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애틀에서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단 하루였다.
전날 매우 밤늦게 도착을 했고 다음날은 새벽에 떠나야 했기 때문에 주어진 시간은 딱 하루...!
혼자 여행을 왔기 때문에
낭만적인 시애틀의 전경을 즐기고 싶다던가
스타벅스를 좋아하지도 않기 때문에
원조 스타벅스 커피를 먹고 싶다던가
뭐 그런 하고 싶던 게 딱히 없었던 도시이다 나에게 시애틀은.
그저 밴쿠버에서 뉴욕으로 가는 길에 슬쩍 둘러만 보고 갈 요량이었다.
오전에 <파이크 플레이스 마켓>을 잠깐 보고 나와서
어디로 갈까 고민을 하던 중에 비가 오기 시작했다.
그래......귀찮은데 가까이에 걸어갈 수 있는 도서관으로 가자!
시애틀 공공 도서관
The Seattle Public Library
사진으로 외관만 보았을 때는 그렇게 끌리지가 않았던 건물이다. 갈까 말까 하던 곳인데 그리로 향한 건 단지 비가 와서였다.
비는 추적추적 오고 발걸음은 털레털레
조금 걸었더니 음... 사진으로 봤던 그 건물이 나오네!
외관은 사진에서 보던 그대로였다. 역시 기대가 안 생기는 모습이었다.
도로가 좁아서 어디에서도 사진의 구도가 안잡혔고 비도 오고 하니 내부부터 빨리 보고 나오자...
라는 생각으로 아무 생각 없이 보이는 입구로 들어섰다.
그런데, 입구로 들어선 순간 진짜 헉! 하고 나는 그 자리에 멈춰 서고 말았다.
너무도 압도적인 공간과 맞닥뜨렸기 때문이다.
아니, 세상에 내부가 이렇게 좋다고 왜 아무도 나에게 알려주지 않은 거지??!
(당연히 아무도 안 알려주지...무식한 내가 전혀 모르고 있던 거지ㅎ)
핑계지만 건축을 전공한 나는 주류의 건축을 접할 기회가 없는 설계판에서 일하고 있었고 먹고 사느라 바빠서 따로 공부할 시간도 없었으니 지식이 많지 않은 상태였다.
들어가자마자 너무 흥분이 되어서 로비에서 반쯤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홀린 듯이 사진을 찍고 구경을 했다.
이 보이드의 공간감은 이 속에 있을 때만 느낄 수 있을 듯하다.
특정지어지지 않은 공간들이 혼재되어 있다.
1층 로비 한켠에도 서가가 배치되어 있었고 사람들은 자유롭게 책을 읽고 있었다.
조명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알려준 따뜻한 느낌의 서가
뻥 뚫려 있는 보이드가 굉장히 압도적인 공간에 안내센터, 샵, 서가, 책읽는 공간들이 자유롭게 놓여져 있었고 사람들이 여유롭게 그 공간을 즐기고 있었다.
하루 로비에서는 구경만 하고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상부층으로 올라가 보았다.
최상층으로 올라가 보니 너무나 멋진 공간에 긴 책상들이 쭉 놓여 있었고 나도 설레는 마음으로 다른 사람들처럼 자리를 잡고 앉았다.
비 오는 시애틀의 늦은 오후를 이곳에서 밀린 다이어리와 여행 일기를 쓰며 오랫동안 즐겼다.
내가 자리 잡고 앉았던 최상층의 공간 & 책상
이런 곳에 앉아서 시간을 보내다.
크게 오픈된 공간이었지만 부담스러운 공간이 아니었다.
경사진 커튼월과 뻥 뚫린 보이드가 만들어 낸 공간들은 건물 중간중간 곳곳에서 나타났고
빛은 부드럽고 커튼월의 바를 잡고 있는 구조재는 푸르렀다.
그 안의 사람들은 정적이고 고요했지만 자유로워 보였으며
가끔 홈리스들이 화장실 앞에서 정모를 했지만 방해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엘스컬레이터는 꽤나 이상했다.
층마다 연결되지가 않아서 중간층에 진입해보려고 여러 번 시도를 했지만 실패했고
그냥 서가 구경이나 하며 돌아다니자 했더니 자연스럽게 나는 다음 층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내부의 컬러는 돋보이는 원색으로 다양했고 자주 달라지는 마감재료들은 잘 만나고 있었다.
그렇다.
나는 정말로 이 건물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간 것이다.
표면이 전부 커튼월로 둘러싸인 이 건물의 빛이 그렇게 부드러웠던 건 유리층 사이의 금속 메쉬망이 직사광선을 막아주었기 때문이고
푸르렀던 I형강 사이에서 맑게 느껴졌던 빛은 저철분유리를 썼기 때문이다.
