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오후 차를 몰아 박경리 작가 기념관에 다녀왔다. 그녀가 영원히 잠들어있는 미륵도가 강구안을 사이에 두고 숙소 창에서 마주 보여 매일 문안 인사를 드리듯 바라보았다. 기념관과 작가의 묘소는 미륵도 중간 산언저리에 자리하고 있었다.
숙소에서 보이는 미륵도는 거대한 산처럼 우뚝 솟아 있다. 멀리서 바라보던 섬은 초록으로 덮여 아름다워 보였는데 가까이 가서 보니 나무가 빽빽이 들어찬 험하고도 깊은 숲이었다. 작가로서 한국문학의 큰 산으로 우뚝 솟았으나 한 여성으로선 저 숲처럼 깊고 험난했던 그녀의 삶이 미륵도의 모습과 닮아 보였다.
박경리 작가는 본명이 박금이로 어린 시절 통영의 유복한 가정에 태어났으나 아버지가 딴살림을 차려 외로운 엄마를 곁에서 보며 자랐다. 아버지의 작은댁에게 등록금을 얻으러 갔다가 혼이 난 적도 있었다 한다.
작가는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세병관에서 국민학교를 다녔다. 조선 시대 경상 충청 전라 삼도 수군을 호령하던 통영 세병관이 일제 때는 기둥을 칸막이로 막아 국민학교로 사용되었다. 세병관과 충렬사를 드나들며 이순신 장군에 대해 듣고 민족정신을 키웠다한다. 학창 시절엔 용감하게도 칠판에 '대한국독립만세'란 글을 써놓기도 했다하니 씩씩한 소녀였나보다. 여고시절에는 직접 연극대본을 써 공연을 할 정도로 이미 글솜씨가 남달랐다. 400년 역사의 세병관과 충렬사는 조선을 지켜낸 장군 이순신과 한국 문학의 큰 맥을 지켜낸 작가 박경리와의 인연을 잇는 가교 역할을 한 셈이다.
진주여고를 졸업하고 거제사람 김행도와 결혼 후 전매국에 발령받은 남편을 따라 인천에서 살았다. 배다리 마을에서 그녀는 헌책방을 운영하고 남편은 직장을 다녔다. 책 읽기를 워낙 좋아해 아기를 업고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아 어떨 땐 남편이 퇴근하는 것도 모를 정도였다. 그런 아내를 본 남편이 공부를 더 해보지 않겠냐 권해 수도여자사범대학을 다닐 수 있었고 교사로서 일하게 되었다. 아내의 재능을 알아보고 키워주려는 남편의 속 깊은 배려가 지금의 박경리 작가를 만든 것인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든든한 지원자였던 남편을 결혼 5년 만에 6.25전쟁 통에서 잃는다. 서울이 잠시 공산정권하에 들어갔을 때 남편이 공산당을 도운 일로 인해 서울 수복후 체포되 옥고를 치르다 떠났다. 그 후 좌익 가족이란 누명을 쓰고 힘겹게 살았다. 운수업을 하던 아버지도 피난지에서 사망하고 어린 자식들과 어머님을 돌보는 가장이 되야했다. 이후 어린 아들마저 앞서 보내게 된다. 연이어 닥치는 불운의 시간들을 딸하나를 바라보며 홀로 버텨내야 했다.
글로는 먹고 살기 어려워 재봉틀로 바느질하며 생활을 했다. 생활고로 원고지도 아껴가며 썼다한다. 작가는 말한다. "그때는 관공서 일이든 무슨 일이든 남자가 가면 한번 만에 해결해 줄 일을 여자이기 때문에 서너 번 걸음에도 잘 해결되지 않아 심신이 피로했다. 그럴수록 자존심은 강해지고 모멸당하지 않겠다는 의지는 더 강해졌다." 그녀의 시 '옛날의 그 집'에는 그 시절 여자 혼자 살아내기가 어떠했는지 엿보인다. '나를 지켜주는 것은/ 오로지 적막뿐이었다/ 대문 밖에서는/ 늘/ 짐승들이 으르렁거렸다/늑대도 있었고 여우도 있었고/ 까치 독사 하이에나도 있었지..
기념관 한편에는 평소 간직하던 세 가지 물건 국어사전, 재봉틀, 소목장이 나란히 전시되어 있었다. "걸레같이 변한 사전은 나의 글이요 문학이고, 해방 후 구입한 이 재봉틀은 나의 생활이며, 이 장은 내 삶의 근본이며 예술이니 영원히 간직할 것이다" 했다. 그녀의 방에 항상 함께 하던 나비 문양의 장롱인 소목장은 할머니 집에 불이 났을 때 아버지가 유일하게 들고 나온 물품인데 선생이 물려받았다.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일본어 교육을 받고 자라 우리말 받침을 힘들어했다 하니 수많은 작품을 쓰며 사전을 얼마나 파고 또 팠을까. 국어사전이 너덜너덜 했다.
