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오는 바에서부터 기억나지 않았다. 분명히 학교 형들과 한잔하고 있었는데. 전시를 앞두고 스트레스가 많아서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조차 가늠되지 않았다. 꿈이라면 하룻밤에도 몇 개씩, 아주 생생히 꾸는 그였기에 이 또한 꿈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방안을 두리번거렸다. 흡사 우주와 같은 검은 허공을 바라보자, 예전 여자 친구와 다녀왔던 제임스 터렐의 전시회가 생각났다. 끝이 보이지 않던 뿌연 보랏빛의 공간. 원주에 있는 미술관이었는데. 그때 그 여자애는 엉덩이가 참 예뻤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맞은편에 앉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그랬어요?”
“뭘, 말씀하시는지 알 수가 없네요. 그냥 아무 말이나 하면 돼요? 갤러리에서 하는 인터뷰 같은 겁니까?”
“왜 그랬어요?”
얼굴에 감정을 드러내지 않도록 정교한 훈련을 받은 듯한 여자의 각진 태도가 그의 흥미를 끌었다.
“갤러리가 아니면, 도대체 누구세요?”
대답 대신 그의 눈앞에 쿠사마 야요이의 거대한 호박 조형물이 나타났다, 허공에 떠있는 주황색 조형물엔 크고 작은 검은색 동그라미가 줄지어 있었는데, 심각한 환 공포증이 있는 두오에겐 끔찍했다. 두 눈을 감자, 공포감이 짙어져 호흡이 가빠졌다. 마치 자신의 뇌에 구멍이 숭숭 뚫리는 것만 같은 생생한 공포가 온몸을 죄여 왔다. 초상화 의뢰인이었던 노의사가 알려준 호흡법은 전혀 소용이 없었다. 이마를 타고 내려온 땀이 턱에 맺혔고, 손이 저릿저릿해지더니 정신이 아득해졌다.
“두오님의 심장박동과 호흡이 정상으로 돌아왔습니다. 눈 떠 보세요.”
아주 멀리서 들려오는 여자의 목소리에 두오는 눈을 떴다. 그녀의 얼굴을 그린다면 숱이 많은 눈썹을 신경 써서 그려야겠단 생각을 하며 두오는 입을 열었다.
“처음부터 그러려던 건 아니었어요. 제가 카라바조를 정말 좋아하는데, 게이였다는 이야기가 있잖아요. 바쿠스라는 작품의 그 하얗고 예쁘장한 남자 모델이 당대에 유명한 미남이었대요. 보고 있음, 그 미소년한테 끌렸구나, 그런 게 보여요. 만져보고 싶게 그린 그 생생한 육체. 그거 아세요? 그림을 보면, 작가가 여자를 좋아하는지 남자를 좋아하는지, 그런 것도 알 수 있단 거? 호크니 그림이 대표적이죠. 남자들은 동물적 매력을 내뿜는 반면, 여자들은 대체로 무생물 같은 느낌으로 그렸어요. 아주 잘 그린 꽃병이나 가구 같은 느낌.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는 거죠. 무튼 그 바쿠스라는 그림을 특정 각도에서 보면 반라의 모델 손에 든 넓은 와인 잔에 카라바조의 얼굴이 나타나요.”
바쿠스,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
두오는 몸을 뒤로 기대 의자를 반쯤 넘긴 채로 앉아, 까딱까딱 앞뒤로 움직였다.
“당시에도 귀족이나 거상들이 그림을 샀어요. 돈지랄이죠. 잘나가는 화가들을 불러서, 종교적인 내용이나, 나름 고상한 것들을 그려달라고 했던 거예요. 핑계는 많았죠. 첫 아이가 태어나서, 자식이 결혼을 해서 등등. 그렇게 주문을 넣으면, 화가들이 그려서 납품했는데, 카라바조는 천재였죠. 하이 개그잖아요? 부잣집 응접실에서 작가는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던 거죠. 제가 그걸 벤치마킹한 거예요. 그 전직 타이틀 화려한 할배들 초상화 작업할 때. 학교 졸업하고 작업실 월세 낸다고 했던 일이었거든요.
캔버스에 바탕을 깔 때, 거대한 뻑큐를 그렸어요.
나중에 그림이 완성되면 유화의 특성상 알 수가 없거든요. 그렇지만 전 알잖아요. 한때 잘나갔던 분들 얼굴 아래에 내가 그린 거대 자지가 있단 걸. 유별났던 전직 4선 국회의원 할배 얼굴 작업할 땐 네 갠가 다섯 갠가 그렸어요. 뻑뻑뻑뻑, 뻑큐. 좀 심하더라고요. 초면에 반말할 때부터 싸했는데, 젊었을 때 더럽게 논 이야기를 하는데 역겨워서 들어줄 수가 없더라고요. 표정 유지를 위해 입을 다물어야 한다고 설득해, 겨우 닥치게 했죠. 이번에 그 할배가 대선후보가 되네마네 하더니, 혹시 그거 때문인가? 뭐 근데 따져보면 죄는 아니잖아요. 아...... 쪼잔하게, 이게 뭡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