경사진 커튼월과 보이드가 만들어 낸 독특한 느낌의 공간들은 설계자가 의도한 불확정적인 공간이었고
(설계자는 5개의 안정된 영역 사이사이에 4개의 불안정한 영역들을 관입시켰다.)
서가를 돌아다니면서 저절로 층을 내려온 건 연속적인 바닥판으로 이루어진 나선형 서고였기 때문이다.
또 건물 자체가 하나의 커다란 볼륨(=외관) 안에 작은 볼륨들이 포함되어 있는 계획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내부와 느낌이 달랐던 것이고 나는 다른 느낌의 외관에 별 매력을 못 느꼈던 것이다.
정말 이 정도면 설계자가 진짜 설계를 잘한 것이 아닌가!!!
아무런 정보 없이 찾아간 방문자가 설계자가 의도한 모든 것들을 그대로 느꼈으니 말이다.
그래 인정할 건 인정하자. 렘 콜하스는 설계를 잘하는 걸로...!
경사진 커튼월의 모습이 잘 보인다.
*처음에 이 커튼월을 보았을 때 엄청난 멀리언의 사이즈에 깜짝 놀랐는데 자세히 보니 I형강이어서 더 놀랐다. 이 형강들이 경사면/ 역경사면/ 수직면 모두에 대응하기 위해 다이아몬드 모양으로 배열되어 있고 이 형강들은 커튼월 하중을 지지할 뿐 아니라 내진구조역할도 하고 있다고 한다. 너무나 오묘한 빛으로 나를 매료시켰던 유리는 바깥쪽에 두개의 유리층+공기층+안쪽 유리층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바깥유리의 중간층에 알루미늄 금속 메쉬망이 들어가 있다. 이 금속 메쉬의 패턴이 멀리언과 같이 다이아몬드 모양의 패턴이어서 직사광선을 적절히 차단하면서도 조망은 충분히 가능하게 했다고 한다. 그리고 가장 바깥면의 유리는 저철분유리를 사용하여 맑은 빛이 들어올 수 있도록 계획되었다고 한다.
경사면의 보이드를 다양하게 바라보고 있는 공간들
컬러감은 신박했으며 꽤나 이상했던 에스컬레이터.
5개의 안정적인 영역 중 하나. 보통의 서가처럼 보이나 일반적인 분류법을 따르지 않았다고 한다.
몰랐는데 서가 바닥에 쓰여 있는 숫자는 Book Spiral의 표기이기도 하고 경사진 레벨을 알려 주기도 한다.
노랑, 빨강, 블루의 강렬한 컬러감들은 내부를 더욱 다채롭게 만들고 있었다
강당으로 올라가는 계단. 빨간색의 강당이 아주 멋진 것 같던데 들어가 보지는 못했다.
어둑어둑해지면서 조명이 하나둘씩 켜지는데 이 공간을 더욱 근사하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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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만큼 보이는 게 만고의 진리이지만 나에게는 때로 통하지 않는 것 같다.
아니 자주 통하지 않고 있다.
글쎄...내가 이 건물에 대해 잘 알고 갔다고 해서 과연 이 감동을 제대로 느낄 수 있었을까?!
오히려 돌아와서 건물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았을 때 더 이해가 쏙쏙 되고 눈에 잘 들어온 것 같다.
게다가 도서관은 내부를 돌아다니는데 아무도 나를 제지하지 않았다.
이후에 다른 도서관들도 그랬다.
나는 책상이 있는 공간이라면 어디에서든 태연하게 자리를 잡고 앉아 하고 싶은 걸 했다.
마치 동네 도서관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말이다.
밴쿠버의 공공도서관에서도, 뉴욕의 공립도서관에서도, 포르투갈의 세랄베스 미술관에서도, 프랑스 님의 까레다르 미술관에서도 그랬다. 아무도 나를 왜 들어가냐고 붙잡지 않았다.
도서관이라는 건물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방법은 그 도서관을 이용해 보는 게 아닐까 싶다.
우리가 이용하면서 공간을 느낄 수 있는 몇 안되는 용도이기 때문이다.
하고 싶은 걸 하면서 몇 시간이고 그 곳을 느끼다 보면 빛이며 조명이며 공간이며 재료며 분명 눈에 들어오는 게 있을 것이다. 설사 건축적으로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상관이 없지 않을까!
이 날의 나처럼 그 안에서 좋은 추억을 만들고 간다면 말이다.
시애틀에 머물렀던 단 하루의 시간
마침 비가 와서 누렸던 행운
비 오는 시애틀은 더욱 운치가 있었고 이 날의 행운은 나를 더욱 풍요롭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