1955년 현대문학에서 김동리 추천을 받아 단편 <계산>으로 등단하게 된다. 당시엔 추천한 작가가 그 작가의 필명을 지어주는 게 관례였다. 그래서 마치 돌림 이름처럼 김동리에 이어 박경리란 이름을 받게 된다. 작가는 그때 상업은행에 근무했는데 추천 받음에 너무 기뻐 어떻게 귀가했는지 모를 정도였다 한다. 그 후 2차 추천을 받고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을 하게 되었다. 1962년 장편 <김약국의 딸들>을 비롯해 <파시> <시장과 전장> 등 사회 현실에 대한 비판이 강한 문제작을 많이 발표하며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도회적인 <시장과 전장>과 토속적인 < 김약국의 딸들>, 이 두 작품을 어우러 만든 게 <토지>였다. 한국문단에 길이 남을 대작 토지는 1969년에 쓰기 시작해 1994년까지 25년의 열정이 녹아있는 작품이다. 한국 격동기의 49년 근현대사를 최참판댁 4대의 삶을 통해 엿볼 수 있다. 소설은 하동 평사리 배경이며 이야기는 일제강점기를 거치고 해방되면서 마무리된다. 일황이 항복한다는 방송에 사실인지 믿기 어려워하며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는 게 마지막 장면이다.
작가는 토지를 쓰는 중에 유방암 수술을 받았다. 수술 후에도 붕대를 가슴에 질끈 동여매고 아픔을 견디며 작품을 계속 써 내려갔다. 글이 없으면 삶의 터전이 없었다는, 목숨이 있는 한 글을 써야만 했다는 그녀에게 글쓰기는 전생에 이루지 못한 어떤 인연이었을까. 주술에 걸린 죄인처럼 글을 썼다는 박경리 작가를 보며 작가란 온 생을 다해 영혼의 밑바닥까지 다 털어내야만 하는 천형을 받은 사람인걸까 생각해본다.
전시관을 천천히 걸으며 그녀의 삶을 되짚다 언젠가 읽은 어느 신문기자의 글이 떠올랐다. '해질녁 찬바람이 몰아치는 서대문 형무소 높은 돌담 아래 한 여인네가 아기를 들쳐업고 서성이고 있었다. 김지하 시인이 오늘 석방된다는 소식에 취재를 위해 차 안에서 기다리는 중이었다. 누굴까 저 여인네는.. 생각하다 박경리 작가임을 알게 되었다." 겨울 저녁 매서운 바람을 맞으며 손주를 들쳐업고 사위 김지하의 석방을 기다리던 그녀의 모습이 아픈 장면이 되어 가슴으로 박혔다. 딸의 삶도 안고 가야 했던 그녀의 심정을 감히 짐작해 본다.
작가는 1953년 고향을 등진 후 50년간 통영 땅을 찾지 않다가 2004년 처음 고향땅을 밟았다 한다. 그녀에게는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젊은 시절 아픔이 서려있는 고향이 따뜻하고 그립기만 한 곳이 아니었을지 모른다. 어쩌면 고향을 등진 게 아니라 사무치게 그립지만 아픈 기억을 마주하기가 두렵지 않았을까. 50년 만에 고향에 왔을 때 세병관 기둥을 잡고 울면서 이 기둥은 내 마음의 의지처였다고 했다 하니 그 험한 세월을 살아내며 기댈 때라곤 문학밖에 없었던 그녀의 삶에 마음이 아렸다.
기념관에서 나와 묘소로 가는 길은 언덕을 한참 올라야 있었다. 가파른 언덕과 계단조차 그녀의 지난했던 삶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그녀의 시 '산다는 것'을 떠올려본다. '속박과 가난의 세월/ 그렇게도 많은 눈물 흘렸건만/ 청춘은 너무나 짧고 아름다웠다/ 잔잔해진 눈으로 뒤돌아보는/ 청춘은 너무나 짧고 아름다웠다/ 젊은 날에는 왜 그것이 보이지 않았을까'
"어무이, 원하는 책 골라보소 내 사주께요"
"여 있는 책 내 다 읽었소. 더 이상 선생의 새로운 글을 읽을 수 없으이 그기 참 섭섭하요"
90대 어머니가 아들과 기념관을 방문했나 보다. 나 또한 그녀를 글로서 다시 만날 수 없음이 사뭇 서운하고 그립다.
박경리 작가의 유고 시집 한 권을 사서 나왔다.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던 작가는 어떤 것을 버리고 갔을까. 남편에 대한 그리움일까, 첩을 두고 살던 아버지에 대한 원망일까, 외로이 살던 어머니에 대한 연민일까, 이념과 정권의 소용돌이에서 살던 고된 시간들일까, 녹록지 않던 삶 속에 쌓인 수많은 애증의 기억을 마침내 내려놓고, 버리고 가니 홀가분하다는 그녀. 죽어서야 고향땅에 돌아와 통영 바다를 바라보며 잠든 작가는 어머니의 태 안으로 다시 돌아온 듯 편안해 보인다. 그녀가 이젠 따뜻한 꿈을 꾸길 빌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