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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5시 반 낙동탕

<지옥탕>을 읽고

by 니나

매주 일요일 5시 반에 엄마는 나와 동생을 흔들어 깨웠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즈음까지 엄마와 나와 남동생은 매주 일요일 새벽 5시 반에 목욕탕에 갔다. 낙동탕이다.






만복식육점 사장님이던 엄마는 하루도 쉬지 않고 식육점 문을 열었다. 일요일도 어김없이 식육점은 아침 7시부터 문을 열었다. 식육점 문을 열기 전에 목욕을 마쳐야 했기에 엄마는 매주 그 꼭두새벽에 우리를 깨웠다. 우리는 떠지지도 않는 눈을 억지로 뜨고 겨우 옷을 입고 집에서 나섰다. 그나마 여름은 해가 떠 있어서 일어날만했다. 하지만 겨울에는 그 시간이 아직 한밤중 같았다. 왜 이렇게 한밤중에 나를 깨우는 건지 모르겠다 원망하며 내복 위로 억지로 옷을 껴입고 외투를 입고 엄마를 따라나섰다. 화가 난 마음에 툴툴거리고 길가에 돌멩이도 걷어차면서 질질 끌려갔다. 내가 많이 화났다는 걸 보여주면 다음 주는 면제권을 얻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낙동탕으로 향하는 컴컴한 길에는 우리 셋 뿐이었고 어둠 속에서 돌 걷어차는 소리와 남동생이 입김을 만들며 노는 ‘호호’ 소리뿐이었다.


그 시간에는 목욕탕 3층에 사시던 주인아주머니도 아직 내려와 계시지 않을 때가 많았다. 그런 날은 3층으로 올라가 출근 준비하시는 아주머니를 재촉해 목욕탕 문을 열어달라 부탁했다. 아직 물도 채워지지 않은 텅 빈 목욕탕을 본 적이 있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우리는 매주 텅 빈 목욕탕에 들어가 온수와 냉수를 틀고 탕의 물 온도를 알아서 맞추고 첫물에 들어갔다. 목욕탕에서 유일하게 비어있지 않은 곳은 우리의 놀이터, 목욕탕의 핫플레이스, 냉탕뿐이었다.



목욕탕에서 놀다 보면 집집마다 목욕의 순서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의 순서는 의자와 대야, 바케스를 하나하나 비누로 씻고 물로 헹구는 것이다.

그다음은 몸에 물을 끼얹고 비누칠해 깨끗이 씻기. 머리 감기.

그러고 나서야 뜨거운 온탕에 들어가 때를 불린다.

내 발은 냉탕을 향하지만 엄마는 “20분 동안 때 불리고 나서!”하셨다.

엄마가 시원하다고 들어가는 그 뜨거운 온탕이 나에게는 지옥탕이었다.

숨이 턱턱 막혀 물 밖으로 나오면 엄마는 “참아. 아직 시간 남았잖아. 더 있어야 때가 불지.” 하셨다.

그러다 보면 하나, 둘 목욕탕이 사람들로 채워진다.

그때부터 탕에 있는 동안 대야와 의자, 바케스를 지키기 위한 눈치전이 시작된다.

대야와 바케스를 겹쳐 의자 위에 둔 다음 목욕바구니 얹어두기. 물건 하나하나에 비누며 때밀이 넣어두기. 아예 온탕 손 닿는 곳에 의자와 바케스 두기.


아이들은 바케스를 두 개 겹쳐 바케스 튜브를 만들어 냉탕에서 수영을 시작한다.

이제 막 냉탕에서 놀려고 온탕에서 나오던 나는 “때 밀러 와.” 하는 엄마의 말에 끌려간다. 엄마는 “너는 밀어도 밀어도 때가 나오네. 아주 힘들어 죽겠다.” 하시며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처럼 때를 미셨다. 남동생은 별로 때도 안 나오는데 말이다.

엄마는 목욕탕에서 만난 마음 맞는 아줌마들끼리 등 때 밀어주기 품앗이를 하셨다. 어쩌다 그런 아줌마가 없을 때 엄마 등 밀어주기는 내 몫이었다. 엄마등을 밀고 또 밀어도 “겨드랑이 아래도 밀어라. 저기 목 뒤도 밀어라. 물 한번 뿌리고 다시 한번 더 밀어라.” 하셨다. 그때마다 나는 팔이 떨어져 나가는 듯 했다. 냉탕에서 노는 아이들을 보면 나도 빨리 냉탕에 가고 싶어 마음이 급한데 엄마의 주문은 끝도 없는 듯했다.


실컷 때를 밀고 냉탕에서 놀다 보면 이제는 집에 가기 싫어져졌다.

엄마의 재촉에 어쩔 수 없이 탈의실로 나오면 아줌마들이 삼삼오오 앉아 텔레비전도 보고 있고, 평상에 누워도 계시곤 했다.

엄마는 항상 탈의실에서 체중을 재셨다.

“내가 아가씨 때 핫도그가 너무 맛있어서 매일 먹었더니 한 달에 7킬로가 쪘던 거 있지. 그래서 끊었더니 빠지더라고.”하시는 말은 단골 멘트였다.

엄마는 정육점 일에 시달려서 인지 체질인지 항상 48킬로를 유지하셨다.

탈의실에는 큰 냉장고가 있었다. 안에는 딸기우유, 초콜릿 우유, 바나나우유, 요구르트, 캔음료수가 가득했다. 하지만 우리는 늘 흰 우유만 마셨다. 그것도 집에서 가지고 온 부산우유. 목욕탕 우유는 조금 더 비쌌기 때문이었다. 우유는 목욕하는 내내 찬물에 담가놓았기 때문에 여태 차가웠다. 목욕을 다 마치고 집에 오면 TV에서 장학퀴즈가 한창이었다.






이제는 목욕탕에 가지 않는다. 집에 욕조가 있고, 매일 샤워도 해서 그때만큼 때를 자주 밀지도 않는다. 가끔 집에서 때를 밀면 엄마가 “너는 밀어도 밀어도 때가 나오네. 아주 힘들어 죽겠다.”하셨던 말처럼 정말 때가 많이 나온다. 새삼 ‘엄마가 내 때 미느라 힘드셨겠다.’ 생각이 들었다.


목욕탕은 갈 때는 지옥탕이지만 나올 때는 세상 더러운 때는 다 흘리고 나온 듯 홀가분하다.

시원하게 때를 벗기고 나오면 세상 깨끗한 척은 다하며 한두 시간은 더러운 것을 만지지 않으려 애쓴다.

그러다 친구들이 불러 놀러 나가면 다시 먼지를 잔뜩 묻혀 돌아왔지만 말이다.

그림책 <지옥탕> 덕분에 잠시 8살 지옥탕에서 놀던 시절로 돌아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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