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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여름의수박 Jul 07. 2016

타향살이, 1년간의 기록

낯선 곳에서 직장인으로 살아가기

이달 하순이면 제주에 내려온지 꼬박 1년이 된다.

그중 절반은 제주를 여행하는데 썼고, 나머지 절반은 직장생활을 하며 보낸 탓인지 지난 1년간의 기억은 선명하게 반으로 갈린다.


전반전 : 나는 쉬어야 한다.

이전 직장에서 퇴사를 결심하며 퇴사 후 무조건 몇 달은 쉬어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지역을 바꾸고, 더구나 낯선 곳에서의 이직이 녹록지 않을 수 있다는 불안감도 있었지만 어쩌겠는가. 나는 이미 지쳤고, 인생을 길게 내다보기로 했다. 주변에선 나이 서른에 몇 개월 쉬는 건, 이직시장에서 큰 흠이 될 거라 했지만,  내 인생에서 서른은 결코 많은 나이가 아니라고 스스로 다독였다.


나의 휴지기는 그렇게 시작됐다. 지난 몇 년간의 노고가 담긴 퇴직금을 밑천삼아 7월 하순, 제주에 왔더랬다. 첫 직장을 그만두고 꾸역꾸역 배낭여행짐을 꾸리던 어리숙했던 20대와 달리 채우기보단 비우는 것에 집중했다. 일상을 놓아버린 휴지기의 나는 무기력과 생동감을 동시에 느꼈다. 전화기 너머 주변의 우려가 무색하게, 제주 곳곳에서 나와 같은 동지(!)들을 발견했다.

일상적으로 강요받던 크고작은 순간들의 선택에서 자유로워졌다. 누군가를 만나면 익숙하게 꺼내야했던 명함에서 자유로워졌다. 하루에도 몇 번씩 업무적으로 마주해야했던 사람들과의 감정노동에서 해방되었다. 누구말마따나 정신건강, 피부건강에 퇴직 에스테틱이 최고였던 것이다.


그날그날의 날씨에 따라 오늘의 할 일을 정했다. 여행을 하며 세운 원칙은 하루에 한가지 이상의 일을 계획하지 말자는 것이었다. 무엇이 됐든, 너무 애쓰지 않기로 했다.

억수로 비가 쏟아지면 집에 누워 엄마가 보내주신 고구마를 삶아먹었고, 적당히 비가 내리면 통창이 있는 산방산 근처 카페에 앉아 하염없이 밖을 쳐다봤다. 햇빛을 피해 숲으로 도망쳤고, 길 위에서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며 한정없이 걷기도 했다.


보약같던 시간들이었다. 잔뜩 움켜쥐고, 경직된 채 살아갔던 마음에 '괜찮다'는 위로를 건넬 수 있어 참으로 고마운 순간들이었다. 누군가 지쳐있다면, 나는 휴식을 적극 권장한다. 퇴직금은 당신의 든든한 동반자가 되어줄 것이며, 마음껏 원없이 오로지 나를 위해 그 돈을 써볼 것을 권한다.


후반전 : 나는 다시 직장인이 되었다.

퇴직금을 몽땅 다 쓰고 나서도, 한두달은 더 놀았다. 폭우가 쏟아지는 겨울에 다시 일하기 싫었고, 그런 마음을 응원하고자 아껴뒀던 비상금을 털었다. 정말 통장에 경고등이 터지자 나는 이직시장에 나왔다. 치솟는 물가와 달리 제주의 노동현실은 척박하기 그지없다. 저임금, 노동의 가치를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환경이다. 마음으로 정한 마지노선을 경계로 그 아래의 임금과는 타협하지 않기로 했다.  다행히 경력을 살리고, 해보고싶은 분야의 업무를 맡아 이직하게 되었다.

이전 브런치 글에서 적었다시피 이직 초반에 나를 힘들게했던 것은 다름아닌 '제주사투리'였다. 일상적으로 많이 쓰는 탓에(심지어 카톡으로 대화할때도 사투리로 써서 당황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문장이 이해가 안돼 곤혹스러웠다.


어찌됐건 이직 5개월차, 낯선 환경에 차츰 적응해가고 있지만 어딜가든 '이주민' 딱지가 붙어있다. 원주민들에게 나는 '육지에서 내려온, 30대 여자인데, 심지어 결혼도 안했다'는 말과 눈초리를 들어야했다. 공과 사를 분리해 사는 삶에 익숙해져있던 나에게 이러한 시선들이 쉬울리 없었다. 제주의 괸당(친인척 문화)문화 저편에는 어디서 누굴만나든 본인과의 연결고리를 찾기위해 신상을 털고야마는 사람들의 관계맺기 방식이 있었다.


그래서 글쓴이는 잘 적응하고 있습니까? 제주에서 직장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만족합니까? 라고 묻는다면, 나는 일단 희미한 웃음을 지어보일 것이고, 그리고 나서 사실은 잘 모르겠노라고,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묻고 있는 중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한 발을 살짝 걸친 채, 제주를 누빌 때와 달리 직장인이 되어 정착민의 시선으로 살아가는 지금의 삶은 전혀 다르다. 지역과의 관계맺기가 비즈니스적으로 해결해야 할 숙제가 되었고, 지금 이 일이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가에 대한 자문에 답을 하기 위해 나는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고 있는 중이다.


 누군가 나처럼, 나와 같은 선택을 앞두고 있다면 지역에 대한 이해도를 먼저 높힐 것을 권한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정확한 판단을 기준으로 가고자 하는 그 지역이 나와 잘 맞을지도 중요한 변수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일년 후. 다시 일상으로 파묻히는 게 두려워 꼼지락꼼찌락 거리고 있다.

일상적인 것들에 익숙해지지 않기 위해, '무언가' 새로운 자극이 될만한 것들을 탐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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