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이 일어나던 380여 년 전 조선은 성리학의 나라였다. 2000년도 더 오래된 중국의 주(周)나라가 조선 팔도를 휩쓸어 이념을 장악하고, 자기 손으로 벼 한 포기 심어보지 않은 선비 사대부들은 도덕과 명분을 ‘말’로 세우고 ‘말’로 지우며 자신들의 정의만을 지켜나갔다. 임금은 무능했고 용렬했으나 그 자리를 오래 지키고자 했고, 반정(反正)으로 임금을 바꾼 신하들은 그 권력을 또 오래 잃고 싶지 않았다. 과학과 기술, 상업이 퇴보하면서 백성들의 살림은 더욱 곤궁해졌고, 오랜 평화에 젖어 강병(强兵) 양성을 무시한 대가는 두 번의 왜란(倭亂)과 두 번의 호란(胡亂)으로 찾아와 온 나라를 뒤엎었다. 그리하여 땅은 짓밟히고 유산은 파괴되었으며, 수많은 백성들은 포로로 끌려가 이국땅에서 외로운 혼이 됐다. 이 모든 근원이 성리학에 있었으나, 입만 살아있는 선비 사대부들이 살길은 오로지 성리학밖에 없었고 더욱더 집착했다. 그리고 그럴수록 조선은 더 무너지고 쓰러져갔다. 병자년과 정축년 남한산성, 그 궁핍하고 궁벽진 그곳엔 성리학으로 무장한 무수한 ‘말’뿐인 ‘말’들이 난무했다. 하지만 그 무수한 명분뿐인 ‘말’들이 임금과 산성, 신료와 백성들을 지켜주진 못했다. 그리고 늘 역사는 되풀이되기만 하는 것이어서 오늘 우리는 안타깝게도 또 그것을 지켜보고 있다. 역사의 교훈은 박제(剝製)된 지 오래였다.
며칠 전 글 하나(2021년 10월 8일 자 중앙일보 ‘한명기의 한중일 삼국지|조선 지식인의 사대의식’)를 읽었다. “무슨 운인지 임진왜란이 일어나 조금은 이익이 있을 법하되 커다란 해를 끼친 명나라 원병이 다녀가자 찰거머리 같은 모화(慕華)의 신(神)은 이내 떠나지 아니하여....명이 망하고 그 말왕(末王)이 순국하매 의자왕의 제사는 궐(闕)하면서 북지왕(北地王) 심(諶)은 높여도 신라 왕자 전(佺)은 모르는 그들이....만동묘(萬東廟)라는 신종(神宗)과 의종(毅宗)을 한 칸 모우(茅宇)에 받들어 제사하니 이날은 조상을 잊고 조선 혼(魂)을 닦아내 버리는 수업일이라, 그만 조선인은 보기 좋게 곯아 죽었도다.” 국어학자이자 사학자인 권덕규(權悳奎. 1891~1950) 선생이 임진왜란 때 명군이 참전한 이후 조선 사회 전반에 모화 풍조가 퍼진 것을 신랄하게 비판한 내용이다. 백제가 망하자 당으로 끌려간 의자왕이나 신라가 망하자 자결했던 경순왕의 아들 전은 기억조차 못하는 조선 지식인들이 촉한이 망했을 때 자결한 유비의 손자 유심을 추모한다고 질타하는 한편, 1703년 노론 지식인들 충북 괴산 화양동(華陽洞) 계곡에 만동묘를 세워 명의 신종과 의종을 제사 지내기 시작한 바로 이날부터 조선의 혼이 사라져 버렸다고 탄식하는 것이다.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 또한 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 나라의 존망 앞에서도 조선의 임금과 신하들은 재조지은(再造之恩)의 모화(慕華) 속에서 말(言)먼지만으로 나라를 구하고 사직을 지킬 뿐이었다. 그들에게 백성들은 그들이 필요로 할 때만 있는 것이었다. 어디 그것이 오늘이라고 다르랴. 성군 세종조차 지성사대(至誠事大)를 표방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