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중한 내 친구가 행복하고 좋았던 기억만 간직했으면 좋겠어요.
# 보리가 단번에 알아듣는 말.
“맘마?” (끝 억양을 꼭 올려줘야 한다. 맘→마↗ 이렇게)
“쮸르쮸르?” (마찬가지다. 쮸르쮸→르↗)
기가 막히게 알아듣고 꼬리를 부르르 떨며 (고양이가 기분이 좋거나 매우 신날 때 하는 행동이다) 내게 다가오게 만드는 마법의 단어다. 사람이 아닌 존재가 사람의 말을 알아듣는다니! 처음엔 굉장히 신기했더란다. 같은 억양의 단어가 들리면 먹을 걸 준다는 걸 알아 차린 거겠지만. 역시 우리 보리는 천재야! 혼자서 기뻐했더란다.
이따금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해본다. 저런 간단한 단어 말고, 내가 하는 말을 모두 이해할 수 있다면, 나는 너에게 꼭 물어보고 싶은 말이 있어. 너에게 꼭 듣고 싶은 말도 있고.
고양이 커뮤니티에 자주 올라오는 질문이 있다.
“만약 고양이가 한마디만 할 수 있다면 뭐를 물어보고 싶으세요?”라는 어찌 보면 소박하지만, 이루어질 수 없는 엄청난 질문에 달린 답변을 읽고 있노라면 코끝이 뭉클해진다.
“지금 아픈 곳은 없는지 말해줬으면 좋겠어요.”
“나를 만나서 행복하냐고 물어볼래요.”
대개 저 두 문장으로 압축된다.
# 아픈 곳은 없어? 아프면 지체 말고 말해줘.
야생에서 아픈 티를 내는 것은 곧 적에게 목숨이 노출되는 위험한 상황까지 갈 수 있어서, 본능적으로 웬만큼 아픈 거로는 티를 내지 않는다고 한다. 식음을 전폐하거나 어두운 곳에서 기운 없이 웅크리고 있을 지경에 와서야 병원에 데려가면, 생각 외로 심각한 질병이 어느 정도 진행된 상태라는 것. 손쓸 수 없는 상태를 마주하고 밀려드는 자책감과 죄책감은 이루 말할 수 없겠지.
사람들은 알고 싶은 것이다. ‘지금 아픈 곳은 없는지.’ 아픈 곳이 있다면 말을 해줬으면 좋겠어, 그게 아니라면 티를 열심히 내줬으면 좋겠어, 내가 알아차릴 수 있게, 너를 늦지 않게 병원에 데려갈 수 있게, 그래서 너를 고통스럽지 않게 해 줄 수 있게, 너를 잃지 않게.
결국 “아픈 곳은 없어?”라는 질문의 의도는 저거다. 너를 잃지 않게.
마음의 준비를 충분히 한 채 맞는 이별도 아프지만, 예상치 못한 이별은 더더욱 아프다. “잘 가”라는 작별 인사도 못 해줬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좋아하는 츄르라도 하나 더 주는 거였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사랑한다고 한 번이라도 더 말해주는 거였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이라는 말은 ‘이럴 줄은 꿈에도 몰랐다’라는 전제를 담고 있어서 가슴이 더욱 아프다.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더는 들어줄 수도, 대답해줄 수도 없다는 건 겪어본 사람만이 아는 슬픔이다.
갑작스러운 이별만큼은 피하고 싶으니까, 내가 사랑하는 존재가 고통스럽지 않길 바라니까, 순수한 마음의 표현이다. 사람보다 빠르게 흘러가는 고양이들의 시간은, 언젠가 반드시 찾아올 이별을 떠올리게 만든다.
바라건대 너와 내가 공유한 소중한 추억이 있으니, 그것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라건대 너의 이번 생이 나로 인해서 행복했기를.
바라건대 너의 다음 생은 네가 원하는 모습으로 태어나 마음껏 세상을 누비기를.
너와 함께 한 시간에 대한 나의 마지막 바람이다.
# 나는 너를 만나서 너무너무 행복한데, 너도 나와 같았으면 좋겠어.
내가 다니던 동물병원에서 주는 약 봉투 뒷면에는 ‘반려동물이 주인에게 바라는 십계명’이 인쇄되어 있다. 하나하나 읽다 보면 역시나 눈물이 팽- 돌게 만드는 문장이 있다.
당신에게는 일이나 취미가 있고 친구도 있으시겠죠. 하지만, 저에게는 당신밖에 없습니다.
그렇다. 나는 친구도 있고 취미도 있어서 무료함을 달래거나 인생의 즐거움을 느낄 방법이 많지만, 보리에게는 오직 우리 부부 밖에 없다. 우리가 놀아줘야 하고, 밥을 줘야 하고, 말도 걸어줘야 한다.
우리 부부와 보리의 관계는 평등하지 못하다. 관계가 성립되는 순간, 어느 한쪽에겐 상대가 세상의 전부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보리가 주는 무한의 애정과 믿음으로 행복을 만끽하는 만큼 녀석이 보여주는 지지와 사랑을 당연시하며 무뎌지지 않기를 바란다.
당연하다고 여기는 순간,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는 이미 수십 년의 학습으로 잘 알고 있잖은가. 무심코 내뱉은 말 한마디가 부모님의 가슴엔 비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리는 무한의 애정을 주지만, 또 무한의 애정을 받아야 하는 존재다. 물론 주어가 부모님으로 바뀌어도 문장은 성립한다.
보리에게 “우리는 너를 만나서 웃음이 끊이질 않고, 너의 모든 행동이 귀엽고 예뻐서 미소가 떠나질 않는데, 너는 어때? 너도 우리를 만나서 기쁘니? 우리와 삶을 살게 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해? 행복하니?”라고 물었을 때, 일말의 고민 없이, 당연한 걸 왜 물어보냐는 듯이, “그럼요!”라고 대답해준다면 좋겠다.
과학기술이 아무리 발달한들, 적어도 내 생에는 사람 말을 정확하게 다 알아듣고, 또 자신의 의사를 또박또박 표현할 수 있는 날이 오지는 않을 것 같지만.
너를 사랑하고 있다고, 네 덕분에 많은 시간을 웃을 수 있다고, 비록 속 썩일 때도 분명 많지만 나는 그 시간마저 소중하다고, 먼 훗날엔 그 시간마저 소중하고 귀해져서 생각만으로 웃음 짓고 때로는 눈물지을 거라고. 그러니 소중한 내 친구야, 함께 하는 시간 동안 행복한 기억들로만 가득 채워졌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