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여름의수박 Mar 15. 2022

반나절 충성한 보고문서는 어디에

보고를 위한 보고자료와 그를위한 참고자료

출근한지 10분도 채 안됐는데, 아직 9시도 안됐는데 전화벨이 울린다. 아니, 누가 이시간에 전화야...!!!


"네. 과장님. 오늘자 기사요? 아뇨. 아직 확인못했어요. 확인후에 말씀드릴게요."


이른시간에 전화해서 업무를 요구해도 당당할 수 있는 사람, 온리원. 과장님...


오늘은 또 무슨 기사길래, 나를 찾으시나 싶어 뉴스브리핑을 확인해보니 지면탑에 사업 기사가 났다. 며칠전 새로 시작한 마을 문화사업 보도자료를 내쳤더니 그걸 보고 기자가 현장취재를 해 특집기사를 내보낸 모양이다. 별로 특이사항이랄게 없어 기사를 읽고 또읽었으나...모르겠다. 열심히 잘하고 있단 기사의 뉘앙스인데 여기서 뭘 읽어내야하는거지?


"과장님, 기사 확인했는데 특이사항이랄게 없던데요."


"응. 국장님이 현장 직접 가보고 싶으시다니까, 추진현황 자 만들어봐요. 현장 보기전에 검토하실수있게. "


후. 현장에 국장님이.. 오신다구요? 그것은 의전의 시작이요. 끝없는 자료의 늪의 또다른 예고였다.

 

일단, 하라니 해야지 뭐. 자료 현행화를 위해 여기저기 전화를 돌려 팩트를 크로스체크하고, 현재 상황진단과 야기되는 문제점, 우려사항들을 체크했다. 현장에 간부가 뜨면, 주민들은 고이 아껴뒀던(?) 민원들을 쏟아내기에 별안간 폭탄을 안맞으려면 현안이슈도 체크해둬야한다.


한시간 가까이 자료를 다듬어 들고 갔더니,

이번엔 또 다른 폭탄이다.  기사에 허브가 문제였다. 난 가끔 어르신들이 왜 이런거에 꽂히는지 알다가도 모르겠지만.


"그 기사에 난 ○○종이 뭐예요? 구역별로 무슨 종 심었는지 파악해서 추가자료 만들고, 이거 관리는 어쩌고있나. 얘들 상태 좋은거 맞지?"


지나친 어르신의 관심이, 과장님도 괴롭겠지만 저만큼 괴롭겠나요.  구역별로 심은 얘들을 파악하라니. 허허.. 과하다 과해. 허브종류 하나하나까지 다 알고싶다고요? 굳이 그걸 지금?


"과장님. 근데 이건 관심있는 주민들이 마을을 위해 시도해보는 실험인지라 허브 상태큰기대를 하시면 안돼요. 주민들이 전문가가 아니라서, 이분들도 배우면서 도전해보는거라..."


아무리 과정이 중요시되는 주민 문화사업이라 말을 한들, 어르신이 현장에 떴을때 휭(?)해보일까 걱정만 한다. 전문업자들이 하는게 아지라, 주민들이 마을을 위해 건물을 짓는 방식이 아닌 것들을 시도해봄으로써 그 과정에서 얻는 주민 간 연대의식이 핵심이라고 아무리 말을 해봤자, (벽에 대고 말을 할껄 그랬나)


"그래서 지금가봤자 별볼일 없다는거야? 국장님이 가신다는데, 가서 실험이니 이렇습니다 말하라는건가?"


네. 네네!! 그렇습니다. 정확하십니다요.

'이건 단기성과가 나는 게 아니라 주민들에게 씨앗뿌리는 지리한 과정인걸요.'


다시 빠꾸먹은 문서를 들고 자리에 돌아와 현장 담당 선생님께 민망한 전화를 돌린다.


"선생님. 허허. 저희 국장님이 워낙 ○○마을에 애정이 많으시다고 제가 말씀드렸나요? 현장에 가서 직접 보고 브리핑 듣고싶다고 하시는데.  걱정마세요 저도 현장에 있으니. 네.  알죠알죠. 그나저나 우리 허브심은 거 구획별로 어디에 심은건지 기록해두셨어요?아. 별건 아니고, 살짝 궁금하다고 하셔서요.... "


"무슨허브를 어디에 심었는지, 허브종류를 궁금해한다구요? 그게 왜 궁금한지 모르겠네요."


저도, 왜 필요이상으로 집착하시는 지 모르겠어요.

 


이렇게 반나절이 갔다. 몇번의 호출과 자료보완과 전화를 하느라, 반나절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가끔 날 못견디게 했던 행정보고의 끝없는 문서보완.


보고를 위한 보고자료를 만들고, 또 그 보고자료를 보충하는 참고자료를 만들고, 정말 심할때는 과장검토용 버전, 국장최종보고용 버전도 각각이다.


이런거 하느라 해야할 일을 못한채, 정작 업무는 해지고나서야 시작할때가 왕왕있다.


이렇게 반나절 충성하여 만든 자료가 그래서 잘 쓰였냐고? 아니올시다. 국장은 이날 바빠서 현장에 가지 못했다.  


국장이 이렇게까지 자료를 요구했을까?

짐작컨대 국장은 아침에 출근해서 신문을 보고, 반가운 마음에 현장이나 한번 둘러볼까 넌지시 던졌을거다.


이 말을 콱 문 건 과장일테고.

"내가 몰라서는 안돼. 과장이 모르는 일이 어디있어!"


그렇게 하나부터 열까지 알고싶지만, 보고는 언제나 문서 한장짜리로, 본인 알고싶을때 받아야하는 상사가 2022년에도 있다.

이전 03화 상대방의 언어로 쓰면 맥락이 생긴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