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지 않고서 전부 삭제하려다가, 아무래도 마음에 걸리는 지점이 있어서 딱 한 통만 읽었다.
솔의 스토리는 길고 장황했지만 핵심은 단순했다.
그녀의 문자에 답장을 했고, 봉천역을 지나갈 때 전화가 걸려와서 받았고, 사당역에서 버스를 타고 집으로 가는 동안 30분 가까이 통화를 했으며, 솔과 나는 다시 보자는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 아직 취기가 가시지 않았다.
지금부터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려 하고 있었다.
K는 촬영하는 날이 아니라도, 나를 불러서 종종 만나기도 했다. 왜 사진가인 나를 부르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기분 전환이 필요할 때는 나도 K의 제안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대학원 첫 학기가 시작돼서 다소 바쁘기는 했지만, 시간을 낼 수 없을 만큼 일이 쌓여 있지도 않았다. 게다가 나는 K가 나를 초대하는 장소들에 내심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나를 어디로 데려가서 무엇을 보여줄지 궁금하게 생각했다. 촬영을 여러 차례 진행하면서 나는 K를 인간적으로 신뢰하게 되었다. 타인을 이만큼 신뢰하는 경험은, 내 인생에 드문 일이었다.
K가 예약한 곳은 프랑스 가정 요리를 전문으로 하는 프렌치 레스토랑이다. 살면서 프렌치 레스토랑에 간 적은 손에 꼽는다.
레스토랑은 서울 안국동에 있다. 우리는 사전에 약속을 해 두었던 신촌역에서 만나서, 택시를 타고 안국동까지 함께 이동했다. 안국역 입구에서 골목으로 들어간 곳에 프렌치 레스토랑이 있어서, 처음 간 사람은 그곳에 무엇이 있는지 알기 어려웠다. 이곳은 프랑스인이 직접 운영하는 곳이냐고 K에게 물어보았더니, K는 어깨를 으쓱하면서 짧고 간결하게 대답했다.
“알 방법이 없어요. 가 보기 전까지는.”
무거워 보이는 한옥의 문을 열고 내부로 들어갔다. 여름의 시작이라서 낮 시간에는 섭씨 25~27도까지 기온이 올라갔다. 하지만 레스토랑 내부는 무척 시원하고 쾌적했다. 마치 대학교에 있는 도서관에 들어온 것 같았다. 도서관이라. 안에서 한국인처럼 보이는 여성 사장님이 나와서 예약하신 분이 맞는지 물어본 다음에—네 맞아요,라고 K가 피곤한 목소리로 퉁명스럽게 대답했다—우리를 건물의 안쪽 들어간 곳에 있는 4인용 테이블석으로 안내해 주었다. 원목 테이블이 있고, 등받이가 패브릭으로 된 의자가 놓여 있었는데, 침착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테이블 위에는 접시가 정확히 두 개 준비돼 있어서 뭔가 프로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리에 앉았다. 사장님은 이제 조금 기다리면 애피타이저가 나올 테니까, 기다려주시기 바란다. 음료는 와인—화이트 와인과 레드 와인—이 준비되어 있고 논 알콜 맥주, 주스, 콜라와 사이다가 있다고 말했다. 나는 K가 주문하는 걸로 달라고 이야기했다. K는 구운 생선요리에 맞는 화이트 와인을 글라스로 두 잔 주문하고 나서, 미리부터 접시 위에 준비된 냅킨을 집어 들어 입가를 조심스럽게 닦았다.
“S님은 안 더우세요? 더워서 얼굴에 땀이 나는 것 같아요. 에어컨 바람이 나오는 실내에 들어오니까 천국이 따로 없네요.”
우리가 격식 있는 자리에서 만났기 때문에, K는 평범하게 ‘남장’을 하고 왔다. K의 남장은 그의 외모와 조화되어 잘 어울렸다. 한국 남자 아이돌처럼 보이기도 하고, 그게 아니면 내성적인 남학생처럼 보이기도 했다. 어느 쪽이든 간에 술을 마실 수 있는 성인 남성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나는 그와 대화를 할 때마다 그가 어떤 이야기를 할지 기대하는 마음이었다. 다소 진부한 이분법이기는 하지만 나의 구분 속에서 세계의 사람들은 둘로 나누어졌다. 재밌는 사람과 재미없는 사람. 재미없는 사람과 술잔을 앞에 두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큼 세상 지루한 일도 없다. 그 사람이 내 앞에서만, 나를 상대로 했을 때만 재미없는 사람일 가능성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인간에게 재미없는 사람일 확률이 높다.
반면에 K는, 저번에 봤던 서초동의 카페에서 영문을 모르는 채 쫓겨 난 변호사들에게는 재미없는 사람일지도 모르겠으나, 나처럼 같이 일하는 사람에게는 무척이나 재밌는 사람이었다. K는 세상이 인정하는 가치와, 한국 사회가 옳다고 받아들이고 강요하는 규칙에 저항하는 반골기질을 가졌다. 게다가 반골기질은 독특한 유머와 융합되어 있어서 한국 사회나, 사회의 규칙을 간파하고 조롱하는 그의 말하기 방식은, 듣는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었다.
하지만 오늘 만난 K의 얼굴은 평소보다도 몇 배는 진지해 보였다. 촬영할 때마다 내게만 보여주는 미소도 얼굴 위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고, 눈동자도 장난기를 품고 있지 않아서 평온하고, 진지해 보였다. 그는 유머와 함께 우울함과 사려 깊음도 동시에 가지고 있는, 주변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복합적인 인간 유형이었다.
나는 그에게 넌지시 물어보았다.
“무슨 일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내 앞이니까 한번 말해봐.”
