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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무균 Dec 07. 2021

신들의 자리, 허용되지 않는 극한의 땅

산이 거기 있어서가 아냐. 내가 여기에 있으니까 산에 오르는 거야.

「잘 들어.

쉬지 마.

쉬면 내가 용서 안 해.

용서 못해.

쉬면 죽는 거야.

살아 있는 한 쉬지 마.

쉬지 못해.

내가, 내가 약속 할 수 있는 것 하나.

쉬지 않는다.

다리가 안 움직이면 손으로 걸어.

손이 안 움직이면 손가락으로 걸어.

손가락이 안 움직이면 이빨로 눈을 씹으며(雪) 걸어.

이빨도 안 되면 눈(目)으로 걸어.

눈으로 걸어.

눈으로 가는 거야.

눈으로 노려보며 걸어.

눈도 안 되고 이것도 저것도 다 안 되면 정말로 정말로 정말로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면 정말로 정말로 정말로 정말로 정말로 아무것도 정말로 안 된다면 정말로 안 된다면 정말로, 이제, 있는 힘을 다했는데 이제 안 된다면 정말로 안 된다면 안 된다면 정말로 움직일 수 없게 된다면....,

상상해.

온 마음을 다해서 상상해.」 (‘신들의 봉우리’ P.743~744. ‘조지 하부의 수기’ 中)


“전부 썼습니다. 남긴 건 없습니다.” 유메마쿠라 바쿠의 ‘신들의 봉우리(神神の山嶺)’를 읽게 된 것은 어쩌면 행운이었다. 나는 여기까지 쓰고 컴퓨터를 켜 둔 채 서재를 나와 산행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집을 나서 시계를 보니 오전 10시 1분이었다. 남한산성 남문으로 향했다. 집에서 남한산성 남문까지는 약 3km 정도의 거리다. 지난번 오를 때 남문까지 50분이 걸렸다. 오늘의 목표는 43분이다. 부지런히 쉬지 않고 걸었다. 위드(WITH) 코로나 시대, 갈 곳 없는 사람들이 모두 산으로 올라왔는지 등산로는 등산객들로 통행체증이다. 목표달성이 불가능 할 것 같다. 남문을 도착하니 10시 48분, 입과 코로 거친 숨을 토했으나 5분을 초과했다. 뭐 그렇게 의미 있거나 반드시 이루어야 할 숫자는 아니었지만 오늘은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 그래도 사람이 드문 새벽, 마스크의 의무가 사라진 어느 때쯤이면 가능하지 않을까? 산길을 내려오며 내 능력의 한계를 생각하다 8,000m가 넘는 표고(標高), 체감온도 영하 30~40도, 경사도 60~70도의 가파른 빙벽, 지상의 3분의 1에 불과한 산소, 걸음을 옮기는 것이 고통일 정도로 거친 호흡, 강하고 빠른 -모든 것을 찢어발길 듯한- 바람, 낙석, 눈사태, 크레바스, 고산병으로 오는 환각과 환청, 그리고 언제 죽음과 맞닿을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겨울철 무산소로 에베레스트 남서벽을 오르는 극한의 하부 조지와 후카마치를 떠올렸다.


