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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아상 Jan 25. 2024

 식물에 필요한 장소, 나에게 필요한 장소

 

   혼자만의 세계에 갇혀 있었다. 내성적인 성격에 내면세계에만 빠져 있으니, 현실은 힘들고 어려웠다. 거절은 못하면서 남들에게 심리적 도움을 청하지도 표현하지도 못했다. 세련된 사회적 기술도 없었다. 게다가 예민한 편이라 상처도 쉽게 받았다. 그럴 땐 마음을 추스를 장소가 필요했다.


   집은 '안전한 귀환처'다. 힘들 때마다 나만의 동굴에 들어가듯 내 안으로 들어가는 곳이고, 태아 적 자궁같이 안전하다. 나는 집에 있는 걸 좋아하는 집순이고, 집은 안전하지만 가끔은 마음이 흔들리고 해소되지 못한 동요가 남아 답답할 때가 있다. 그럴 땐 자연을 볼 수 있는 곳을 걷는다. 자연을 바라보면 세상의 시름을 잊고 마음이 가라앉는다.

   그중 식물은 고요하다. 외부의 소음마저 막아주는 듯하다. 바람이 불면 '스르르 스르르' 잎 사이로 소리를 내지만 그 소리마저 고요함을 더욱 고요하게 해 준다. 고요함은 말하지 않아도 존재를 알아주는 언어 이전의 관계를 맺게 해 준다. 식물이 있는 자연은 나의 어떤 모습도 판단하거나 공격하지 않고 공감하고 달래주는 '안락한 의지처'다. 


   언제부턴가 집에서 식물을 키우기 시작했다. 자연을 보러 가지 못하는 때에도 조금이지만 초록 잎사귀와 꽃이 피는 것을 보게 되니, 안전한 귀환처에 안락한 의지처까지 더해 준 것 같다. 마음 같아서는 작은 숲이나 정원을 갖고 싶지만, 현실은 식물들을 들여놓기엔 좁은 아파트다. 작은 화초들을 키우면서 매일 아침 일어나면 먼저 베란다에 가서 얼마나 자랐나 본다. 빨리 자라야 할 이유도 없고 너무 크게 자라면 감당할 수도 없는데 말이다.

   다른 집에 식물을 키우는 것을 보면 깔끔하고 분위기도 좋은데, 우리 집은 좁은 집이 더욱 좁아 보이고 정리가 안 돼 보여 빈 화분과 주변도 좀 정리해 보았다. 겨울이 되면 화초들은 거의 자라지도 않고 시들고 모양도 안 예뻐진다. 겨우 살아서 버티기만 바란다.

   겨울은 고비다. 추위에 약하고 햇빛을 받아야 하고 바람이 잘 통하고 공중 습도는 높아야 하지만 흙의 과한 습기는 위험하고 겨울에는 물먹는 습성도 달라지는 까다로운 식물들이다. 동남향의 작은 아파트가 겨울에 햇빛은 잘 들면서 춥지 않고 바람은 잘 통하는 장소는 많지 않고 공중 습도가 높을 리 없다.

   작년 겨울은 갑작스러운 추위가 또 얼마나 유별났는지, 7년 넘게 같은 자리에서 잘 자라던 식물들이 하룻밤에 냉해를 입었다. 올해도 아끼는 식물을 잃을까 봐 보험용으로 줄기를 잘라 물꽂이를 해두었더니 자잘한 식물이 더 많아졌다. 베란다에서 실내로 식물들을 들여놓기엔 식물이 많고 실내가 더욱 어수선보인다. 

   식물을 키울 수 있는 장소를 생각하면 "화분을 더 이상 늘리지 말아야지" 마음을 다잡는 게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런 결정은 언제 잊었는지 유튜브에서 식물 기르는 것을 보게 되고 풍성한 화분을 보며 ”봄 되면 저것도 길러야지” 하며 들떠 있다. 

  '식물 금손'도 아닌 내가 전원주택도 아닌 턱없이 작은 아파트에서 마음은 정원이라도 갖고 있는 줄 안다. 늘 그랬다. 현실에 대한 적절함보다는 상상 속에서 지냈다. 몽상에 빠져 있었다. 


    집에서 키우던 식물을 식물원에 가서 발견하고 "이게 이렇게 큰 거였어!" 하고 놀랄 때가 많다. 식물은 사람이 돌보지 않는 자연 속에서 더욱 잘 자란다. 식물학자의 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 그 학자는 자신은 집에서 식물을 키우지 않는다고 했다. 식물이 밖에서 얼마나 잘 자라는 것인지 그 모습을 알기 때문이라고 한다. 식물에 미안했다. 식물 키우는 것이 이기적인 것 같아 좀 찔끔하기도 했다. 같이 강의를 듣던 반려 식물 애호가들도 같은 마음인 듯 동요하는 눈치였다. 강의가 끝나고 나오며 식물을 키우지 말아야겠다는 사람도 있었다. 그래도 나는 키우고 싶다.


    반려동물도 야생 시대에 더 건강했을 거다. 반려동물들이 사람들이 앓는 병을 다 앓게 되고, 심지어 사람 취향에 맞춘 종을 만들어 유전병도 있다. (그건 좀 심하긴 하다) 사람도 현대인보다 수렵시대에 머리도 더 좋고 몸도 건강했다고 <호모사피엔스>의 저자인 유발 하라리는 말한다. 나도 아파트가 좋다고 은둔해 있기는 하지만 현대에 살아가기 위한 차선책이다. 자연 속에서 산다면 폐와 호흡기도 건강해지고 몸도 마음도 튼튼할 것 같다. 그렇지만 아파트에서 살아야 한다고 삶을 포기하기보다는 사는 게 낫지 않나.

   식물을 '키우고 돌본다', '자연보호 한다'라고 하지만 자연은 사람이 관여하지 않아도 잘 산다. 식물이 나를 성장시켜 주고 보호해 준다. 나를 위해서 키운다는 걸 안다. 아파트에 있는 식물이 좀 불쌍하기도 하지만 식물은 개체를 늘리려는 게 본능이고 자연에서 채취해오는 것이 아니라면 실내에서 적응할 수 있는 식물로 개체 수를 늘리는 게 낫지 않을까? 식물을 아파트에서 안 키운다고 바깥 식물이 늘어나는 건 아니다. 실내 식물의 양과 바깥 식물의 양은 상관이 없다. 사람들이 바깥에 식물을 늘릴 마음이 있다면 늘어난다. 바깥에도 실내에도 식물을 늘릴 마음이 없는 것이다.

    

    나도 정원을 갖고 싶다. 아니 식물을 키워도 비좁아 보이지 않는 좀 더 넓은 아파트이기만 해도 좋겠다.  식물과 내가 함께 지금보다는 적절한 장소에서 살고 싶다. 나에겐 안전한 아파트가 필요하지만, 아름다운 바깥 세계도 필요하다. 그래서 식물을 그리워한다.


                                                                                         



   식물은 나가고 싶어도 나갈 수 없지만 나는 마음을 열면 나갈 수 있다. 그럼에도 바깥으로 나가지 않던 나의 마음을 바깥으로 향하게 해 준건 식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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