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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몬스테라 May 18. 2024

아들의 스승과 나의 스승

나의 아들은 중학교 2학년이다. 아들은 초등학교 6학년 때 전학을 했는데, 중학교에 입학하고도 스승의 날에는 전학한 학교의 6학년 담임선생님을 찾아뵈었다.     


아들은 전학 전 다소 경직된 분위기의 학교에 다녔다. 학부모 참관수업 중에도 떠드는 학생을 엄히 혼내시는 카리스마를 보여주시는 선생님도 계셨다. 


아들은 밝고 명랑했지만 호기심과 질문이 많고, 엉뚱한 구석이 있었으며 다소 산만했다.


그래서 지적을 받거나 혼이 나는 일이 잦았다. 학년이 올라가면서 아들은 질문이 줄어들고 덜 산만해졌지만 명랑함도 줄었다. 자꾸 지적을 받고 혼이 나니까 자제하려고 노력한 것 같았지만 학교에 적응하지 못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던 중 아들이 6학년이 되었을 때 나의 직장문제로 이사와 전학을 하게 되었다. 아들을 전학시키기 전 내 마음에는 시름이 가득했다. 


예전 학교에서 비록 종종 혼이 났지만 학교생활 자체는 익숙할 텐데, 이제 생판 아무도 모르는 사람들 속에서 지적을 받으며 생활하면 아이 마음이 어떨까 생각하니 아들이 가엾기도 했다.     


아들을 전학시키던 날, 교무실과 행정실에서 절차를 취하고 아들을 데리고 6학년 교실로 올라갔다. 나와 아들이 창가에 어른거리자 담임선생님이 복도로 나오셨다.20대 후반이나 30대 초반 정도 되어 보이시는 젊은 선생님이셨다.     


반은 적막할 정도로 고요했다. 긴장한 아들은 요가교실처럼 조용한 반에 조금 위축된 것 같았다.     


담임선생님은 교실의 앞문을 닫으시고 나를 복도 구석으로 데리고 가셨다. 담임선생님은 나직하게 물으셨다.


“어머니, 제가 아이에 대해서 특별히 알아야 될 사항이 있나요.”  
   

아이들을 많은 시간 지켜보시는 초등학교 담임선생님은 어떤 면에서는 부모보다도 아이에 대해서 더 많이 파악하고 있기도 한다.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나는 늘 담임선생님을 신뢰하고 존중해 왔다.     


나는 머뭇거리다가 아이가 들을까 봐 암표 장사하듯 속닥였다.

“말이 많고 좀 산만해요..”     



그러자 선생님께서 비장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시며 말씀하셨다.   

  

“어머니, 그렇다면 전학을 잘 오셨습니다. 
저희 반에 딱 맞는 아이입니다.”     



의아한 나를 뒤로하고 담임 선생님은 아들을 데리고 교실 앞문으로 들어가셨다.

그리고 “얘들아! 전학생 왔다아아아아~~~!!!”라고 소리 지르셨다.


그러자 아까 조용했던 아이들이 아들의 이름을 크게 연호했다. 선거유세 때에도 그 정도는 아닐 정도로.

나는 학교 계단을 내려가고 건물을 나올 때까지 아들의 이름을 연호하는 아이들 목소리를 들으며 울컥했다.



아들은 학교가기를 좋아하기 시작했고, 친구들과도 잘 지냈다. 같은 아이인데 예전 학교에서 지적받던 것을 이 학교에서는 지적받지 않았다. 심지어 아이는 학교에 다녀와서 “엄마, 반 전체가 산만해. 나는 아무것도 아니야.”라는 우스갯소리를 했다.


나중에 학부모참관수업을 가니 반 전체가 명랑했다.


스커트를 입은 담임선생님께 아이들이 “선생님 가식적이에요! 조금 전까지 추리닝 입고 계시다가 학부모 참관수업한다고 치마로 갈아입으신 거잖아요!”라며 놀렸다.


담임 선생님과 소통하면서 정말 이 분은 아이들 한 명 한 명을 특별하게 생각하시는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다.


 아들의 담임 선생님은 아들 졸업 후 다른 학교로 가셨는데, 아들과  반 친구들은 졸업 후에도 스승의 날에 담임 선생님께서 전근 가신 학교 앞으로 찾아갔다. 선생님이 너무 보고 싶다는 것이다.


며칠 전 아들과 6학년 때 친구들 19명이 모여서 선생님께 드릴 롤링페이퍼를 만들었다. 그리고 이제 중2가 된 이 아이들은 담임 선생님을 앞으로도 계속 뵈어야 하니까 스승의 날 선생님과 식사하는 식대는 각자 비용으로 한다는 원칙을 세우고 모두 미리 돈을 준비해서 갔다.


