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보다 꽃이 더 아름답다. 적어도 오늘만큼은...
기다림의 끝에,
천리향이 드디어 꽃망울을 터뜨렸다.
몽우리를 맺고,
보름에 가까운 시간을 그저 묵묵히 견뎌내더니,
이제야 비로소 제 안의 세상을 열어젖힌 것이다.
금방이라도 활짝 피어날 듯 하던 녀석은,
제법 느긋한 성정으로 봄의 속도를 다독인다.
서두르지 않고 제 시간을 충실히 살아내는 법을,
이 작은 생명에게서 배운다.
흔히 말하길,
꽃 사진을 찍기 시작하면 '진짜 아저씨'가 되는 거라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랴.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것들을 사랑하는 마음,
그것이야말로 메마른 삶을 적시는 가장 순수한 서정인 것을.
불혹을 넘긴지도 벌써 열다섯 해.
더는 흔들리지 않으려 한다.
누군가 소리 높여 노래했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고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린 이야기다.
꽃보다 아름다운 영혼이 존재한다는 것은 분명 사실이나,
그렇지 못한 군상(群像) 또한 너무도 많은 까닭이다.
자신의 정치적 야욕을 위해서라면,
죄 없는 아이들이 살아 숨 쉬는 땅 위로도 주저없이 폭탄을 떨구어내는 이들.
그리고 그 참혹한 비명 앞에서,
고작 내가 가진 주식의 등락을 걱정하며 한탄하는 '나'라는 존재.
삶의 터전이 무너지고,
부모 형제를 잃은 통곡 소리가 하늘을 찌를 때조차,
이기적인 근심에 매몰된 우리를,
어찌 꽃보다 아름답다 말할 수 있을까.
반면, 세상의 모든 꽃은 예외 없이 아름답다.
우리가 마주한 꽃 중에 미운 꽃이 단 하나라도 있었던가.
적어도 이 작은 화분 안에서는,
그 어떤 증오도 피어나지 않는다.
세상과 사람에 지친 눈을 씻어내듯,
나는 다시금 이 작은 생명이 틔운 기적을 응시한다.
천리향의 향기가 내 방을 가득 채운다.
하여 이름을 지어 주었다.
서연((瑞緣), 상서로운 인연이라는 뜻이다.
그 이름처럼 천리까지 닿는 거창한 향기는 아닐지라도,
적어도 내 곁을 지키는 소중한 사람들에게만큼은,
은은한 온기를 전하는 향기로운 사람이고 싶다.
느리지만 단단하게 피어난 저 꽃처럼,
나 또한 나만의 속도로 내 주변을 물들이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옆에 있던 안스리움(Anthurium)도 같이 꽃을 피웠다.
꽃말은 '순박한 마음'
참 마음에 드는 꽃말이다.
단단한 꽃대 끝에 피어난 꽃 한 송이가, 마치 아픔을 딛고 일어선 누군가의 얼굴을 닮은 듯 하다.
하여 이 녀석에게도 이름을 지어주었다.
홍연(鴻緣), '크고 넓은 인연'이라는 뜻이다.
'서연'에 이어 '연'자 돌림이다.
연이 쌍으로 있으니! ㅋㅋ
웃으시라고 한 말이니 기분 나빠하지 마시길^^
서연과, 홍연, 두 '연'이 꽃을 피우고 향을 내는 모습이,
나의 붓노리터를 더 생동감 넘치게 만들어주려는 귀여운 투정처럼 느껴져 나를 미소짓게 만든다.
경쟁이 모든 살아있는 이들의 숙명이라지만,
그 경쟁 끝에 피어난 것이 이토록 고운 꽃이라면,
그 또한 살아있음의 눈부신 증거 아니겠는가.
나 또한 이 경쟁 속에서,
아름다운 경쟁을 하고,
아름다운 꽃을 정성껏 피워내야겠다.
운동회 학부모 참관 문제로 인해 심란한 며칠을 보냈다.
두 녀석 덕분에 다시금 고운 숨을 쉴 수 있게 되었다.
고맙고 고맙다.
적어도 오늘만큼은
'사람보다 꽃이 더 아름답다.'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