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대학생이 된 딸내미가 물었다.
우리는 왜 미국에 와서 살게 됐어?
선뜻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네 아빠랑 다시 시작해 보려고. 행여 환경을 바꾸면 나아질까 해서.
정말 그랬다.
우리가 미국으로 와서 난데없는 공부를 하기로 결정한 데는 그가 만난 여자들에게 그의 이력과 가정환경을 부풀리고 거짓말한 걸 알게 되었을 때다. 이미 아무것도 보태지 않아도 부끄러울 것 없는 그의 이력과 환경을 , 대단치 않아 뵈는 여자들 앞에서 부풀려 거짓으로 말했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나는 수치스러웠다.
열등감을 과장된 거짓으로 포장한 그의 못남이 부끄러웠다.
드러난 치부를 덮어주고 싶었다.
왜냐면… 내 아이의 아빠였기 때문에.
그런 내게 시아버지는 자식을 잘못 키워 미안하다며 깊은 한숨을 쉬셨다. 그리고 한 번만 더 기회를 줘 보자며 뭐든 지원하겠다고 약속을 하셨다.
그렇게 우리는 2001년 봄 미국 서부에 도착했다.
그가 거짓말했던 것을 현실로 이루면, 달라지리라 믿으며.
가족중심의 미국생활이 그에게 모종의 변화를 주지 않을까, 나은 사람이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아마도 공부한다며 지낸 그 3년여의 시간들은 내가 지낸 결혼 생활 중 그나마 가장 평화롭고 순탄한 인생의 휴가 같은 시간들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갈 데라곤 없는 작은 시골마을에서 시작한 단조로운 미국 생활이 나의 불안과 의심과 … 힘든 기억을 없애줬다고 할 순 없었다.
하지만 모든 게 눈에 보이는 단순한 생활은 이제 괴로움은 끝났을 거라고 … 그렇게 나는 주문 외듯 매순간 나를 다독거릴 만큼은 되었다.
나는 그가 좋은 친구를 사귀기를 바랐다.
그곳에 모인 같은 목적의 사람들과 어울리며 건전하고 긍정적인 삶을 꿈꾸게 되길 바랐다.
결혼이래 처음으로 사는 것 같이 살았다.
같은 유학생들과 어울려 밥 해 먹고 웃으며, 겉으로는행복하게… 남들처럼 소소한 하루를 지내며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둘째 딸이 결혼 10년만에 나에게 찾아왔다.
마냥 기쁘지 만은 않았다.
되레 당황스러웠다.
결혼 전부터도 딸을 소원하던 나였지만, 내가 이 불안정한 결혼에서 이미 생긴 첫째 아이도 버거운 마당에.. 둘째는 꿈도 꾸지 않았다.
게다가 그때는 내가 요리학교를 다니기 시작한 지 얼마되지 않았을 때였다. 결국 임신으로 인해 요리학교도 곧 그만둘 수 밖엔 없었지만.
항상 그와의 결혼이 언제든 끝날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혼자 살게 될 경우를 대비하여 여러 가지 궁리를 할 때였다. 예나 지금이나 여자의 경제력은 이혼을 생각할 때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는 가장 중요한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친정은 급한 불은 껐지만, 여전히 나는 친정의 큰아들 같은 딸이어야 했다.
동생들이 독립할 때까지,.. 를 되뇌며 내가 아이를 키우며 할 수 있는 일들을 찾는 일에 늘 고심했다.
그러니.. 갑작스레 생긴 둘째 딸은 나에게 그저 큰 부담이었다.
하지만 찾아온 생명을 죽일 순 없었다.
결혼생활이 순탄했다면 네 명의 아이를 두고 싶다고 늘 생각했던 나였다.
그렇게 불안함을 애써 누르고 내게 찾아온 아이를 두려운 마음으로 맞았다.
그리고 그 아이의 돌잔치를 마치고 얼마 되지 않아 직장을 확정 짓지 못한 채 졸업을 하고 우리는 이사를 해야 했다.
취업기회가 더 많을 것 같다고 판단한 도시로,
무엇이 또 펼쳐질지 모르는 그 정글 같은 세상으로.
이삿짐은 먼저 보내놓고 우리는 떠나기 전날 친한 친구네 집에서 밤을 지냈다.
온통 잠을 잘 수없는 불안한 기운이 들볶았지만,
희망과 긍정의 말로 나 자신을 다독이며 뜬눈으로 아침을 맞았다.
그 휴가 같던 삼 년을 마치고 우리는 초등생 큰 아들과 기저귀채운 둘째 딸아이와 (써먹지 못한) 졸업장 하나를 쥐고… 도시로 스며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