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에 머물 거라 하니 지인들이 이구동성으로 통영 가면 이건 꼭 먹어보고 와야 한다며 음식 리스트를 줄줄이 보냈다. 바닷가니 싱싱한 회는 기본이고 갓 잡아 온 해산물로 가득한 해물뚝배기, 멍게 비빔밥, 대구뽈낙찜, 멸치회, 돼지국밥, 굴국밥, 굴전, 통영 꿀빵까지 이 무진장한 음식을 과연 잘 찾아 먹을 수 있을는지 행복한 고민에 빠졌다. 미국에서는 맛볼 수 없는 진짜 내 나라의 음식을 맛볼 수 있다는 기대감 만으로도 떠나기 전부터 미리 설레었다.
통영은 전라 경상 충청 삼도수군 통제령이 있던 곳이라 세 지역의 음식이 자연히 유입되었고 한성에서 부임해 오는 양반들을 따라 한성 음식까지 따라오게 되어 여러 지방의 음식 문화가 발달된 곳이다.
도착한 첫날 통영 활어 시장에 들러 멍게와 해삼 맛부터 보았다. 멍게와 해삼은 어릴 때 많이 먹어 가끔 집이 그리울 때 먹고 싶었다. 미국엔 냉동 멍게뿐이지만 그나마도 맛볼 수 있음에 위안을 삼고는 했다. 맛집을 찾고 할 것도 없이 숙소 아래 활어시장에만 가도 각종 해산물 식당들이 널려있었다.
봄엔 도다리 쑥국, 겨울엔 물메기탕과 굴국밥이 별미라 해서 봄맛이 듬뿍 나는 도다리 쑥국 한 그릇을 시키고 충무김밥의 본고장이니만큼 충무김밥도 샀다. 충무김밥은 해상 거래가 활발하던 바닷가에서 주전부리를 만들어 팔던 행상들이 따뜻한 남쪽 날씨에 상하기 쉬운 김밥을 밥과 반찬을 분리해 팔기 시작한 게 기원이 되었다 한다.
통영꿀빵은 이곳 명물이었다. 튀김 도넛 속에 각종 앙금을 넣고 엿을 발라 깨를 뿌려 촉촉하면서도 고소했다. 관광객들이 너도나도 줄을 서서 샀다. 꿀빵 가게는 강구안 해안가로 여러 집이 늘어서 서로 경쟁이 되다 보니 빵 안에 팥앙금이나 유자청등 각종 다른 재료를 넣어 집집마다 개성을 뽐내고 있었다.
펄떡펄떡 살아 숨 쉬는 해산물로 가득한 활어시장 구경도 신기했다. 냉동 생선이나 사 먹을 수 있는 미국 우리 동네 마켓만 보다가 살아있는 해산물을 보니 신이 났다. 재료가 싱싱하면 음식은 절로 맛난 법인데 주부로선 이런 먹거리로 요리할 수 있음이 그저 부러울 따름이었다.
인플레이션으로 오른 물가 때문에 며칠 지내며 먹은 외식비 지출이 제법 되었다. 숙소 주인장이 중앙시장 주위엔 관광객 상대의 음식점이라 비교적 비싸다며 이곳 터줏대감들이 가는 맛있고 싼 음식점 리스트를 주었다. 배달도 되고 가격과 맛까지 흡족한 음식들이었다.
인터넷에 올라온 맛집 리뷰만 보고 찾아간 식당은 실제로는 가격이나 맛에서 만족도가 높지 않은 데다 주차하기 힘든 시장터에서 맛집 찾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배달의 민족답게 어디든 가능하다는 한국 특유의 배달 문화를 즐겨보기로 했다. 또한 식비를 절약하기 위해 하루 한 끼만 외식을 하고 나머지는 장을 봐서 직접 만들어 먹기로 했다.
미국에선 그동안 피자 외에 배달되는 게 없어 당근 하나를 사려해도 차를 몰고 가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다. 팬데믹이 되면서 다행히 한국식 배달문화가 미국에도 유입돼 다소 나아지긴 했으나 배달비가 음식비만큼이니 엄두를 내기 힘들다.
