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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상록 #2일차

by 몽글

어제는 무언가에 취해 잠든 듯하다. 간호사님이 진통제 주사를 수액에 추가로 놔주셨는데, 그 덕인지 졸린 덕인지 모르게 잠에 들었다. 하지만 중간중간 혈압을 재고 수액 상태를 확인받느라 깰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자다 깨다를 반복하다, 새벽 5시에 키와 몸무게를 재야 한다는 간호사님 부름에 따라 일어났다. 그 새벽에 자다 말고 키, 몸무게 재는 사람 나야 나. 다시 병실로 돌아와 잠을 청했다가 새벽 7시에 X-ray 찍으러 가야 한다는 또 다른 간호사분 부름에 일어났다. 새벽에 자다 말고 X-ray 찍는 사람도 나야 나. 근데 나뿐이 아니었다. 그 새벽에 X-ray를 찍으러 온갖 병실에서 환자들이 쏟아져 내려왔다. 후덜덜. 이제 생각해 보니 입원자들의 영상촬영은 가급적이면 외래진료 이전에 처리하는 듯하다.


X-ray 촬영을 마치고 라와 걷기 시작했다. 두 번의 새벽 기상으로 잠이 다 깨버린 탓에 누워있기보다 걷기를 선택한 것이다. 천천히 걷다가 담당 간호사님을 마주쳤다. 상태를 물으셔서 무엇보다 목이 마르다고 답했다. 어제부터의 소변 대변 이력을 살펴보시더니 물을 마셔도 되는지 담당의에게 확인해 보겠다고 하셨다. 남은 바퀴수를 마저 걷고 병실로 돌아오니 간호사님이 새로운 금식 팻말을 가지고 오셨다. 바로, 물을 마셔도 된다는 팻말이었다!



이 순간만큼은 세상을 얻은 듯 기뻤다. 드디어 입을, 식도를 적실 수 있어! 내친김에 당장 생수를 구입하러 편의점으로 향했다. 병원에 정수기가 없어서 물을 사 먹어야만 하는 그런 상황은 물론 아니었다. 물도 마시지 못하는 금식이었다 보니 물을 떠먹을 무언가를 구비해놓지 않았던 탓에 생수병이 필요했던 것이다. 휴게실 정수기 옆에는 종이컵이 비치되어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한계가 있고, 무엇보다도 목이 마를 때마다 수액걸이를 끌고 휴게실을 오가는 건 무척이나 귀찮은 행위이니까. 그래서 생수통이 구하러 가기로 했다!


편의점이 병원 건물 안에 있는지 어떻게 가면 되는지 간호사님께 자세히 물었다. 나는 그런 나에게 비장함마저 느꼈다. 병원 밖은 칼바람으로 체감기온이 한자릿수였지만 나는 환자복만 입은 채로 수액걸이를 끌고 병동을 나섰다. 병원 2층의 연결통로를 거쳐 1층으로 내려가면 되는데, 2층에서 엘리베이터를 내리자마자 뜻밖의 암초를 만났다. 바로 빵 냄새. 병원 1층에 베이커리가 위치해 있었고, 거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갓 구운 빵 냄새가 나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었다. 수액을 꽂고 있어서 거동이 자유롭지 못했던 것이 다행일 지경이었다. 그러지 않았으면 이성을 잃고 빵집으로 돌진했을지도 모른다. 편의점엘 들러 700원짜리 생명수를 움켜쥐고 다시 빵 냄새 정글을 헤쳐 병실로 무사히 귀환했다. 그 여정이, 내게는 웬만한 블록버스터 저리 가라였다.




오늘은 꽤 많이 걸었. 걷는 횟수도 늘렸고 걷는 거리도 늘렸다. 그래서인지 혼자 병실에 있어도 그리 심심하지 않다. 외려 바쁘다. 한 번 걸으면 10~20분 정도 소요된다. 병실로 돌아와 생리현상을 해결하고 물을 마시고 이를 기록지에 남긴다. 쉬고 있으면 혈압과 체온을 체크하러 간호사님이 오신다. 수액 상태를 체크하러 오시기도 한다. 그렇게 유튜브 한 편 정도를 보며 쉬노라면 어느새 다시 걸을 시간이 된다. 래 백수가 더 바쁘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병원에서도 통하는 말인가 보다.


걸음을 옮기며 두 가지를 생각했다. 하나는 무료함, 하나는 아름다움이다. 병원 복도를 반복해서 걷는 게 무료하다. 때때로 찾아오는 복통과 함께하는 그 시간이 아무래도 유쾌하지만은 않다. 귀찮은데 재미도 없다. 귀찮음은 어쩔 수 없으니 재미라도 섞어보자라고 생각하며 팟캐스트를 켰다. 출퇴근길에 즐겨 듣기 시작한 [취미학개론] 팟캐스트를 들으며 걸었다. 병원에서 듣는 다른 사람들의 취미예찬이 출퇴근길에 듣던 그것과는 사뭇 다르게 들렸다. 지금 당장에도 그렇고 퇴원을 하고 나서도 당분간은 내가 해볼 수 없는 영역의 이야기들을 듣고 있자니 재미있고 즐거웠다. 늘보님의 진행도 기깔난다. 참으로 인사이트의 깊이가 깊은 분이라고 여겨진다.


나머지 하나인 아름다움은 병원에서 보이는 풍경이다. 같은 복도를 하루 중에도 여러 차례 걷다 보니 시시각각 태양 고도가 변하면서 배경색도 달라지는 것이 눈에 띄었다. 이를 사진으로 남기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시간대를 달리하며 찍어둔 사진이다. 사진은 빛의 예술이라더니, 그 말이 딱 맞는구나 싶었다.




마지막 사진은, 나다.



복도에서 그림자를 바라보니, 그림자마저 아파 보여서 찍어두었다.



- 2025년 11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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