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리 작가 생가를 찾아 집을 나섰다. 세병관을 지나고 서문고개를 향해 올랐다. 햇살이 따갑게 내리쬐는 여름 같은 봄날이다. 까꾸막을 오르며 어느 골목인지 헤매다 지나는 노인장에게 "혹시 박경리 선생 생가가 어딘지 아시나요?" 여쭈니 두 골목 더 가서 왼쪽으로 올라가면 마지막 집이 생가라며 자세히 가르쳐 주신다. 그래도 못 미더운지 가던 길 멈추고 몇 번을 뒤돌아 보고는 다시 돌아와 안내해 주신다.
통영에서 만난 사람들은 한결같이 친절했다. 중앙시장 김치가게 아주머니도 어느 식당 국이 맛있냐는 물음에 국집을 소개하다 "아이구 새댁, 이웃이니 내가 가면 싸고 많이 줄끼구마. 내가 퍼뜩 가서 사다줄테이깐 기다리 보소" 하며 직접 국을 한 사발 사다 주셨다. 새댁 소리에 그저 좋아 기다렸다는 나.
서문고개 오르는 길 오른편에 '김약국의 딸들 배경이 된 마을'이란 설명이 나온다. 학창시절, 한 가정이 저주를 받은 듯 몰락해가는 그 작품을 읽을 땐 여느 서스팬스 소설에 버금가는 오싹한 한기를 느꼈었다. 운명은 스스로 개척하는 것이라 여겼는데 이 작품을 읽고는 인간은 운명을 거스르기 힘든 존재인가 하는 의문이 일었었다. 인간의 의지를 넘어서는 운명이 가슴 아팠다. 작품에 나오던 서문고개, 명정샘, 대밭골, 충렬사, 하동집과 느티나무란 이름이 반가웠다. 서문고개에 오르니 소설 속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 있었던 일처럼 여겨져 김약국의 동네 구석구석을 돌아보는 마음이 아렸다.
까꾸막을 땀 흘려 오르니 골목 입구에 '박경리 생가 가는 길' 이란 안내판이 보인다. 좁은 골목을 따라 들어가 본다. 목적지가 가까워질수록 오래토록 사모하던 이를 만나러 가는 것 같아 설레었다. 동네 개가 낯선 이가 지나가니 짖어댄다. "알았어 네 임무 잘하고 있는 거 아니까 조금만 짖어요"
골목 끝무렵에 다다르자 붉은 타일벽의 집이 나온다. 담벼락에 조그맣게 '박경리 생가' 팻말이 붙어있다. 그동안 주인장이 여러번 바뀌어 옛 모습 그대로는 아니라 했다. 현재도 주민이 살고 있어 들어가 볼 수는 없다 해서 아쉬웠다. 작품으로만 작가를 만나며 사모하다 생가터를 와보니 오래 알고 지낸 인연처럼 살갑다.
이웃에 사는 분이 지나가다 말을 건다. "그 집은 박경리 선생 외가입니더. 옛날엔 결혼하믄 신랑이 몇 년간 처가살이하는 풍습이 있었지예. 박경리 선생 아부지가 처가에 있을 때 선생이 태어난기라예. 집은 쬐끄맣고 초갓집이었는데 가난했지예."
마당안이 들여다보이는 철대문은 굳게 잠겨 조용하다. 대문에 손을 얹고 훌륭한 글솜씨 조금이나마 전수해 주십사 기도해본다. 한동안 집 앞에 서서 그녀를 생각했다. 이 집에서 태어날 때 많은 사람의 축복을 받았으리라. 어린 박금이(박경리선생의 본명)가 깡총거리며 골목을 뛰어다니는 모습이 보였다. 그녀의 삶이 비록 지난하고 외로웠으나 이곳에서만은 행복했을 것이다. 김약국의 딸들이나 다른 작품에 이 서문고개가 자주 등장하는 걸 보면 어린 시절 동네 기억이 어린 박금이에게 아름다운 추억으로 깊이 박혀 있었던 게 아닐까.
골목을 나와 우측으로 오르니 어제 왔던 서피랑이다. 생가 뒤를 돌아가니 쓰러져가는 폐가가 있었다. 담 한켠은 허물어져있고 지붕은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내려 앉아 있었다. 작은 방 두 개와 왼쪽으로 부엌이 있다. 툇마루는 썩어가고 곳곳에 거미줄이 쳐지고 엉겅퀴가 마루를 뚫고 자라 보랏빛 꽃을 피웠다. 가까이 가 자세히 보니 세간이 그대로 있다. 방안엔 작은 자개장이 부엌엔 가마솥이 걸린 채 있다. 방으로 내려앉은 천장이 자개장에 닿을 듯 쳐져있다.
마치 망해버린 김약국의 집을 보는 듯해 기분이 묘했다. 금방이라도 김약국의 딸들이 걸어 나올 듯하다. 누가 살던 집일까. 모두 떠나고 혼자 살아내다 연고 없이 쓸쓸히 세상을 등졌을까. 저 쳐진 천장만큼 삶의 무게가 힘들진 않았을까.
김약국의 딸들을 쓰며 작가는 운명을 거스르지 못하던 자기 삶의 무게를 투영시켰던 것인지도 모른다. 고향 통영을 떠나며 불행의 사슬에서 벗어나 삶을 개척하던 김약국의 둘째 딸 용빈과, 통영에서의 힘든 삶의 수레바퀴를 벗어나 자기만의 길을 걸어온 작가 박경리가 오버랩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