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 바다가 보이는 망일봉 기슭에 청마 문학관이 자리하고 있었다. 깎아지른 듯 높은 언덕을 계단을 세어가며 숨차게 올랐다. 가쁜 숨을 고르려 정원에 잠시 앉아있으니 매표소 직원이 30분 후 문을 닫을 예정이라며 서둘러야 할 거라 한다. 이곳은 2000년 개관한 청마 유치환 선생의 문학작품과 유품을 전시한 곳이다.
문학관 입구를 들어서니 큰 흑백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통영문화협회 야유회 사진이라 적혀있는데 당대 통영문화와 예술의 중심이 된 인물들이 모여 있었다. 1950년을 전후로 통영은 문화의 르네상스였다. 이 시기에 통영에서는 유치환을 회장으로 윤이상 전혁림 김상옥 정윤주 김춘수 등이 통영문화협회를 결성하여 한글강습회, 농촌계몽운동, 연극 공연 등 다채로운 문화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통영의 르네상스 시기란 말에 과히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 당시 어떤 우주의 변화가 있었던 걸까. 한국의 쟁쟁한 예술가들이 같은 시기 같은 도시에 이렇게 한꺼번에 나타날 수 있다니.
유치환은 1908년 경상남도 거제군에서 5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나 2살 때 충무로 이주하여 유년기를 보냈다. 한의사였던 아버지 덕분에 비교적 유복하게 자랐다. 학창 시절은 일본 유학과 부친의 사업실패로 귀국, 연희전문학교(현재 연세대학교) 진학과 보수적인 학교 분위기에 적응 못하고 중퇴하는 등 평탄하지만은 않았다.
시를 쓰면서 한때 사진관을 경영하기도 했다. 그 뒤 여러 직업을 전전하던 중 1937년(29세) 부산의 화신 지사를 그만두고 통영으로 귀향해 교사가 되었다. 1940년 교사를 사임하고 만주로 피신했다가 해방 후 귀국하여 다시 교육계에 투신, 충무 부산 경주 등 지방에서 국어교사로 근무하였으며 훗날 여러 학교의 교장을 역임했다.
1931년 '문예월간'에 시 '정적'을 발표하여 등단한 청마는 이후 각종 문예지와 월간지를 통해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한다. 초기 시의 대표작으로 널리 애송되고 있는 '기빨'은 1936년 '조선문단'에 발표한 것이다. 문단에 데뷔한 지 8년 만에 처녀시집'청마 시초'를 출간하고 1965년 마지막 시선집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이르기까지 12권의 시집을 발간한다. 그의 열정적인 작품 활동은 시뿐 아니라 소설 동요 동시에서도 빛을 발했다.
청마의 시는 당대 시단의 서구 지향의 방법론과 달리 생명의 깊이를 탐구해 정신적인 영역을 지향하였다. 의지와 관념을 주조로 한 남성주의 시풍을 확립했다. 해방 후 민족문학 재건에 공헌했고 비인간성 비판과 조국애를 노래함으로써 당대 시인들과는 다른 영역을 개척하며 한국시에서 독자적 위상을 확보한다.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아예 애련에 물들지 않고/ 희노에 움직이지 않고/ 비와 바람에 깎이는 대로/ 억년 비정의 함묵에/ 안으로 안으로만 채찍질 하여/ 드디어 생명도 망각하고/ 흐르는 구름/ 머언 원뢰/ 꿈 꾸어도 노래하지 않고/ 두쪽을 깨뜨려 져도/ 소리 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
일제 강점기에 소리 내지 못하고 꿈을 펼칠 수 없었던 수많은 이 땅의 젊은이들, 안으로만 채찍질하여 꿈꾸어도 노래하지 않는 깨뜨려져도 소리하지 않는 바위가 되고 싶다는 젊은 영혼의 절망이 사무치게 아프다.
권력 앞에 비굴하지 않으려 애쓰던 당시 젊은이들의 모습이 그의 글에서 읽힌다
'인간이 없는 곳에 인간이 버림받는 곳에 시고 예술이고 아예 있을 리 없다. 내가 진정한 시인이 못되고 따라서 나의 쓴 시들이 인간과 인생을 보다 소중히 다루었으므로 시가 못되더라도 내게는 하나 애석하거나 분스러울리는 없다. 오직 진실로 내가 분히 여길 일은 만에 일이라도 시 쓰는 내 인생을 연명하기에 비굴하게도 권력 앞에 아유구용 하거나 시를 지키기 위해 인간을 버리는 길을 취하는 경우에 한할 것이다' - 청마의 산문 '문학과 인간'중에
통영여중 재직 당시 가정교사로 근무했던 시인 이영도에게 살아생전 20년 동안 연애편지를 써서 보냈다. 이영도는 21세에 남편을 잃고 외동딸을 홀로 키우고 있던 과부였다. 두 사람은 현실의 만남을 갖지 않았다고 한다. 처음 만나게 된 1947년부터 교통사고로 죽게 된 1967년까지 짝사랑에 대한 고통, 설렘과 기쁨을 5천여 통의 편지를 통해 전했다. 그중 200통을 추려 유치환이 죽고 나서 두 달 후에 <사랑했으므로 幸福하였네라> 제목의 책으로 출간되었는데, 당시로서는 기록적인 부수인 25,000부를 찍어냈다. 이영도는 위에 나온 책 판매 수익을 모두 기부했다.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더욱더 의지 삼고 피어 흥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한망울 연련한 진홍빛 양귀비꽃인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그리운이여 그러면 안녕!/설령 이것이 이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전시장 한편엔 빛바랜 그의 친필 원고와 편지들이 있었다. 만주 피난지에서, 교직생활 중에, 그리고 6.25 전쟁 중에도 틈틈이 시를 쓰고 시집을 발표하였다. 그의 1000여 편의 주옥같은 시에서 일관되게 보여주는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은 시대를 아우르는 공감을 준다. 우리가 끝까지 소중히 간직해야 할 것들은 인간과 생명 그리고 희망임을 그는 노래한다.
전시관을 나오며 방명록을 펼치니 오늘 이 문학관에 우리가 유일한 방문객이었다. 의아해 묻는 내게 안내인이 말했다. 서울에서는 청마의 형 유치진을 친일로 여겨 동생인 유치환도 배격하는 분위기라 방문객이 많이 줄었다고.
청마문학관 언덕에 서니 멀리 박경리 작가가 잠든 미륵도가 보였다. 박경리는 6.25 전쟁 때 남편이 공산당에 잠시 협조한 혐의로 남편을 잃고 좌익 가족 낙인이 찍혀 힘든 세월을 살았다. 청마와 박경리는 멀리서 마주 보며 힘든 시대를 살아온 자만이 할 수 있는 위로를 서로 나누고 있지 않을까.
친일과 좌익 우익이 다 무엇인가. 반세기도 못버틸 이념들에 매여 서로 옳다 그르다 하며 살아가는 인간군상이 씁쓸하다. "여기서 죄 없는 자는 이 여자에게 돌을 던지시오." 하던 예수의 말이 떠오른다. 과거청산이란 이름으로 끝없이 밝혀내고 숙청을 해나가다 보면 인간의 역사에서 언젠가는 더 이상 비겁하지 않고, 순결하고, 죄 없는 인간 만이 나올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