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 덕분에 다시배우고 있습니다.
사랑을 받아본 적도 없고, 사랑이라는 감정을 배운 적도 없던 남자는 자신의 감정이 한 여자를 향한 사랑인 줄도 모르고 불행한 결말로 치닫는 이야기.
좋아하는 드라마의 에피소드 중 하나다. 드라마 전체가 인상 깊었지만, 특히 이 에피소드가 기억에 남는 건, ‘사랑을 받아본 사람만이 사랑을 줄 줄도 안다’라는 걸 잘 보여줬기 때문이다. 다른 존재에게 사랑을 받는다는 것만으로 누군가에겐 삶의 이유가 되기도 하고, 삶을 변화시키는 엄청난 일이라는 걸 부정할 사람은 없지 않을까?
나 또한 여러 관계에서 사랑을 주고받으며 성장했고, 내가 받은 사랑을 보리에게 주겠노라 다짐했건만, 오히려 무한한 사랑을 받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보리에게 순도 100%의 사랑을 아낌없이 받고 있다는 걸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달그락, 달그락, 그릇을 시끄럽게 부딪치며 설거지를 하는 순간에도 나를 향한 눈동자는 사라지지 않았다.
한 글자, 한 글자, 책을 읽어가던 때에도 내 시선을 놓칠세라 집중해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컴퓨터를 하고 있을 때면 내 시선이 머무르는 모니터가 꼴 보기 싫었던 건지 온몸으로 막아대기도 하고, 키보드에 머무는 내 손길이 샘났던 건지 키보드 위에 올라가 읽을 수 없는 글을 쓰기도 했다. 때로는 저를 봐달라는 듯, 응석받이 아기처럼 울기도 했다.
보리의 일과 중 일부를 옮긴 것이다. 이제는 적응을 마쳐서 하지 않으면 오히려 어색한, 그런 평범한 일과.
커다랗고 동그란 눈, 쫑긋 솟은 귀, 멋들어지게 뻗은 하얀 수염, 보들보들하고 푹신한 털까지. 예쁘지 않은 고양이가 어디 있겠냐마는, 보리는 그중에서도 특별한 고양이였다. 적어도 내게는. 원래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함함하다고 했다.
처음 보리가 집에 왔을 때, 나는 너무나도 오랜만에 생명을 품에 안았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 친구가 집에서 키우던 햄스터를 한 마리 줬었는데, 그 뒤로 살아있는 무언가를 키워본 적이 없었다. 24년 만에 품은 작디작은 생명이 너무나 소중하고 신기해서 바라보고 또 바라보고. 짝사랑이라도 하듯이, 항상 나만 바라본다고 생각했었는데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
조용히 내 움직임을 좇다가 잠에 스르르 빠져드는 보리.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왠지 녀석의 눈빛을 보고 있으면 나 혼자 하는 짝사랑은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너 나 좋아, 싫어? 아무리 물어도 직접 답변은 들을 수 없지만. 녀석은 나를 사랑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띠리리릭-
도어락을 열고 현관에 들어서면, 나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던 듯 스크래처 앞에서 환영 인사를 준비하고 있다. 잘 있었냐고 건네는 인사에 보리는 스크래처를 긁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다.
벅벅벅-
전문가에 따르면, “이제 오는 거야? 반가워!”라고 인사를 건네는 거란다. “사냥감은 잘 가져왔고?”라는 뜻도 있다고 한다. 집사가 사냥하러 갔다고 생각한다나. 미안하게도 먹을 거는 주지 않지만, 대신 그동안 혼자 있느라 고생했다는 뜻에서 턱도 쓰다듬어 주고, 얼굴도 쓰다듬어 준다. 기분이 좋은지 골골송을 부르며 느긋한 표정으로 안겨 있는 녀석. 불과 몇 시간의 이별이었는데도 우리는 몇 년 만에 만난 것처럼 서로를 반긴다.
보리는 하루도, 한 시도 빼놓지 않고 우리 부부를 사랑하고 있다. 잠잘 때마저도 내 옆에서 꼭 붙어 자니까. 아침에 일어나면 잘 잤냐고 안부를 묻듯, 온몸을 비벼대며 만져달라고 골골송을 불러대니까. 우리 부부도 보리를 단 한 순간도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다. 매일의 대화에 보리가 빠지지 않고, 함께 하는 시간의 소중함을 알고 있으니까.
그렇게 우리는, 서로에게 사랑을 주고, 또 사랑을 받으면서 하루를 채워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