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게, 제가 그땐 정말 스트레스가 심했어요. 아버지는 이름만 들으면 아는 대입 영어강사에, 우린 대치동 한복판에 살았어요. 엄마는 교육열이란 열은 원기옥처럼 모아서 첫째인 저한테 쏘다시피 했다고 보면 되요. 6학년 때 반에서 기르던 토끼 두 마리를 보면 어떻게 죽일까. 어떻게 고통을 줄까. 그런 생각만 떠올랐어요. 그래서 어느 날 엄마 반질고리에서 가장 두꺼운 바늘이랑, 뜨개질할 때 쓰는 기다란 쇠바늘을 챙겨 학교에 갔죠. 애들은 사실 반에서 키우는 토끼 따위엔 관심이 없었거든요. 쉬는 시간엔 토익 문제랑 고1 수학문제를 푸느라 정신이 없었어요. 특목고에 가려면 6학년이 중요하다고들 했죠. 매달 있는 학원 레벨 테스트에서 미끄러지면 쪽팔리기도 했고요. 금방 소문이 났거든요. 전 키가 작아서 앞쪽에 앉아있었는데, 토끼들을 제가 맡아서 돌보겠다고 담임에게 말한 뒤론 쉬는 시간마다 토끼장이 놓인 교실 뒤쪽에 갔어요.
그리고 쪼그리고 앉아 바늘로 찔렀어요. 자기 몸의 네다섯 배 정도 되는 우리에 갇혀있던 토끼들이 도망갈 수 있는 곳은 없었죠.
제가 밥을 주는 존재였기 때문에 토끼들은 헷갈려했어요. 밥과 물을 주다가도 바늘을 꺼내 찔렀거든요. 피가 방울처럼 맺히기도 했지만 금방 사라졌어요. 담임도 사실 과학실습 때문에 길러야 해서 교실에 뒀지만 관심은 없었죠. 그때 담임은 조기유학생 무리와의 신경전에 모든 에너지를 쏟고 있었죠. 그 애들이 영어시간마다 선생의 발음을 비웃었거든요. 그럼 엄마 나이의 그 중년 여자가 얼굴이 시뻘게지곤 했죠. 어느 날은 제가 뜨개질용 바늘을 라이터로 데워서 토끼들의 까만 반점이 있는 곳을 지지기도 했는데...... 까만 곳을 노려야 흔적이 잘 안보이거든요. 오징어 굽는 냄새가 나는 바람에 들킬 뻔 했어요. 그래서 그건 한번뿐이 못해봤죠. 정말로 토끼들이 죽을 거라곤 생각 못했어요. 그저 좀 괴롭히고 싶었을 뿐인데, 2학기 중반쯤에 한 마리가, 그리고 1주일 쯤 후에 다른 한 마리도 죽어버렸어요. 사실 죽기 전에 눈빛이...달라졌다고 생각했는데. 뭔가, 불이 꺼진 것 같았어요. 까만 구슬 같던 눈이 꼭 고기 집에서 다 쓰고 버린 숯덩이처럼 변했거든요. 잘못했어요. 제가 정말 잘못했습니다. 무슨 일인지 몰라도, 여기서 내보내주세요.”
이선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줄줄 읊고 있었다. 어쩌면 자는 사이에 심장이 멈춰 지옥문 앞에 와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그렇다면 아직 해야 할 이야기가 많이 남아 있었다. 이선의 두 뺨을 타고 두 줄기의 눈물이 흘러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