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무나 권리에 대한 뚜렷한 경계가 없던 시절의 인간은 지금의 인간보다 덜 지혜롭고, 덜 현명했을까?
그 시절의 밤하늘은 완벽하게 어두웠을 것이고, 완벽한 어둠은 수많은 별들의 존재를 부각시켜 주었을 것이다. 별들의 움직임을 관찰하던 과거의 사람은 우주와 자신이 다름 하지 않다고 생각했을지 모르겠다. 삶은 시간과 공간으로 형체를 드러냈을 뿐이고, 인간은 자연의 일부로 존재하였다.
"제가 그 집을 사면, 아버지는 그냥 올라오시기만 하면 돼요." 영화 <기생충> 결말 부분, 아들 기우의 대사이다. 이 대사에 전적으로 공감하는 자신을 마주하게 되는 순간, 내가 살아가는 이 사회와 인간에 대한 질문들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의무나 권리가 그 경계를 뚜렷이 확정하고 있는 진보된 사회를 살고 있다는 생각은 착각에 불과하였다. 모든 경계를 무너뜨릴 수 있는 단 하나의 가치가 자본주의 체제의 이면에 숨을 죽이고 버젓이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돈'이라는 것의 위력에 대하여 생각한다. 더 이상 우리는 별들의 움직임을 보지 않는다. 주식차트의 반짝이는 양봉과 음봉을 번갈아 노려볼 뿐이다.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어떻게 돈을 벌지에 관하여 궁리하는 삶을 살아가고, 그 돈을 쓸 궁리를 하며 시간을 소비한다. 지금의 우리는 지혜롭고 현명한 것일까?
농경이 시작되고 문명이 등장했다. 잉여 농산물을 더 많이 소유하는 사람이 생기게 되었고 계급이 발생했다. 권력을 차지한 사람은 그것을 유지하기 위하여 신과 자신의 관계에 대하여 증명하려 한다. 알에서 태어나기도 하고, 신과 곰 사이에서 태어나기도 한다.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정당성은 그 권력을 견고하게 확장시키는 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종족을 넘어 부족이 만들어지고, 국가가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농경을 바탕으로 등장한 국가에서 왕으로서 정당성을 더욱 견고하게 하기 위해서는 정확한 달력이 필요했다. 어느 시기에 씨를 뿌리고 추수를 해야 할지를 알아야 했던 것이다. 홍수와 가뭄에 대한 대비가 필요했던 것이다. 별들의 움직임과 하늘을 연구하기 시작했고, 그런 연구의 결과들은 오랜 세월 축적되며 견고하게 수정되어 갔다. 목성의 공전과 지구의 공전, 달의 공전과 지구의 자전을 통하여 년월일시를 하나의 부호체계로 정립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상나라, 주나라, 춘추전국시대, 진나라 시기에는 명리학이라 할 만한 체계는 존재하지 않았다. 거북의 등딱지를 불에 태워 갈라진 모양(像)을 보고 점을 쳤다거나, 시초라는 풀을 규칙에 따라 분배하고 계산하는 수(數)를 이용하여 점을 쳤다는 기록이 있다. 사람은 하늘의 축소판이라는 생각이 만연했던 때였다.
후한시대 왕충의 「논형」에서 육십갑자 부호체계가 형성된 것을 알 수 있다. 수나라의 소길은 한나라 이후 300년 이상 오행에 대한 학설을 집대성한 「오행대의」라는 책을 썼다. 추명에 대한 인간 본연의 의지, 사람은 하늘의 축소판이라는 이해, 육십갑자의 부호체계라는 도구는 완성되었으나 기원후 618년까지 명리학의 뚜렷한 등장은 포착되지 않는다.
우리가 흔히 띠별로 사주를 보는 것을 당사주라고 이야기한다. 당나라 「이허중명서」에서는 년주 위주의 사주 구성에 관하여 설명하고 있다. 송나라 서자평의 등장을 기점으로 명리학은 오늘날과 같은 기본 틀을 형성하게 된다. 서자평은 일간 중심의 명리학을 주장하였다. 태어난 일간을 사주 명식의 주인인 '나'로 인지하고 나머지 글자들을 해석하는 방법이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서자평의 이론을 발전시킨 송대의 「연해자평」은 육친, 신강신약, 격국 등 자평 명리를 체계적으로 저술한 책이다. 만민영의 「삼명통회」는 명리 대백과라 할 수 있는 12권의 책이다. 「삼명통회」는 유기의 「적천수」와 함께 명대의 명리 저서이다. 진소암의 「명리약언」, 심효첨의 「자평진전」, 여춘대의 「궁통보감」 등이 청대에 쓰였다. 서락오, 원수산, 위천리 등 근대 명리학자들과 오늘날 명리학자들의 연구를 통하여 명리의 이론은 계속해서 변화하고 발전해 나가고 있는 것이다.
1900년대 한반도에서의 삶은 치열하기 그지없었다. 일제강점기, 대한민국 건국, 전쟁, 군사 정권 등 언제 어떻게 바뀔지 모를 사회 속에서 사람들은 불안에 휩싸여 있었다. 이런 시기를 틈타, 짧은 명리 공부를 바탕으로 다른 사람들의 길흉을 점치고 불안을 조장하여 자신의 배를 불리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명리학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는 이때부터 다져지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잡과, 음양과 등 조선시대 이전에는 음양과 명리에 대한 학문이 과거시험으로 검증받기도 하였다. 자강 이석영, 도계 박재완, 제산 박재현 선생은 우리나라 명리 학계를 발달시킨 대표적인 명리학자들이다. 명리학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는 최근 들어 많이 변화하고 있다. 다른 사람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나는 선운의 명리터 황성수 선생님과 천인지 운명학 김병우 선생님을 존경한다. 그분들의 이야기는 삶을 성찰하게 한다.
석우당 김재홍 선생님과 호신 선생님, 더큼 학당 창광 선생님, 나이스 사주명리 맹기옥 선생님, 백민 양종 선생님, 낭월 스님, 사주 에듀 송재우 선생님, 민조 역학당 김민조 선생님, 갑술 명리학 안태옥 선생님 등. 명리를 깊이 공부하시고 그 이해를 기꺼이 나누시는 분들이 너무나 많다.
명리학은 제도권 내의 교육으로 한 걸음 진보하는 모습도 보인다. 원광디지털대학교 동양학과 신정원, 김학목, 정재상 교수님은 참으로 감사한 나의 은사님들이시다. 대면한 적 없는 인연을 통한 배움과 소통이 가능한 시대가 되었다. 이런 시대에 태어난 것도 운명이다.
자본주의 사회에 깊이 젖어 하루하루를 쳇바퀴 돌듯 살아가는 우리가 있다. 영화 <기생충>이 던진 뼈 때리는 질문에 대한 답을 어쩌면 명리 공부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사람은 하늘의 축소판이라는 '천인감응론'에 대하여, 옛사람들이 많은 시간 자연을 바라보며 삶을 살아간 것에 대하여 이해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삶은 시간과 공간으로 형체를 드러냈을 뿐이고, 인간은 자연의 일부라는 것이 진리라면... 우리는 자신의 진정한 욕망을 추구하며 조금 더 느긋하고 여유 있는 삶을 살 수 있게 되지 않을까? 명리학의 역사는 계속될 것이다. 우리는 그 역사의 길고 긴 여정의 한 지점에서 명리학을 공부하고 있는 중이다. 감사한 인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