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려수도 570개의 섬 중 어느 섬을 방문할지 선택이 쉽지 않았다. 섬마다 각기 다른 매력이 있기에 더더욱 어려웠다. 이충무공이 머물던 한산도를 가보기로 했다. 오후 한 시가 넘어서 한산도를 향해 통영 여객선터미널을 갔다. 아뿔싸! 매표소 앞에서야 신분증인 여권을 가지고 오지 않은 게 생각났다. 다행히 핸드폰에 찍어둔 여권사진으로도 통과되었다. 한산도에 둘러볼 곳이 많은지 매표소 직원이 연거푸 섬에서 하루 묵을 거냐고 묻는다. 돌아오는 마지막 배가 6시 30분이라고 거듭 말한다. 남자친구가 아니라 남편과 가는 길인데 말이다. 학창시절 막차 막배에 대한 사연들이 생각나 웃었다.
터미널을 둘러보니 한 곳에 민원서류 자동기기가 설치되어있다. 나 같은 깜빡이를 위해 주민등록 초본이나 등본을 즉석에서 뽑아낼 수 있단다. 아주머니 한분이 서류를 뽑고 싶은가 본데 지문인식이 잘 안 되는지 본인인증이 안된다고 기계가 연거푸 소리친다. 농사 짓는 분 같은데 지문이 닳을 정도로 일하신건지.
차를 배에 실어야 해서 남편이 차를 대는 동안 나는 점심거리를 찾았다. 건너편 서호 시장터에 충무김밥집이 줄을 서있다. 매표소 아저씨에게 어느 집이 맛있냐 물으니 그중 한 곳을 가르쳐준다. 그 옆에 통영 칼국수집이 더 구미가 당겼지만 섬까지 싸들고 갈 수 없으니 할 수 없다. 김밥가게 안은 팬데믹으로 투고만 해서인지 손님이 없었다. 식당 직원은 연변 사투리를 썼다. 충무김밥 8개 5500원 2인분 포장해 떨래 떨래 들고 터미널로 왔다. 20분 전부터 개찰이다. 그런데 막상 개찰과 승선 시에는 신분증 확인도 없다. 표에는 본인 이름과 생년월일만 적혀있는데 사고 시에 본인이 승선했는지 확인할 방도가 있는지 염려된다. 신분증 확인을 소홀히 하는 직원들이 그런 염려는 안 하는 건지.
한산도는 세계 4대 해전사에 빛나는 한산대첩의 주 무대다. 이 섬은 한려해상 국립공원의 중심지이자 삼도수군 통제영(지금의 해군사령부)이 최초로 설치됐던 섬이다. 이순신 장군은 총 23번의 전투에서 23전승을 했다. 무패였다.
이순신은 1545년 한성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32세에 무과에 합격해 45세에 정읍 현감, 47세에 전라좌수사에 임명된다. 48세에 임진왜란이 발발해 54세에 노량해전에서 전사한다. 후에 인조가 '충무' 시호를 내리고 정조가 영의정으로 올려 모신다. 슬하에 3남 1녀를 두었다.
조선의 군선은 왜선보다 우세했다. 왜놈의 노략질을 막기 위해 조선의 군선이 발달되었다. 왜선은 멀리 와서 노략질을 하고 빨리 도망가야 했기에 가볍고 속력이 빨랐으나 빠르게 달리며 총을 쏘다 보니 명중률이 낮았다. 그러나 조선의 판옥선은 왜선보다 선체가 높아 싸움에 유리했고 평평한 구조라 해안선에 접안하기도 유리했다. 판옥선은 임란 당시 조선 수군의 주력 군선으로 한 갑판 위에 노를 젓는 군인과 전투원이 함께 있어 전투에 방해가 되자 이후 갑판을 한층 더 올려 노군과 전투원을 아래 윗층으로 분리했다. 거북선은 이충무공이 판옥선에 상판을 덮어 개조한 돌격선이다.
일본은 조총이, 조선은 화포가 우세했다. 왜군은 적선을 갈고리로 찍어 당겨 배위로 올라와 싸우는 등선 육박 전법을 썼다. 그래서 장군은 조선 수군을 보호하기 위해 배위 갑판을 덮은 거북선을 만든다. 섬 사이의 좁은 수로(량)에서 많은 배들이 싸우기가 힘들었고 육지에서의 싸움은 백성들의 피해가 크니 장군은 적을 바다 쪽으로 유인해 싸웠다. 언제나 백성의 안위를 우선에 두었다. 화포의 비거리가 1킬로미터였다 하니 배 위에서 육박전을 쓰고 조총으로 공격하는 왜군의 전술에 휘말리지 않으려면 먼 거리에서 포를 쏘는 방법이 유리했을 것이다.
여객선은 통영 터미널을 떠나 한산대첩이 벌어졌던 바다를 지났다. 불과 총성, 비명과 함성으로 가득 찼던 전쟁의 기억을 머금고도 바다는 더없이 잔잔하다. 쪽빛 바다 위에 군선 대신 요트가 한가로이 노닐고 있었다.
