찰구 너머로 역무원실이 어렴풋이 보였다. ‘저기로 가면 이곳에 대해 뭔가 알 수 있을지도.’ 나는 개찰구 앞에 섰다. 그런데 이상했다. 회전식 개찰구는 종이로 만들어져 있었고, 에어컨 바람에 나풀거렸다. 옆 공간은 텅 비어 있었지만, 지하철에서 개찰구를 통과하는 게 당연한 일이라 생각하며 교통카드를 가져다 댔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손으로 살짝 건드리자 “바스락” 소리와 함께 종이 날개가 움직였다. 결국 손으로 날개를 돌려 통과했다.
역무원실에 들어서자, 낡은 의자에 도마뱀이 앉아 있었다. 초록빛 비늘이 빛나는 그 존재는 나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어떻게 오셨죠?” 나는 잠시 당황했지만 침착하게 물었다. “다음 역이라고 해서 내렸는데, 여기서 나가면 어디로 가죠?” 도마뱀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여기엔 나가는 길이 없어요. 유일한 방법은 ‘다음 역’의 다음 역으로 가는 거죠. 이곳은 지하철의 내부 세팅만을 담아놓은 세계니까요.” 그가 한쪽 화면을 가리켰다. 화면 속에는 계단 5개와 그 위에 놓인 안내판이 보였다. 안내판에는 ‘/* 현재 구현 중 */’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나는 그 문구를 한참 바라보다 물었다. “도대체 여긴 어디죠?”
도마뱀은 침착하게 설명했다. “여긴 ‘다음 역’이에요. 지하철에 응당 존재해야 할 것들을 구현해놓은 곳이죠. 세계의 모든 지하철역은 이곳을 참고로 만들어집니다.” 내가 종이 개찰구를 언급하자 그는 덧붙였다. “핵심 개념만 구현하면 충분해요. 모두가 그걸 보고 개찰구라 떠올리면 그걸로 된 거죠. 여기에 무언가를 놓으면, 세계의 모든 지하철이 그에 맞춰 변형됩니다.” 나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 “이런 곳이 존재한다니 놀랍군요.”
도마뱀이 예시를 보여주겠다며 한쪽을 가리켰다. “저기 쓰레기통 보이시죠?” 둥근 철제 통이 눈에 들어왔다. “저게 쓰레기통인 이유는 아래가 막혀 있고, 위가 뚫려 있기 때문이에요. 게다가 제가 먹고 버린 단백질 바 껍질이 항상 들어있죠.” 가까이 가서 들여다보니 과자 껍데기가 있었다. 도마뱀이 말했다. “그걸 가져와서 뒤집어보세요.” 나는 통을 들어 뒤집었다. 껍질이 바닥에 떨어졌다. “이제 이건 의자예요. 위가 막혀 있고, 앉기에 튼튼하죠.” 나는 그 위에 앉아보았다. 정말 편안했다.
도마뱀이 이어 말했다. “당신이 한 행동으로 세계의 모든 지하철에서 쓰레기통이 사라졌어요. 저건 이 역의 유일한 쓰레기통이었으니까.” 나는 깜짝 놀라 물었다.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친다고요?”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의 무언가가 바뀌면 전 세계 지하철이 즉시 반영돼요.” 나는 불안해졌다. “그럼 지하철이 쓰레기장이 되지 않을까요?” 도마뱀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럴 가능성은 낮아요. 정책이 바뀌거나 직원이 늘어나겠죠. 하지만 지하철 안에 ‘쓰레기통’을 두는 생각은 아무도 못 해요. 이곳에 그 개념이 없으니까요.”
“천재가 아이디어를 떠올릴 수도 있잖아요?” 내가 반박하자, 그는 단호히 말했다. “아뇨. 인간은 ‘모방’하는 존재로 정의된 세계가 따로 있어요. 그 제약이 풀리지 않는 한 불가능하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의자를 원래대로 돌리고 껍질을 다시 넣었다. 도마뱀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다시 쓰레기통이 생겼군요.”
시계를 보니 출근 시간이 한 시간이나 지났다. “지각 소명을 해야겠네요. 지하철 지연증명서 발급해줄 수 있나요? ‘지하철 오작동으로 다른 경로 진입’ 사유로요.” 도마뱀은 테이블에서 증명서를 꺼내 사유를 적어 주었다. 나는 그것을 받아 역무원실을 나섰다. 뒤에서 그가 말했다. “인간이 여기 오는 건 드문 일이에요. 우연이 세 번 겹쳐야 가능한 곳이죠. 오신 김에 뭔가를 바꿔보세요.”
지하철로 돌아가는 길, 종이 개찰구를 다시 보았다. 잠시 고민하다가 나는 그것을 구겨 작은 공으로 만들어 가방에 넣었다. 이곳을 떠나며 문득 궁금해졌다. 내가 방금 세계의 모든 개찰구를 어떻게 바꿔놓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