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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꿈

파묘 후, 화장 전 날. 할아버지가 나를 찾아왔다

by 미히 Mar 17.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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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2시, 나는 깊은 잠에서 문득 깨어났다. 침실은 어둠에 잠겨 있었고, 창밖에서 들려오는 바람 소리만이 고요를 깨트렸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며 머릿속을 스쳐간 생각은 단 하나였다—세탁기. 어젯밤 빨래를 돌리다 그대로 잠들어버린 것이다.


맨발로 차가운 바닥을 밟으며 세탁기가 있는 베란다로 향했다. 세탁기는 묵묵히 임무를 마치고 멈춰 있었고, 나는 젖은 빨래를 꺼내 건조대에 하나씩 널었다. 손끝에 닿는 축축한 감촉과 함께 졸음이 다시 몰려왔다. 시계를 보니 새벽 3시가 조금 넘은 시간. 오전 5시에 일어나 출근해야 했기에, 나는 다시 침대에 몸을 뉘였다. 눈을 감자마자 의식이 스르륵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꿈속에서 나는 낯선 공간에 서 있었다. 작은 예배당이었다. 나무 의자들이 빽빽하게 늘어서 있었지만, 공간은 텅 비어 있었다. 먼지 낀 공기 속에서 고요가 무겁게 내려앉아 있었고, 창문 너머로 스며드는 빛은 흐릿하고 희뿌옇게 퍼져 있었다.


설교대 옆에 작은 부속실이 눈에 들어왔다. 문이 살짝 열려 있었고, 그 틈으로 미약한 빛이 새어 나왔다. 호기심에 이끌려 다가가 안을 들여다보니, 뜻밖의 광경이 펼쳐졌다. 방 안 가장 깊숙한 곳에 2단 타워형 세탁기와 비슷한 기구가 놓여 있었다. 둥근 유리창이 달린 그 기구 안에는 작은 꼬마 아이가 들어앉아 있었다.


꿈이어서인지 나는 그 기묘한 장면에 별다른 놀라움을 느끼지 못했다. 현실이라면 당황했을 테지만, 꿈속의 나는 그저 관찰자로서 묵묵히 서 있었다. 아이는 꼼짝없이 기구 안에 갇혀 있었고, 나는 그저 그 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때, 갑작스레 둔탁한 소리가 고요를 깼다.

‘쿵쿵쿵.’

꼬마 아이가 동그란 유리창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의 얼굴은 일그러져 있었고, 공포와 절망이 뒤섞인 눈빛이 나를 향해 있었다. 기구 안에서 붉은 불길이 치솟기 시작했다. 아이는 눈물을 흘리며 울부짖었다.

“꺼내줘, 꺼내줘, 꺼내줘!”


그 외침은 날카로운 칼처럼 꿈속의 공기를 찢었다. 불길은 점점 거세졌고, 기구 안은 뿌연 수증기로 가득 찼다. 소년의 괴로운 음성은 점점 더 커져갔다. 나는 얼른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예배당은 여전히 텅 비어 있었고, 나 말고 그를 도울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선뜻 나설 마음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비명을 외면하고 싶은 마음이 스며들었다. ‘누가 내 모습을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나가자.”


옆에 앉아 있던 애인에게 말했다. 언제부터인가 애인이 내 곁에 있었다. 그녀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고, 우리는 예배당을 빠져나왔다. 문을 닫는 순간, 소년의 울음소리가 멀어지며 꿈의 풍경이 흐려졌다.


꿈은 끊임없이 변했다. 예배당을 떠난 후, 나는 끝없는 풍경 속을 떠돌았다. 어느 순간 어린 소녀가 나타났다. 그녀는 말없이 앞장서 걸었고, 나는 무심코 그녀를 따라갔다. 소녀의 뒷모습은 어딘가 익숙했지만, 그 정체를 떠올릴 새도 없이 꿈은 또 다른 장면으로 넘어갔다.


그러다 문득, 세탁기 속에 갇힌 소년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의 울부짖음, 불길, 그리고 그를 외면한 내 모습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가슴 한구석이 묵직해졌다. 무언가 중요한 것을 놓친 기분이었다. 나는 더 이상 방황할 수 없었다. 발길을 돌려 처음의 예배당으로 돌아가기로 마음먹었다.


꿈속의 시간과 공간은 뒤틀려 있었다. 나는 몇 개의 풍경을 지나고, 기억의 파편들을 헤치며 간신히 예배당에 도착했다. 문을 열자 낯익은 고요가 나를 맞았다. 설교대와 의자들은 그대로였고, 부속실 문은 여전히 열려 있었다. 나는 망설임 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부속실은 을씨년스러웠다. 세탁기를 닮은 기구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지만, 불길은 사라지고 없었다. 둥근 유리창 안을 들여다보니, 속은 검은 재로 가득 차 있었다. 창문 안쪽에는 습기가 맺혀 있었고, 그 습기가 지워진 자리에 숫자가 선명하게 드러났다.


17


숫자를 본 순간,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머리가 어지러웠고, 꿈에서 깨어날 것 같은 두려움이 밀려왔다. 나는 정신을 붙잡기 위해 숨을 깊게 들이쉬며 시야를 천천히 옆으로 돌렸다. 그러자 또 다른 숫자들이 하나씩 나타났다.


8, 45, 28, 3, 11


소년이 죽어가며 자신의 재를 묻혀 창에 새긴 숫자들이었다. 그 필사적인 흔적은 꿈속의 세계를 흔들었다. 풍경이 점점 흐려지며 의식이 멀어져갔다. 나는 마지막으로 숫자들이 1에서 45까지의 범위에 속하며 서로 겹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나는 꿈에서 깨어났다.


어두운 침실이었다. 숨을 몰아쉬며 벌떡 일어난 나는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손이 떨리는 가운데, 꿈에서 본 숫자들을 적었다.


17, 8, 45, 28, 3, 11


숫자를 기록하자 마음이 조금 진정되었다. 나는 다시 베개에 머리를 묻고 잠에 빠졌다.


다음 날 아침, 아버지에게서 전화가 왔다.

“파묘 잘 끝났고, 할아버지와 할머니 화장했어.”

아버지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내 가슴은 묘한 울림으로 흔들렸다. 꿈속의 소년과 소녀가 떠올랐다. 그들이 할아버지와 할머니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불길 속에서 울부짖던 소년, 그리고 나를 이끌던 소녀—그들은 나에게 무언가를 전하려 했던 걸까?


저녁에 애인을 만났다. 그녀와 식탁에 마주 앉아 나는 꿈 이야기를 꺼냈다.

“나 꿈 꿨다. 내 꿈 사갈래?”

애인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꿈에서 본 숫자들을 말해주었고, 그녀는 그 번호로 로또를 두 묶음, 각 7장씩 샀다. 그러더니 한 묶음을 내게 내밀었다.

“너도 같이 해봐.”


그 주 로또 결과가 발표되었다. 나는 3등에 당첨되었다. 꿈에서 본 6개 숫자 중 5개가 맞았고, 나머지 하나는 보너스 번호였다. 상금은 크지 않았지만, 꿈의 의미를 곱씹게 만드는 결과였다.


나는 생각했다. 꿈 속에서 6개의 숫자가 아니라 보너스 번호까지 7개의 숫자를 봤어야 했다고. 마지막 11은 7개 숫자를 6개로 보려고 한 탓에 발생한 디코딩 오류가 아니었을까, 라고.


* 작가의 실화를 바탕으로 각색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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