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주머니 대신 앞주머니를 차라
한창 결혼 준비를 할 때 유부 선배들한테 배우자가 모르는 비상금이 필요하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 남편도 비상금을 몰래 챙겨 두거나 성과급은 따로 관리하라는 둥 전부 오픈하지 말라는 조언을 많이 들었다고 했다. 나는 어떻게 배우자 몰래 비상금을 보관할 수 있는지 이해가 안 됐다. 오픈뱅킹 서비스 등 마음만 먹으면 서로의 전 계좌를 볼 수 있는 세상에서 비상금을 몰래 챙기는 것이 가능한가?
"그렇게까지 확인을 안 해."
물어봤더니 배우자가 그렇게까지 확인을 안 한다고. 아니, 아예 따로 관리하는 것도 아닌데 월급을 맡겨 놓고 확인을 안 한다는 게 말이 되나? 바보도 아니고 그런 사람이 있나 싶었는데 기사를 보니 있더라. 한 달에 700만 원씩 꼬박꼬박 아내한테 월급을 보냈는데 모아 둔 돈이 거의 없다는 걸 7년 만에 알았다던가. 나는 7년간 가정의 수입과 지출, 저축액을 확인하지 않았다는 게 더 놀라웠다. 한 달에 한 번은 못 해도, 분기에 한 번, 아니, 1년에 한 번은 확인할 수 있었을 텐데?
우린 결혼 얘기가 나오고 서로 연봉과 성과급과 기타 수입, 저축액과 빚부터 공개했다. 결혼식과 신혼집 준비, 앞으로의 결혼 생활이 다 돈과 연결되는 만큼 꼭 서로 오픈해야 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명목상 내가 우리 집 재무장관이긴 하지만 우린 가계부도 함께 쓰고 월말 결산도 같이 한다. 누가 주도권을 갖든 상대 배우자에게 진행 상황이나 성과를 공개할 의무가 있고, 부부 둘 다 가정 경제에 신경을 써야 한다.
하지만 어느 정도 비상금이 필요하다는 것에는 동의한다. 내 마음대로 융통할 수 있는 목돈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에 여유가 생기고 안정감을 느낄 수 있으니까. 지출할 때마다 배우자에게 내역을 샅샅이 공개하는 것이 때론 스트레스로 다가올 수 있는데, 비상금이 있다면 얼마나 안심이 되겠는가. 하지만 남편 몰래 비상금을 챙기고 싶지는 않았다. 상대가 나에게 솔직하길 바란다면 나도 상대에게 솔직해야 한다.
우리 부부는 고민 끝에 앞주머니 시스템을 만들었다. 매월 책정한 용돈 외에 매년 100만 원씩 앞주머니를 차기로 한 것이다. 앞주머니는 용돈과 마찬가지로 일절 터치하지 않고 사용 내역을 공개하지도 않는다. 이는 우리 부부가 지향하는 우아한 절약에 훌륭한 보조 시스템이다. 절약만 강조하다가는 자칫 팍팍해지기 쉬운 일상에 기름칠을 해 준달까? 그런데 이 앞주머니 시스템이 생각보다 장점이 꽤 많더라.
1) 우선 공용 자금으로는 하기 힘든 위험천만한 투자를 할 수 있다. 암호화폐 투자도 그림 투자도 처음에는 내 용돈으로 시작했다. 내 용돈으로 투자한 뒤에 공용 자금을 투입해도 나쁘지 않겠다 싶어서 맛보기 투자금을 넣은 것이다. 또한, 나는 비교적 안전한 투자를 선호하는 반면에 남편은 공격적인 투자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공용 자금으로 남편이 그런 위험천만한 투자를 하면 스트레스겠지만 비상금으로 한다면야 노터치.
2) 공용 자금 지출 방어도 할 수 있다. 우린 생일이나 기념일 선물을 각자 비상금으로 해결한다. 공용 자금으로 선물을 사면 어쩐지 내 돈 주고 선물 받은 기분이 드는데, 개인 돈으로 준비한 선물을 받으면 괜히 기분이 더 좋달까? 공용 자금에서 큰 지출이 있을 때 앞주머니에 넣어 둔 비상금을 일부 보태기도 한다. 남편도 얼마 전에 50만 원을 척 내놓았는데 어찌나 멋있던지. 혹시 비상금으로 고민하는 부부가 있다면 우리 부부처럼 앞주머니 시스템을 도입하는 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