그동안 오랜 독서 기간에도 불구하고 산악소설을 접하거나 읽어볼 기회가 없었다. 특별히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그것이 또 사랑이나 액션처럼 곳곳에 널려 있어 발에 차이는 것도 아니었다. -산악영화라면 실베스터 스탤론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클리프행어’와 주인공이 누구인지 기억나지 않는  ‘버티컬 리미트’라는 영화를 본 기억이 있다. 황정민과 정우가 주연으로 출연한 ‘히말라야’는 보려했으나, 결국 보지 못했다. 그러다 최근 이 영화가 케이블TV 영화채널에서 가끔 방영되고 있어 잠깐 잠깐 보았다. 그러나 이 또한 전편을 죽 이어서 보지는 못했다.- ‘신들의 봉우리’를 읽게 된 것은 몇 개월 전 이 책의 서평을 어느 신문에선가 보고, 휴대폰에 메모해 둔 것이 계기였다. 지난 8월 말쯤 친구 J와 카톡을 하다 “관심이 있어 메모해 두었으나, 사서 읽지 못하고 있네. 내 생활비 항목에 도서비 계정이 없어서라네. 행간을 읽으시게”라며, 메모해 둔 책들의 제목을 적어 보냈다. 며칠 후 아홉 권의 책(이즈의 무희·천 마리 학·호수, 내 생애 가장 큰 축복, 정책의 배신, 정재승의 과학 콘서트, 일곱 해의 마지막, 시선으로부터, 그들이 가지고 다닌 것들,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 신들의 봉우리)이 집으로 배달되어 왔다. 나는 “기다리던 양식이 도착했다. 무위도식 백수의 세 달 양식으로 충분하다. 여행은 돌아다니면서 하는 독서요, 독서는 앉아서 하는 여행이라고 했는데, 이 코로나 시국 여행경비를 흔쾌히 투척한 J에게 무한 감사를 표한다.”라고 문자를 보냈다. J에게서 “즐겁게 여행해 ~”라고 답장이 왔다.


그리하여 에베레스트를 향한 단편적이고, 직선적인 나의 여정은 시작되었다. 유메마쿠라 바쿠가 산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그 산에 오르려는 한 남자의 이야기를 구상하기 시작한 것은 책이 나오기 20년도 더 전이었다. 「히말라야의 에베레스트에 오르는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그런 시기에 히말라야 등반 역사상 최대의 미스터리라 불리는 사건, 맬러리의 실종과 조난에 대해 알게 됐다. 심지어 맬러리가 에베레스트 정상에 섰을 가능성도 있었고, 그걸 알아낼 방법도 남겨져 있었다. 맬러리가 에베레스트 정상에 그 누구보다(그 누군가는 지금까지 뉴질랜드 등산가이자 탐험가인 ‘애드먼드 힐러리’로 알려져 있고, 그날은 1953년 5월 29일이었다.) 가장 먼저 섰을까. 그걸 알아내기 위해서는 맬러리의 시체와 함께 존재할 카메라 속 필름을 꺼내서 현상하면 된다.(1924년 눈과 함께 묻힌 맬러리의 시체는 1999년 5월 에베레스트 북벽 8,230미터 부근에서 ‘맬러리·어빈 수색대’에 의해 발견됐다. 하지만 카메라는 찾지 못했다. 그가 정상을 밟았는지는 영원한 수수께끼로 남겨졌다. 소설을 위해서는 다행스런 일이었다. 유메마쿠라 바쿠의 소설은 1997년 발간됐다. 맬러리를 발견하기 2년 전이다. 바쿠는 맬러리 시체를 발견했다는 뉴스를 듣고 “이 책을 다 써서 다행이라고 가슴을 쓸어내렸다.”고 스스로 이야기 하며, “어쩔 수 없이 마지막 장면을 고쳐 쓰게 됐다.”고 했다. 어떻게 고쳤는지는 밝히지 않았다.).....<중략>.... 순식간에 스토리의 핵심까지 이르렀지만 당장 쓸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20대 중반인 나에게는 아직 역부족이었고, 당시까지 히말라야 경험은 한 번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쓰게 된다면 최소한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까지는 다녀와야 했다. 결국 구상에서 집필을 끝내기까지 20년 이상이 걸리고 말았다.」(P.806 작가 후기 中)