그가 머뭇거림 없이 대답했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나면 이제 군대를 미룰 수가 없어서요. 올해 겨울이면 벌써 졸업 시즌이니까요. 그런데 제가 병무청에 물어봤는데, 행정 기관에서 언제 소집 통지가 날아올지 알 수가 없다고 말씀하네요. 그것도 그렇고, 또 다른 이유라면 요즘 들어서 인스타그램에 올리는 게시물에 악플의 숫자가 늘어났거든요.
악플을 자주 다는 익명 계정이 있는데 경찰에 신고해야 될지 고민이에요.”
말을 마치고 K는 와인 글래스의 얇은 기둥을 두 손가락으로 잡고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그야말로 우아하고 기품 있는 동작이었다. 나는 K가 한 번도 스스로 말한 적 없지만, 좋은 집안에서 레스토랑에서 지켜야 하는 식사 예절을 배웠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단지 그가 감추려고 하는 사실이 집안과 관련된 일이었기 때문에, 그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모르는 척을 해 왔을 뿐이다.
애피타이저로는 파슬리 가루가 올라간 햄과 함께, 차게 만든 프랑스식 옥수수 수프가 나왔다. 나는 애피타이저를 스푼으로 먹으면서 몇 가지 화제를 꺼냈다.
인스타그램에서 악플을 다는 사람들의 정체가 누구인지, 그리고 익명 계정의 팔로워 수는 몇 명인지. 전자에 관해서는 짐작이 가는 바가 있다. 온라인 상에서 남자 코스프레이어가 하는 여장을 싫어하는 한 줌의 무리가 있었는데, 그들은 인스타그램도 자기 PR의 용도로 아주 활발하게 사용하고 있었다.
따라서 추론적으로, 익명으로 게시물에 악플을 남기는 친구들이 바로 그들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나는 K에게 내 의견을 그대로 전달했다.
“여럿 있잖아. 트위터에 있는, 여장 레이어를 싫어하는 소규모 여자 집단.”
“네. 저는 트위터를 사용할 일이 없어서, 그런 사람들이 있다는 것만 들었어요. 매우 무섭네요. 세상의 여론과 분위기라고 하는 건.”
우리는 말없이 수프를 마시고, 식사용 빵을 올리브 오일에 찍어서 조금씩 먹었다. 악플에 신경 쓰느라 K의 얼굴이 어두워졌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까, 삶은 채소처럼 쳐진 그의 기분을 좋게 만들어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면 좋을까? 식상하지 않은 화제.
나는 미술관에서 본 그림 이야기를 서랍 속에서 꺼냈다.
그 전에, 현대 미술 유튜버가 올린 영상에 대해서 먼저 설명했다. 그 미술 유튜버는 제주도에서 화실 겸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미술교실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가 순수 미술로 유명해진 연예인 아티스트를 저격하는 영상을 올려서 화제가 되었지만, 정작 잘 나가는 건 연예인 쪽이었다. 소묘의 기본기가 부족하다는 유튜버의 지적은 ‘미술을 평가하는 사람들, 다시 말해 전문가들이 인정했으니까 그만 아니겠냐?’라는 대중의 반론을 맞아서 사그라들고 말았다.
내가 본 그림은 미술 유튜버가 비판할 만한 작품이었다.
“큰 그림이었어. 캔버스 100호는 될 거야. 매우 크고 거대해서, 액자가 걸려 있는 고정 지점이 벽의 천장과 면하는 바로 아래였을 정도였으니까. 그림의 내용은 단순하고, 초현실적이면서 풍자적이야.
얼굴이 있고, 목 위만 있고 목 아래 토르소는 아무것도 그려져 있지 않은 형태야. 하얀색 석고상같이. 그리고 머리 주변에는 구부러지고 휘어진 손목시계가 있어. 은색 스틸 손목시계인데, 브랜드는 적혀 있지 않지만 누구나 보면 R사의 손목시계라는 걸 알 수 있어. 묘사가 뛰어났어. 이것들의 배경으로 노란색 해가 떠 있는 하늘이 있고, 아래로는 초록색 강이 한강처럼 깊게 흐르고 있어.”
나는 그림을 보고 압도되었음을 고백해야겠다. 이 작품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간결했다. 현대의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물질 만능주의는 이미 한계 지점에 도달해 있다. 사람들은 자동차와 명품 가죽 가방과 손목시계를 숭배하지만, 비싼 물건들 속에서 진심으로 만족하는 사람은 드물다. 지나친 부는 부의 치킨게임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물건을 소유함은 소유자에게 만족을 주지 않는다.
그러나 아이러니한 사실은, 연예인 화가가 그린 이 작품도 현대미술 시장에서는 비싼 가격에 팔리고 있다는 점이다. 연예인 화가는 부의 과잉을 통렬하게 비판한다. 물질 만능주의를 비판하지만, 자본주의는 미술 작품마저도 부자들의 재테크 수단으로 바꿔 버린다.
“보이지 않는 손이 있다면, 그 손은 모든 미술품을 황금으로 바꿔버리는 손일 거야. 무에서 유가 출현하고 있어. 유에서 유가 출현하는 게 아니라.”
K는 내 이야기를 듣고 난 뒤 살며시 미소 지었다. 와인을 한 모금 마시고, 입술을 축이고 나서 그가 대답했다.
“그 세계는 저도 잘 알고 있는 세계 같네요. 과시와 허영의 세계.
요점은 대한민국 속에 있는 그들만의 세계가, 속에 거주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매우 당연하고 그럴듯하게 여겨진다는 것이죠. 사실 사상누각이지만 모래성이 무너지기 전까지는 아주 잘 만들어진 성처럼 보이죠. 제가 코스프레를 하는 이유도 그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나서, 이번에는 물을 꿀꺽 마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