중국집 짬뽕부터 튀김닭, 해물찜 요리까지 집에서 앉아 즐기는 음식에 한동안 신이 났다. 한 가지 문제점은 배달앱을 이용하려니 전화 인증제도로 막혀 한국 전화번호를 받기 힘든 외국인이 앱을 이용하기는 불가능했다. 할 수 없이 전화로 배달 주문을 했는데 또 다른 난관은 외국 신용카드로 결제하기가 어렵다는 것이었다. 어떤 날은 현금이 부족해 배달원에게 신용카드를 주고 그릇 찾으러 올 때 카드를 되돌려 받는 모험도 감행했다. 다행히 요즘 한국은 도난 사건이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했다. 높아진 시민정신에다 CCTV 카메라가 곳곳에 설치되어 있어 공공장소에 물건을 두고와도 며칠 후 찾으러 가면 제자리에 있다는 것이다.
비 오는 날엔 숙소 주인장이 권한 돼지국밥집을 찾았다. 바닷가에서는 해물이 우선 일 것 같은데 돼지국밥이라니 잘 어울리는 것 같지 않았지만 통영 토박이가 권하는 음식이니 먹어보기로 했다. 만화가 허영만은 <식객>에서 설렁탕이나 곰탕이 아스팔트 포장도로라면 돼지국밥은 비포장도로 같다 했다. 거칠면서도 서민의 입맛을 대변하는 맛이란다. 추운 날 국밥집에 문을 열고 들어서면 훈훈한 국밥 냄새와 온기가 일단 몸과 마음을 무장해제시킨다. 집에 돌아온 듯 편안해지고 "이모, 여기 국밥 한 그릇요!" 하며 큰소리로 주문을 하고 싶어 진다. 싸고 든든한 국밥은 하루를 열심히 일한 사람들을 위로하는 맛이다. 한기가 도는 비 오는 날 뜨끈한 돼지국밥 한 그릇으로 정말 영혼까지 충분히 따뜻해졌다.
흔한 중국집 짬뽕도 통영에선 싱싱한 해산물이 가득해 맛이 달랐다. 한국에 오면 해보고 싶었던 일이 짜장면과 짬뽕을 배달시켜 먹는 거였는데 거의 22년 만에 배달 중국음식을 먹어보게 되었다. 한국에 살 때는 별거 아닌 일들이 외국에 살다 보니 별일이 되었다.
주인장 집 마당에 키우는 백봉오골계 계란도 먹거리에 한몫했다. 일반 계란보다 크기가 작고 처음 낳은 알인 초란은 그보다도 작았다. 주인장이 갓 낳은 계란이라며 가끔 건네주었는데 어느 날은 이틀 연거푸 노른자가 두 개인 쌍란이 나와 신기했다. 쌍란은 행운을 준다 해서 미국 돌아와 뒤늦게 그날 복권을 샀어야 했다며 웃었다. 고등학교 입시시험 치르는 날 엄마가 달걀 요리를 해주었는데 그때 쌍란이 여러 개 나와 시험 잘 치를 건가 보다며 좋아했던 기억이 났다.
재미난 것은 통영의 거의 모든 식당들이 TV에 소개되었는지 너도나도 방송에 나왔던 사진을 붙여 놓고 있었다. 통영이 얼마나 인기가 있었으면 도시 구석구석이 취재 대상이 되었나 싶을 정도였다. 통영이 요즘 한국에서 가장 뜨는 곳이라 했던 친구 말이 떠올랐다.
먹거리가 주는 즐거움은 다른 무엇보다 우선일 것이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란 말이 달리 나왔겠는가. 음식은 우리에게 추억을 불러일으키고 우리 몸을 살리고 살아갈 힘을 준다. 어떤 음식이 자주 식탁에 오르냐에 따라 그 집안의 병력을 파악할 수도 있고 어떤 음식을 좋아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성격을 가늠할 수도 있다 한다. 식탁에 차려진 음식을 보면 가족의 건강을 챙기는 안주인의 마음가짐이 보이기도 한다. 먹거리가 풍부하다는 것은 그 지방 인심이 후하다는 것을 말해주기도 한다. 풍성한 먹거리 속에 사는 통영 사람들은 그래서 인심도 넉넉한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