유메마쿠라 바쿠가 ‘신들의 봉우리’를 쓰기 시작해 끝내기까지는 3년도 더 넘게 걸렸다. “이 원고를 쓰는 작업은 작은 국자로 그 내용을 떠서 원고지 위에 거듭 붓는 행위였다는 기분이 든다. 간신이 끝이 보이기 시작하면 50매만 더, 50매만 더, 이러면서 쓰고 또 써도 다 쓰지 못한 것이 남아, 이제 끝나겠지 하면서 반년이나 연재를 연장하고 말았다.(‘신들의 봉우리’는 ‘소설스바루 小說すばゐ’에 1994년 봄부터 연재되기 시작해 1997년 봄 연재가 끝났다. 분량은 400자 원고지 1,700매에 달했다.) 이제 다 쓰고 몸 안에 남아 있는 건, 없다. 전부 썼다. 전부 토해냈다. 역부족이었다 싶은 데도 없다. 구석구석 온 힘을 다 기울였다. 열 살 때부터 산을 오르면서 몸 안에 쌓아둔 걸 전부 다 꺼내고 말았다. 그것도 정면에서 맞서 싸우듯이 전력을 다해 산에 대한 이야기를 썼다. 이 이야기에 변화구는 없다. 직구, 온 힘을 다 쏟아 부은 스트레이트. 이제 산에 대한 이야기는 두 번 다시 쓸 수 없으리라. 이게 최초이자 최후이다. 그런 이야기를 쓰고 말았다. 이만한 산악소설은 아마 더 이상 나오기 힘들겠지. 그리고 아무나 쓸 수 있는 이야기도 아니다. 이제 항복할 텐가.” 어찌 보면 오만하기까지 한 작가 후기다. 하지만 이 책을 모두 읽고 나서도 그 오만함을 유지할 수 있을까. 나는 어떠한 토도 달 수 없었다.


우리나라에 산악소설은 참으로 드물다. 아니, 있기나 한 지 모르겠다. 과문(寡聞)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본 적도 읽은 적도 없다. 이러한 산악소설은 산과 글이 함께 해야 하는데, 산이 되면 글이 따르지 못하고, 글이 되면 산을 알지 못해 산과 글이 함께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신들의 봉우리’같은 대작, 실증적이고 체험적인 산악소설이 나오지 못하는 이유다. 나는 이 소설을 읽는 내내 겨울 에베레스트의 극한 환경과 그 극한의 환경 속에서 인간은 또 어떤 상태가 되는지 구체적이고 세밀하게 표현한 작가의 문장에 감탄했다. 그것은 도저히 경험해보지 않고서는 나올 수 없는 문장들이었다. 유메마쿠라 바쿠는 여섯 번이나 히말라야를 다녀왔다. 마지막 히말라야는 1993년 가을부터 겨울에 걸쳐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를 다녀온 것이었다. 소설을 쓰기 시작하기 바로 전이었다. 소설의 압도적이고 세밀한 문장들은 모두 여기서 나온 것이었다. 조지 하부의 산, 그리고 어쩌면 집념조차도.


왜 산에 가냐는 질문에 맬러리는 “산이 거기 있으니까”라고 대단히 유명한 말을 했다. 이 말에 대해 하부 조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산이 거기 있어서가 아냐. 내가 여기에 있으니까. 내가 여기에 있으니까 산에 오르는 거야.” 하부의 말은 아주 단순하고 존재론적이다. “하세(하부와 한 때 경쟁자였던 천재 등산가)는 죽었지만 나는 살아있어” 하부는 여전히 현역으로 마음속 귀신과 대면하며 에베레스트 남서벽 바위에 먼지처럼 달라붙어서 자신의 내면에서 맹렬히 날뛰는 무언가와 정면으로 마주보고 있었다. 하부에게 산은 무엇인가? 왜 산에 가는가? 왜 산에 오르는가? 그 질문에는 대답이 없다. 그건 왜 사냐는 질문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다시 하부 조지의 수기를 인용한다.


 「다리가 안 움직이면 손으로 걸어.

손이 안 움직이면 손가락으로 걸어.

손가락이 안 움직이면 이빨로 눈(雪)을 씹으며 걸어.

이빨도 안 되면 눈(目)으로 걸어.

눈으로 걸어.

눈으로 가는 거야.

