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VIP가 보내는 협조 공문.
영화관 씨에게.
본론에 앞서, 코로나로 인해 모두가 힘든 시기입니다만 귀사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합니다. 이 편지의 당사자 본인은 귀사의 VVIP입니다. 눈부신 영화 산업의 발전과 함께 명단에 포함된 VVIP 숫자 역시 한둘이 아니겠습니다만. 최소한 제가 귀사를 얼마나 애정하고 있는지는 증명된다 생각합니다. 평범한 소시민으로써, VIP도 아닌 VVIP 등급을 유지 중인 건 처음이자 마지막이지 싶습니다.
매우 공적으로 써보려 했는데 안 되겠네요. NG입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게요. 친애하는 영화관 씨. 올해의 전 당신의 VVIP입니다만, 였을 예정이랍니다. 확정적으로 등급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거든요. 연초에 ‘1917’이란 영화를 큰 화면으로 보고 싶어 조심스레 방문했던 때가 마지막이 될 줄은 꿈에도 상상 못 했습니다. 그 이후로 꼬박 당신과는 멀리했으니. 무료관람 쿠폰은 고사하고 팝콘 교환권도 채 다쓰지 못한 채 한 해가 갑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제 일상에서 벌어질 줄 몰랐던 일입니다.
전 양으로 승부하는 타입입니다. 단언컨대 친구들 영화표를 VVIP 승격을 위한 발판으로 삼은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기준을 채우고도 한참 넘치는 편이라 같이 볼 일이 있음 주위에 양보하는 편이었죠. 그만큼 전 영화가, 영화관이 좋습니다. 영화 감상 자체를 참으로 좋아하는 데다 영화관에서의 두 시간을 알차게 즐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평일 밤이나 주말 오전, 심야 영화 등등 가리지 않고 섭렵했습니다. 블록버스터 같은 상업영화도 좋아하지만 독립, 예술 영화들도 가리지 않고 골고루 좋아하는 성향 탓도 있을 겁니다. 혼자 오롯이 적막해지는 그 시간들이 좋아 습관처럼 당신을 방문했습니다.
한때는 방을 영화관처럼 꾸미는 쪽이 싸게 먹히겠다 싶었어요. 견적까지 내보며 추진하다 포기했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꾸미고 좋은 기기를 들여놔도 경험이 다를게 자명해서요. 깊게 깔린 어둠. 너무 협소하지도 넓지도 않은 나만의 두 시간. 오롯이 스크린에만 집중하는 그 흐름은 만들 수 없겠더라고요. 무엇을 보냐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보냐가 중요하니 말입니다. 자유로운 분위기에선 자꾸 딴짓을 하게 돼서 말이죠.
사실 스마트폰이 문제입니다. 어떻게든 손에서 떠나보내는 일이 녹록지 않습니다. 시도 때도 없이 지 혼자 울려대는 통에 결국 시선이 향하죠. 자의적으로 멀리하기엔 이미 종속된 관계일런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당신 품에선 어떻습니까? 모름지기 21세기 문화시민이기 위해선 핸드폰은 잠시 멀리하는 에티켓이 발휘되어야 하죠. 강제로 나마 그들과 멀어져야 하는 그게 참 좋습니다. 여러모로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었죠. 저에겐 당신과의 만남이 일상에 찍는 쉼표였습니다.
팝콘과 콜라는 또 어떻습니까? 배운 사람이라면 500원을 투자하는 한이 있더라도 무조건 캐러멜로 코딩된 쪽을 골랐겠죠. 칼로리 같은 건 잠시 제쳐두고 말입니다. ‘영화관이니깐!’이라는 무적의 논리를 앞세워 단짠단짠의 휘모리장단으로 미각을 마비시키고 나면 행복은 멀리 있지 않았답니다. 스트레스받은 하루도 사르르 녹게 만드는 치유의 시간 아니었겠어요?
이러한 연유로 전 당신의 VIP였습니다. 아니, VVIP일 수밖에 없었죠. 사랑의 노예였습니다. 근데 올해만큼은 매정하리만치 일순간 발길을 끊어버렸답니다. 끊을 수밖에 없었죠. 사실 2월까지만 해도 약간의 타협이면 될 줄 알았답니다. 마스크 쓰고 팝콘과 콜라는 포기하고. 몇 달만 참고 다시 바짝 조이면 VVIP유지는 될 줄 알았죠. 근데 사람 맘이란 게, 그 시의적절한 상황이라는 녀석이. 그럴 수 없게 만들지 무업니까.
작년만 해도 옆자리의 기침 소리 같은 건 신경도 쓰지 않았답니다. 너무 잦은 거라면 몰입에 방해되어 눈총을 줄지언정 말이죠. 근데 요새 같은 땐 마스크 한 장에 건강과 안전을 맡겨야 하는 때이지 않겠어요? 심지어 밀폐되어있는 공간이라 좋아했던 당신이었는데. 이젠 밀폐되어 있기에 좋아할 수 없게 되어버렸답니다. 이 아이러니한 현실 앞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맘이 편해지려고 가던 곳인데 불편을 감수하면서까지 강행할 VIP는 아니었나 봅니다. 저는 말입니다.
당신은 서운해 할 수도 있습니다. 아니, 서운할 겁니다. 당신께선 나름 이거 저거 다 방비하고 조심하고 신경 쓰실 테니 말이죠. 심각한 때라면 당연히 조심해야겠지만 너무 움츠러드는 경기에 힘들어하기도 할 거고 말이죠. 사정이 어렵단 소식도 들었고, 이런저런 이유로 티켓 가격도 상승될 거란 기사도 읽었습니다.
근데 비루한 핑계입니다만 저도 당신이 그리워 힘듭니다. 그립습니다. 줄리엣이 된 기분입니다. 저도 금단 현상을 겪고 있단 말입니다.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괜찮지 않은 일상이라 더더욱 당신이 그립습니다.
작년부터 기대해온, ‘테넷’이란 영화가 있었답니다. 큰 화면은 당연하고, 큰 맘먹고 용산을 사수하겠단 맘을 갖고 있었죠. 실제로도 갈까 말까 매우 고민했답니다. 갈 뻔했죠. 하지만 결국 가지 못했습니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가지 않았네요. 강행하려면 했겠습니다만, 마음 졸이면서까지 보고 싶진 않았던 모양입니다. 정말 당신을 좋아하지만. 여기까지였을지도 모릅니다.
당신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는데. 어떻게 나한테 그러냐고 힐난해도 꿀 먹은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겠네요.
그러게요. 사실 나도 몰랐습니다. 어떻게 내가 당신한테 그럴 수 있는지 말이죠. 그럼에도 여전히 당신이 그립다고, 보고 싶다고 말한다면. 이쪽이 너무 비겁한 걸까요? 그런 거라면 비겁해서 미안합니다.
미워해도 됩니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당신 맘이 풀리지 않는다면 매우 슬프겠지만. 이쪽은 어찌할 도리가 없겠네요. 하지만 말입니다. 당신 맘이 풀리지 않을, 그 오랜 뒤가 되면 말입니다. 지금 못했던 만큼 다시 잘해보겠습니다.
조금은 어색한 사이로 흘러갈지라도 말입니다. 그땐 제가 어떻게든 잘해 볼터이니. 조금만 더 안녕입니다.
모쪼록 양해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