기특했다.  

   



아들의 스승의 날을 보니 나의 학창 시절이 생각났다.


학교에서 폭력이 난무하던, 무협지 같은 시절이었다. 그때는 드러나는 학교폭력, 적극적인 학교폭력은 좀 드물었다. 왜냐면 가해학생을 선생님께 이르면 선생님이 가해학생을 때리셨기  때문이다. 

특히 24시간 돌아다닌다고 ‘이사돌이’라고 불리거나 ‘학주’라고 불렸던 학생주임 선생님은 당구큐대 같은 막대기를 들고 돌아다니셨다. 여학교였지만 그걸로 때리셨다. 아주 큰 비행이 아니라 지각을 해도 맞았다.


심지어 내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단체벌이라고, 반의 다른 학생이 잘못했는데 연좌제처럼 전체가 벌을 받거나 맞을 때도 있었다. 가장 잔인했던 것은 허벅지를 당구큐대로 때리는 것이었는데, 치마 교복이라서 칠판 앞에 손을 대고 뒤돌아서면 본인이 때리다가 치마가 날려서 불편하다며 허벅지를 잡으라고 하셨다. 나를 때리는 사람에게 편의까지 제공해야 하는 겁나 험한 학창 시절을 보내야 했던 것이다.     


내가 중학교 때 수학시간에는 시험 후 몇 점 이하로는 모두 일어나서 그 점수 이하로 틀린 개수대로 때렸는데, 맞는 사람이 자기가 맞을 대수를 계산해야 했다. 내 짝은 수학을 정말 못했는데, 두 문제만 맞아서 점수가 8점이었다. 


수학선생님이 다른 아이들 손을 회초리로 탁탁 튀기듯 기계적으로 빠르게 때리고 내 짝 앞에 섰을 때, 내 짝이 자기가 맞을 대수를 말하자 선생님이 순간 당황하셨다. 팔이 아프신 것인지 “너는 때릴 가치도 없어. 앉아.”라고 하셨다. 짝은  웃었고  나는  짝에게  입모양으로  축하한다고  했다. 우리  둘은  입틀막  하고  좋아했다.     


심약한 나는 과학시간도 싫었다. 과학실 앞에는 알코올병에 태아가 들어있거나 각종 장기들이 있었다. 자주 봐도 갈 때마다 식겁했다. 학교 매점에는 쉬는 시간마다 압사직전까지 몸싸움을 해야 야채어묵을 사 먹을 수 있었고, 월요일에는 운동장에서 조회를 했는데 더운 날 교장선생님 훈화말씀 시간에는 정말 뇌출혈이 올 것 같았다.   

       

학교에서 학주한테 맞고 집에 가면, 집에서는 공주대접을 받나? 그것도 아니다. 그때는 금쪽같은 내 새끼 이런 거 없었다. 엄마말 안 들으면 엄마가 먼지떨이나 파리채를 들었다.     

이중삼중 살기 힘든 시절이었다. 



그러나 그 시절에도 따뜻하고 자상한 선생님, 좋은 선생님이 많았다.

나는 고등학교 때 말도 별로 없었고 다소 위축되어 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국지리 선생님이 수업시간에 들어오더니 나를 찾으셨다.


그러고는 앞으로 한국지리 시간에는 실장이 인사하지 않고 내가 차렷 경례를 하라는 것이다.


나를 ‘지리장’으로 임명한다고 하셨다. 전통음식부문 인간문화재 같은 ‘지리장’은 지리시간에 반을 대표했고, 한국지리 선생님의 사랑을 받았다.


한국지리선생님이 나를 애정한 이유는 내가 학교 교지에 편집위원이었던 친구의 부탁으로 쓴 글이 너무 웃기다는 것이었다. 당시  동네  목욕탕에서  있었던  일을  의식의  흐름대로  썼는데 그것이 한국지리  선생님  취향의  글이었나 보다. 한국지리  선생님은 나를 볼 때마다 다음 교지에도 글을 쓰라고 하신다거나 내 글이 자기 스타일이라고 하셨다. 


그때 한국지리  선생님이 나에게 “네 글이 좋다.”라고 칭찬하신 경험이 없었더라면 내가 글을 써서 공개하는 일은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그전에는 비슷한 칭찬도 들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나에게 인생 처음 감투를 씌워주신 한국지리  선생님이 그립다.


선생님들은 알까.

자기가 누군가의 우주였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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