눈으로 노려보며 걸어.」


‘신들의 봉우리’는 산에 뜻을 품었다가 재능에 한계를 느껴 프리랜서 카메라맨으로 일하는 39세의 남자, 후카마치 마코토가 사라진 일본 산악계의 전설 하부 조지를 좇아가는 이야기다. 그 시작은 네팔 카트만두에서 우연히 얻게 되는 카메라(어쩌면 1924년 히말라야를 오르다 실종된 조지 맬러리의 것일지도 모를) 하나에서 시작한다. 하지만 “정말 엄청나다. 읽으면 온몸이 고동친다. 아아, 대체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해야 할까. 한가운데로 마구 찔러오는 호쾌한 직구다. 모략도 없거니와 특별한 세계도 없다. 남자가 오로지 내내 산에 오르는 이야기다. 고작 그뿐인데도 읽는 동안 심장이 두근거리며 고동친다. 그 압도적인 박력에 그저 신음만 토할 뿐이다.”라고 ‘기타가미 지로北上次郞(문학·미스터리 평론가, 서평가)는 책 해설에서 말하고 있다. 이러한 정도이니 나 스스로도 어떻게 책 후기를 쓸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사실은 문재가 부족해 어떻게 쓰야 할 줄을 몰랐다.- 하고 싶은 말들은 작가가 후기에서 이미 이야기 했거나, 작가가 민망해서 하지 못한 말들은 작품해설에서 기타가미 지로가 이미 이야기 해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마디 한다면, 정말 엄청나고 압도적인, 전율이 이는 책이다, 정도. 아마, 책이 나왔던 20년 전 쯤 내가 이 책을 알고, 읽었더라면(나는 이 책을 2020년 9월 13일 읽기 시작해 10월 17일 오후 7시 57분에 읽기를 마쳤다. 이 책을 모두 읽는데 한 달이 조금 넘게 걸렸다.-본문 및 작가후기, 해설까지 모두 822페이지에 달하는 아주 두꺼운 책이다.- 마음먹고 읽었더라면 3~4일 정도 걸리지 않았을까. 하지만 이 책을 굳이 그렇게 급하게 읽을 이유는 없었다.) 나도 맬러리나 하부 조지처럼 에베레스트 바위틈 어딘가, 혹은 초모랑마 깊은 크레바스 속 어딘가에 눈과 함께 잠들어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P.S 1. 아, 참 생각났다. 1999년 5월 맬러리의 시체가 발견되면서 유메마쿠라 바쿠는 어쩔 수 없이 마지막 장면을 고쳐썼다고 했는데, 아마 이 다음 장면이지 않을까. 후카마치는 사투를 벌이며 에베레스트 북동릉을 내려오다 한 바위에 도착해 바람과 눈을 피해 바위 그늘로 숨어들며 두 구의 시체를 보았다. 한 구는 어쩌면 맬러리, 그러면 또 한 구는.... 그것은 바로 하부 조지였다. 유메마쿠라 바쿠는 두 구의 시체를 한 공간 안에다 두면서 은연중에 두 사람 모두 정상을 밟고 내려오는 길이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물론, 아직 역사적으로 맬러리에게 있어 에베레스트 정상은 미등봉이다.) “그런데 하부는 왜 이런 장소에 있는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루트를 착각했단 말인가. 아니, 하나만은 확실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이것만은 틀림없었다. 하부는 에베레스트 정상에 섰다. 정상에 섰기에 티베트 쪽 이 장소에 하부가 있을 수 있다. 당신, 해냈군.”(하부는 후카마치가 보는 앞에서 에베레스트 남서벽을 올랐다. 시체가 발견된 곳이 북동릉이니 당연히 정상을 밟고 내려오는 길일 것이라는 것이 상식적인 판단이다.) 하부가 해냈다면 맬러리도 해 낸 것이다. 둘은 지금 같은 공간에 있다. 하부의 극한의 열정에 대한 바쿠의 오마주, 해피엔딩이다.


P.S 2. ‘신들의 봉우리’를 모두 읽고 뭐라도 쓰지 않으면 지난 한달 내내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에베레스트의 모든 것이 사라질 것 같았다. 그 격렬한 전율과 고통, 극한 의지와 집념, 그리고 결국은 거기에 있는 산...., 책 속의 그것이 그 무엇이 되었든 간에 내 머리 속의 기억은 며칠을 가지 못할 것이어서 나는 그것들을 언제라도 꺼내어 볼 수 있게 어디엔가 기록해 두어야만 했다. 어쩌면 그것은 강박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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