임진왜란 당시 그동안 이순신과의 연이은 패배에 분노해 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왜군에게 조선 수군 격파의 명령을 내리고 7월 상순에 견내량에 집결하기 시작했다. 이순신은 한산도 앞바다까지 적을 좁은 지역으로 유인해 뱃머리를 돌려 학이 날개를 펼치듯 적을 둘러싸고 공략하는 학익진 전법으로 적선을 모두 격침 괴멸시켜버린다. 이 한산대첩의 대승으로 전세가 뒤집혀 임진왜란의 전세는 조선에 유리하게 바뀌게 된다. 한산대첩은 임진왜란 3대 대첩으로 불린다. 적장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한산해전에서 이순신에게 대패한 후 인근 섬에서 해초로 연명했다고 한다.
여객선은 좁은 수로를 지나 한산도로 진입했다. 문어포 언덕 위에 높이 세워진 한산대첩기념비는 바다 맞은편 이순신공원에 우뚝 선 장군의 동상과 마주 본다. 문어포 이름은 왜군이 도망칠 길을 찾다 주민에게 이쪽이 바다로 나가는 길이냐 물어본데서 유래했다 한다.
"제게는 아직도 12척의 배가 있으니 죽을 힘을 내 항거해 싸우면 이길 수 있습니다" 선조가 수군을 해산하고 육군과 합세하라 명하자 국가의 존망이 걸린 수군을 없앨 수 없다고 이순신이 올린 징계다. 12척의 배 만으로 승산을 봐야 했기에 백성들을 모두 피신시키고 만일의 패배에 대비해 적이 사용할 수 없게 주위 시설을 모두 불태워버렸다. 당시 운주당도 함께 불타 없앴는데 운주당은 충무공이 난중일기를 쓰고 업무도 보고 부하들과 회의도 하고 바둑도 둔 소통의 공간이었다. 사랑하는 부하들과의 기억마저 다 태워 없애야 했던, 죽기를 각오한 싸움이었다. 143년 후 영조 때 통제사가 그 자리에 운주당을 다시 세우는데 이름을 바꾸어 '제압하여 승리하여 만든 집'이란 의미로 제승당이라 명했다.
제승당 뒤를 돌아가니 활터였던 한산정이 있었다. 당시 한양에서만 무관시험을 치르던 것을 이순신장군이 이곳에서도 무관시험을 치러 전쟁시 필요한 인원을 바로 보충할 수 있게 해달라며 선조에게 허락을 받아냈다. 이론과 형식에만 치우치지 않는 현실에 맞는 합리적 제도를 정착한 셈이다. 한산정은 오늘날 국궁 결승전이 열리는 곳이기도 하다. 국궁 선수들은 이곳에서 활을 쏴보는 게 꿈이라 한다. 충무공의 주특기가 활쏘기였다. 이곳에서 군사훈련도 했지만 부하들과 활쏘기 경기도 하고 술도 마시며 정을 쌓은 곳이다. 경기에서 진 사람이 쏜 활을 뽑아와야 했다 한다. 활이 꽂히는 과녁이 계곡을 지나 145미터나 떨어져 있었다. 경기에서 진 사람은 꽤나 애를 먹었을 것 같다.
한산도 야음 (閑山島 夜吟)
수국추광모 (水國秋光暮) /물의 나라에 가을빛 저물고
경한안진고 (驚寒雁陣高) /찬바람에 놀란 기러기 진 위에 높구나
우심전전야 (憂心轉輾夜) /가슴에 근심 가득 잠 못 이루는 밤
잔월조궁도 (殘月照弓刀) /새벽달 창으로 칼을 비추네
수루에 서서 그가 바라보던 한산도 앞바다를 보며 시시각각 다가오는 전운 앞에 잠 못 이루던 장군을 그려본다. 죽음을 목전에 둔 한 남자의 심정을 감히 헤아리다 십자가에 못 박히러 떠나는 예수란 남자의 마지막 만찬이 떠올랐다. 삶도 한번이지만 죽음도 한번 겪는 일이다. 어찌 사느냐도 중요하지만 어찌 죽느냐도 중요하다는 것을 두 남자는 말하고 있었다. YOLO( You only live once.)를 외치며, 한번 사는 인생인데 하고 싶은 일 맘껏 하고 살자고 외치는 이 시대에, 죽음도 한번 뿐(YODO You only die once.)이니 잘 죽어야 한다는 말이 마음에 와 닿을 수는 있을까.
한산도 해안 일주도로를 한 바퀴 돌았다. 추봉교를 넘어 봉암 몽돌 해수욕장을 거닐고 왔다. 몽돌 해수욕장엔 인적은 없고 몽돌들이 파도에 자갈자갈 소리를 내며 구르고 있었다. 수없이 구르고 굴러 죽고 또 죽어 몽돌이 된 영혼들이 해변을 지키고 있었다.
'필사즉생 필생즉사 (必死則生 必生則死) 죽고자 하면 살 것이요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다.' 명량해전 하루 전 부하들에게 당부하던 이충무공의 훈시가 머릿 속을 맴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